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카를로 고찌 지음, 최영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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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 마니아들은 혹시 카를로 고찌라는 이름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푸치니의 유작이자 미완성 작품인 <투란도트>의 원작을 쓴 인물. 하지만 그건 한 다리 건넌 거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쉴러가, 이 이탈리아 전통 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 양식 특유의 천방지축을 대표하는 카를로 고찌 작 <투란도트>를 “독일식 미적 이데아로 바꾸어 쓴” 작품을 토대로 한 것이 푸치니의 <투란도트>다. 푸치니는 쉴러의 <투란도트>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책자를 읽고 내용이 지극히 마음에 들어 자신의 대본작가 풀pool을 동원해 오페라 리브레토를 썼다.
  카를로 고찌는 1720년 베니스의 몰락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당시엔 거의 상상하지 못할 86세의 나이로 역시 베니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 나이로 치면 한 120살까지 산건가 싶다. 어린 나이에 고찌의 아빠는 카를로를 위해 재정적 뒷받침을 해줄 수 없을 지경까지 몰려 일찌감치 달마치아의 군대에 입대해 3년간 복무한다. 복무를 끝내고 베니스로 돌아온 카를로는 외국문화의 유입으로부터 투스카니 문학을 보존하기 위한 그라넬레스키Granelleschi 협회에 가입한다. 이를 계기로 카를로 고찌가 코메디아 델라르테 같은 이탈리아의 정통 희극을 계승하는데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16세기에 시작해 18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던 이탈리아의 희극 양식으로 배우들의 즉흥 연기, 소위 애드립과 재간, 춤, 노래, 곡예 등을 중시하는 장르라고 하며, 우리가 서양 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알레키노(하를레킨), 파르노디노(삐에로) 같은 광대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정해진 타입에 따라 가면을 쓰고 연기했고, 이 장르는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는데 프랑스 연극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카를로 고찌의 대표작은 대부분 176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제목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은, 푸치니의 오페라로 각색된 <투란도트>, 프로코피예프가 발레와 오페라로 작곡한 <세 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 외에도 오늘 소개하는 <까마귀>와 <사슴 왕>, <뱀 여인>, <푸른 괴물>, <초록 새> 등이 있다. 제목만 가지고도 고찌의 작품 속에 마법과 주술, 저주, 변신 같은 신화, 동화, 우화적인 요소가 많으리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까마귀>를 읽다 보면 이게 아동을 위한 동화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독자는 감상중인 희곡이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이탈리아 전통 희극의 정수인 코메디아 델라르테 작품을 읽고 있다는 걸 떠올려야 하리라. 난 실제로 이 드라마를 읽는 동안 자꾸 그림 형제의 동화작품 몇 개가 머릿속에서 삼삼했다.
  가상의 국가 프라톰브로소의 왕 밀로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청년 왕이다. 나라가 저절로 나날이 왕성해지는 태평성대라서 밀로 왕은 우애 깊은 아우 제나로 왕제와 어울려 날이면 날마다 숲속에 들어가 사냥하는 재미로 기둥뿌리 썩는 줄 몰랐다. 그러나 조심했어야지. 시대가 18세기 이전. 당시의 숲이란 언제나 정령들과 마녀가 살았던 법. 하루는 나뭇가지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깍 깍 불길하게 울고 있는 걸 밀로 왕이 활시위를 당겨 한 살에 명중시켰고, 까마귀는 대리석 무덤 위에 떨어져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 그랬더니 펑, 하고 드라이아이스 연기와 함께 효과음이 나더니 늙은 마녀가 등장해 왕한테 저주를 내렸다.

 

  “넌 내 대리석 무덤처럼 하얀 피부의 여인을 찾아내야 한다. 여인의 입술은 내 까마귀의 피처럼 자줏빛이고, 머리털은 깃처럼 검은색이어야 한다. 만약 그런 여인을 찾지 못하면 플루토 신께 맹세코 너의 목숨을 가져갈 것이다.”

 

