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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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지금 이십대라면, 그리고 소설가가 되려 하는데 <왼손잡이 여인>을 읽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아마도 절망했을 거 같다.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는데 뭘 더 보탤 수 있을까, 라는 좌절감에 빠져 한 달 가량 술독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체조선수가 몬트리올에서 나디아 코마네치의 퍼포먼스를 직접 본 기분과 비슷했을 것 같다.
  스토리와 문장이 다 절편이다. 다행히 난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다. 그간 페터 한트케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단정해놓고 이이의 작품은 별로 읽지 않았다. 201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스웨덴 한림원이 잘난 척하기 위해 잘난 척하는 작가한테 상을 줬다고 불만을 갖기도 했다. <소망 없는 불행>,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그리고 희곡 <관객모독> 이렇게 네 권만 라이브러리에 들어 있을 뿐. 그래 이 책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그저 싼 맛에 골랐다가, 언필칭 대박이다. 한트케를 멀리 한 지난 세월이 아쉽다.

 

  이 여자 마리안느는 서른 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진 도자기 회사의 지점에서 판매 책임자로 근무하는 남편 부르노,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스테판과 함께 테라스 형태로 지은 방갈로에 살고 있다. 부자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안락한 생활을 누릴 정도의 중산층으로, 언제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날지 몰라 방갈로에 세 들어 있다. 부르노가 몇 주일 만에 스칸디나비아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 작품은 시작한다.
  아내가 공항으로 남편을 마중 가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인 아이를 재우고 나서, 부부는 오랜만에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정찬을 즐긴다. 가슴이 팬 드레스를 입은 아내를 앞에 앉혀놓고 칼바도스를 곁들여 훌륭한 식사와 늙은 종업원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는 일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기묘한 방식에 의해 인류 전체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일이라 규정하는 남편 부르노. 봉건적 봉사정신의 완숙미를 보여주며 서비스를 하는 종업원에게 부르노는 빈 방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이왕 나온 김에 호텔에서 자고 가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마리안느는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 즉각적인 생각.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다. 핀란드에서 자기 회사 제품의 변기 위에 앉아 있을 때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공포감에 휩싸였다는 남편의 말 때문인가? 아내와 함께 견고하게 묶여 있다는 감정, 이런 걸 느끼면서 그러나 남편은, 당신이 없어도 살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말을 나눈다. 사람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에서.

 

  당신이 나를 떠나리라는 것. 당신이 나를 혼자 내버려두리라는 것. 바로 그것이에요. 부르노, 가세요.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요.
  영원히 말이지?
  모르겠어요. 그저 당신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떠나리라는 것뿐이에요.
  난 우선 돌아가서 호텔에서 따뜻한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어. 그리고 오후에 짐을 가지러 가겠어.

 

  이렇게 남편은 호텔로 돌아가고, 아내는 집에 도착해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남편의 트렁크 두 개를 채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와 놀아주다가, 남편이 오고, 악수를 한 다음, 트렁크를 들고 떠난다. 마리안느는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아이들 놀이터의 CCTV와 연결이 된 TV를 쳐다보는 마리안느의 두 눈에 이제 눈물이 고인다. 밤이 온다. 마리안느는 이불을 싸들고 아이의 방에 가 아이의 침대 옆 바닥에 눕니다.
  다음날 아침, 마리안느는 예전에 다니던 출판사 사장에게 편지를 해 프랑스어 번역 제안서를 보낸다. 우체통이 단지 끝 공중전화박스 옆에 있어 그곳을 지나다 기다리고 있던 부르노를 만난다. 부르노는 여자를 전화박스로 몰아넣고 한 대 치려고 했으나 전화박스의 공간이 너무 협소해 실패한다. 부르노는 화가 난다. 무척 화가 난다.

 

  나를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아. 그러다간 당신도 어느 날엔가 죽고 말 거야.

 

  부르노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집에서 쫓겨난 거다. 마리안느의 친구이자 아들 스테판의 담임선생인 프란치스카의 집에서 지내라고 한 것도 아내 마리안느다. 그러나 이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자는 말한다.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생각해라. 너희들이 나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너희들로부터 자유스러울 것이다.

 

  집에 돌아온 마리안느는 집안의 가구를 다시 배치하고, 대청소를 마친다. 아들이 도와준다. 일을 다 마치고 어린 아들과 눈이 마주친 마리안느가 웃는다. 스테판이 말한다.

 

  웃지 마세요. 일부러 웃으려고 애를 써서 웃는 거잖아요. 나도 슬프단 말이에요. 슬픈 건 엄마뿐만이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마리안느, 한 여자가 자발적인 긴 고독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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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0-21 09: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들이 도와준다….이 문장이 아픕니다.

Falstaff 2021-10-21 09:3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저는 참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실지 궁금하군요.
읽으면서 여러차례 감탄을 했었습니다.

새파랑 2021-10-21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른 한트케 작품과 다른가 보네요. 전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한 작품만 봤는데 너무 어렵더라구요 ㅜㅜ
이건 무조건 찜~!!

Falstaff 2021-10-21 10:51   좋아요 4 | URL
뭐든지 그렇지만 한트케도 독자하고 잘 맞는 게 젤 중요한 듯합니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지요.

붕붕툐툐 2021-10-21 12: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낯익다 싶었는데 <관객모독> 작가였군요! 이 작품은 연극으로 본 적이 있거든요! 저도 이 작품 찜!!ㅎㅎ

Falstaff 2021-10-21 13:07   좋아요 3 | URL
넵. 관객모독은 희곡으로 읽어도 괜찮았어요. ㅎㅎㅎ

잠자냥 2021-10-21 12: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우 한트케 저도 합이 안 맞아서 버린(?) 작가인데 이 책까지만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나디아 코마네치에서 빵! 터집니다. ㅋㅋㅋㅋ 요즘 젊은이들은 저 코마네치 잘 모르겠죠?

Falstaff 2021-10-21 13:08   좋아요 4 | URL
저도 이 문고판 책값이 싸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ㅋㅋㅋㅋㅋ
이름만 조금 들어봤겠지요, 나디아 코마네치. 당시엔 정말 경악이었는데 말입죠.
보고, 보고, 또 보고 아우... 근데 너무 오래 전 이야기를 했나 싶기도. ㅋㅋ

coolcat329 2021-10-21 2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안느가 왜 그러는건지 이해가 안가는데 코마네치 수준이라니 저도 찜하겠습니다. 책 읽으면 마리안느 이해가 가겠죠?😙

Falstaff 2021-10-22 08:19   좋아요 3 | URL
마리안느의 행복 또는 자아 찾기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선 네드라가 깔끔하게 이혼해버지만 마리안느는 자신의 일을 갖고자 하는군요. 이하 생략!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