  원래 연극을 비롯한 모든 무대예술에서는, 저주를 포함한 불길한 예언은 항상 들어맞는 법이고, 총명한 밀로 왕도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터라 그날로 이마에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자리보전을 하기 시작했다. 제나로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형은 죽어 자빠지고 자기가 왕위에 오를 터인데 너무나도 형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직 인사를 고하고 마녀가 주문한 여성을 찾기 위하여 늙은 선장 판타로네와 함께 세계 일주를 떠난다. 세상 곳곳을 뒤져 흰 피부, 핏빛 입술과 검은 머리털을 가진 여성을 3년 동안이나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다마스커스의 마법사 왕 노란도의 딸 아르밀다 공주가 딱 그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고, 할렘 속의 순진한 아가씨를 꼬드겨 배에 태워 납치해오기에 이르렀다.
  다마스커스를 떠나 프라톰브로소까지 항해하는 내내 폭풍우를 불게 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노란도 왕은, 선장 판타노레를 통해 늠름한 기상의 매와 하늘 같은 말 한 마리를 제나로 왕제에게 전한다. 왕에게 진상할 품목으로. 그러나 저주받은 선물.
  매는 왕을 보면 발톱으로 두 눈을 파낼 것이며, 말은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왕의 목숨을 앗아갈 것. 게다가 왕이 아르밀다 공주와 결혼을 한다면 첫날밤에 괴물이 나타나 밀로 왕을 잡아먹으리라는 것인데, 더 가관인 것은 만일 이런 사실을 제나로 왕제가 누구에게든지 이야기하거나 언질이라도 주면 곧바로 대리석 조각으로 변해버릴 거란다. 그러니 우애 좋은 형이기도 한 왕을 사랑하는 제나로 왕자는 어떡해야 할까.
  할 수 없다. 제나로는 먼저 매를 형에게 바친다. 그러나 매가 형의 팔뚝에 앉기 바로 전에 칼로 매의 목을 따버린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밀로 왕. 매의 피가 자신의 소매를 적신 거 아닌가. 3년 만에 만난 형에게 이런 불충을. 이어서 선물 받은 하늘같은 말을 타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왕제는 다시 칼을 뽑아 말 뒷발의 오금 힘줄을 그어 끊어버린다. 더욱 불쾌한 형.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아르밀다 공주까지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미 제나로 왕제에 대한 보호관찰령이 내렸고, 결혼식은 신속하게 열릴 예정이었는데 왕제는 사라졌다.
  왕궁의 지하 미로 속으로 숨은 제나로 왕제는 결혼식이 끝나고 왕의 방문 앞 전실 바닥돌을 열고 등장한다. 거기서 다시 칼을 뽑고 이제 등장할 괴물을 기다리고 있는 터. 일전을 감행해 자기가 대신 잡아먹히든지 아니면 괴물을 잡아 자신의 죄가 없음을 증명하고자 할 따름이다. 시간이 가고 드디어 나타나는 괴물. 왕자는 도저히 힘으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과 벅찬 싸움을 계속하다가 칼을 내리쳤는데 괴물이 연기와 함께 사라졌고, 칼은 허공을 갈랐으며,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방문 손잡이를 내려쳐 신방의 자물쇠가 열렸고, 급기야 왕이 등장했다. 밀로 왕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 이 앞에 거친 숨을 내쉬며 큰 칼을 번쩍 들고 있는 제나로 왕제. 이거 뭐야. 전형적인 왕 시해의 모습이다. 왕제는 즉각 체포되고 지하 감옥에 수감, 단 하루의 재판으로 오늘이 저물기 전에 왕궁 앞 광장에서 중인환시리에 참수형의 선고를 받는다.
  처형을 기다리던 제나로, 마지막 소원으로 형을 만나고, 죽기 전에 매와 말과 결혼초야의 괴물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노란도의 저주에 따라 대리석으로 변해버린다. 동생의 결백을 알게 된 밀로 왕은 통곡을 터뜨리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밀로 왕 앞에 순간이동 해 나타난 마법사 왕 노란도. 동생을 살리고 싶으면 자기 딸이기도 한 아르밀다를 칼로 찔러 제나로가 변신한 대리석을 피로 적시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한다. 사랑하는 아르밀다를 죽이다니. 안 그러면 자신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 동생을 구할 수 없는 진퇴양난. 어떻게 해야 하나. 이건 내가 알려드릴 수 없다. 절묘한 해결방법이 있으니, 장담컨대 당신은 생각도 못한 터무니없는 묘수가 등장하리니. 아 껌벅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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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27 09: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요~^^
이런걸 낚였다고 하는거죠? ㅋㅋ

Falstaff 2021-09-27 09:04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낚이지 마세요. 과하게 동화적이라서 현대인한테는 재미를 주지 못할 거 같습니다. ^^

그레이스 2021-09-27 09:07   좋아요 3 | URL
결말을 말씀해주시지 않으시니 이 리뷰 읽어가던 저는 ‘내일 얘기해줄께‘ 하던 이야기 할아버지가 생각나네요

Falstaff 2021-09-27 09:11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그건 맞습니다.
현대 독자들은 도저히 생각하지도 못할 포스트모던으로 대단원을 맞습니다. 너무 혁신적이라 그만 어이가 없어서 처음엔 멍~하다가 약 2초 후에 킬킬대며 웃음이 나오더군요.
뭔지는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9-27 09:12   좋아요 3 | URL
500원 드릴까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9-27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묘한 해결방법 뭡니까!!

저는 510원!!

그레이스 2021-09-27 12:27   좋아요 1 | URL
궁금하면 500원입니다!

- 2021-09-27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와 여기서 여기서 끊냐.... 나쁘다. 폴스타프님 ㅋㅋㅋㅋㅋㅋ

- 2021-09-27 21:55   좋아요 0 | URL
대충 문제 해결은 알겠으나 마지막 대사는 모르옵니다…. (지금 책 있는 도서관 뒤지다 현타왔어옄ㅋㅋㅋ)

Falstaff 2021-09-27 1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 공장쟝 님 : 좀 심하게 말씀드립자면, 이 책은 오직 하나 마지막 대사 딱 하나를 위하여 쌔가 빠지게 달려온 건데 그걸 어떻게 얘기합니까!!! 와,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랴!!! 이거하고 똑같은 걸요. ㅠㅠ

붕붕툐툐 2021-09-27 21: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진짜 이 스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듯합니다!ㅎㅎㅎ

- 2021-09-27 21:48   좋아요 2 | URL
마지막 대사는 모르지만 너무도 약이 올라 검색해서 찾아보고 왔사옵미다!!! 저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 카를로 고찌 때찌!!!

Falstaff 2021-09-27 21:50   좋아요 2 | URL
아니, 그런 싸가지 읎는 독자도 있더란 말입니까? ㅋㅋㅋㅋㅋ
근데 정말 웃기지 않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 2021-09-27 21:59   좋아요 1 | URL
웃을 수 없고 분노만 (술 벌컥벌컥.!!!)

Falstaff 2021-09-28 08:21   좋아요 0 | URL
공장쟝 님, 진정하시옵소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