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 / 메이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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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로버트 휴 벤슨은 1871년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아버지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과 어머니 매리의 3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다른 성직자도 아니고 캔터베리 대주교면 영어로 Archbishop이니 위세가 대단했을 듯.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튼 컬리지를 거쳐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고전과 신학을 공부하고, 1895년 스물네 살에 영국국교회의 성직자가 된다. 국교회에서 그대로 있었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까지 오르고, 영국 국교니까 아름다운 아가씨를 골라 번듯하게 장가들어 아들, 딸 합쳐 한 다스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해진 코스대로 가기만 한다면 인생이 아니라서 성직자 임명 다음 해인 스물다섯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운명하고 만다. 이때 충격이 컸는지 벤슨은 심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중동 여행을 하게 됐고, 이때 영국국교회에 대해 회의가 들기 시작해 결국 1903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 1904년에 가톨릭 신부가 된다.

  이이의 남매 3남 1녀 모두 일단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는 문재文才가 있었으니, 로버트 휴 벤슨 역시 가톨릭 사제와 소설, 동화, SF, 현대물, 대본, 변증론, 종교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한다.

  이 책은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교황의 자리에 오른 2013년에 일반 교인들을 위한 강론에서 현대의 예언서 같은 책이라고 하며 일독을 권한 유명한 일화를 지녔다. 나는 헌책을 샀는데, 표지를 넘기면 여백에, 성당 오빠 세례자 요한이 성당 누이 이 알레나에게 “이 책을 통해 신앙적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하시길 바랍니다─!”라고 헌사를 써 놓은 것이 보인다. 여기에 걸맞은 성서 구절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골로 4,2”와 함께. 뭐 이해해야지. 하여튼 성당 누이 이 알레나는 선물 받은 책을 팔아먹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


  로버트 휴 벤슨 신부는 1914년 10월, 1차 세계대전이 터진 여름이 지나자마자 깨지 않을 잠에 빠진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건 1907년. 책의 무대는 아무리 빨라야 1990년. 그러니 당시로서는 미래소설이다. 성직자가 쓴 미래소설. 작가는 1907년 당시부터 1990년까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할 필요가 있다. 서른다섯 살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온통 백발인 가톨릭 신부 퍼시 프랭클린이 다정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프랜시스 신부를 대동하고 아흔 살이 넘은 템플턴 노인을 찾아 인터뷰한다. 이에 따르면 영국과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 없이 이런 과정을 거쳐 20세기를 보냈다.


  1917년. 노동당 집권, 공산주의 시대 개막. 이후 공산주의는 영국 내에서 정치적으로 타격받은 적이 없음.

  1925년. 보수 성직자 블렌킨이 <뉴 피플> 창간하고 <더 타임스> 폐간.

  1929년. 영국국교회 소멸. 국교회는 다른 종파로 넘어감.

  1935년. 상원 해산.

  1959년. 교육법 통과. 교육과 종교가 확실히 분리. 유산상속세 개혁. 상속의 사실상 폐지.

  1960년. 기간산업 국유화법 통과. 모든 사업에 개인 지분은 6퍼센트를 초과하지 못함.


  세계적으로는 아메리카가 영국에 간섭하여 영국은 인도와 호주 식민지를 상실한 채 남아프리카만 보호국 명목으로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정치적 병합에 성공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척추인 우랄산맥을 기점으로 베링해협까지와 인도, 호주, 뉴질랜드를 망라한 동방제국을 건설, 오랜 세월 피압박 지역이었던 제국이 이제 막강한 세력을 갖추었다. 우랄산맥 서쪽부터 유럽, 아프리카까지의 서방제국은 통일된 남북 아메리카의 도움 없이는 오랜 세월 피해의식에 젖어 살던 동방제국을 견제하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

  사상적으로는 가톨릭교, 인본주의, 동방 종교로 3분할 되었으나 가톨릭교회는 빠른 속도로 쇠락해가고 있다. 개신교는 이미 사망했으며, 기독교 같은 초자연적 종교는 권위가 무너지고, 초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인본주의, 특히 심리학이 종교의 자리를 급속도로 대체하게 된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영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종교적 감성까지 보완해버린 것. 유물론마저 실패했다.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었던 대학은 스스로 생산성을 증명하는 데 실패하여 마지막 대학으로 케임브리지 과학대학과 옥스퍼드 식민지 분교만 남았을 뿐이다. 수많은 교수들은 직업을 잃었고, 학문 외 다른 생존방식에 취약한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1~2급 빈민 수용소에 입소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영혼을 담당하는 가톨릭 사제의 입장에서 보면 무지한 디스토피아의 미래일 수밖에. 세상은 급속도로 속화되어 영적 멸망에 이른 상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세상. 이의 타개를 위하여는 오직 하나, 우리 주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일 말고는 가망이 없다는 결론이다. 이렇게 20세기가 저물고 있었다.


  작품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등장하는 인물이 20세기 말에 가장 훌륭하게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정치인으로 서른 살을 갓 넘긴 호감가는 외모의 남자 크로이던의 초선의원인 올리버 브랜드와 그의 아내 메이블.

  올리버가 생각하는 신은 세상에 태어난 생명의 총합으로 신이란 존재의 본질은 집단의식의 통합체이다.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신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에게 호소하는 행위는 반역에 버금가는 일. 분명한 건 초월적 신은 없다는 것. 오직 하나, 신은 인간이라는 변하지 않는 진리다.

  올리버의 어머니 브랜드 노부인은 어린 시절 가톨릭을 믿어 당시의 흔적이 얼룩처럼 영혼에 남아 있어, 낡은 애독서 <영혼의 정원>을 아들 모르게 탐독하고 있는 것을 아들은 모른 척하고 있다. 어느 아침, 메이블이 브라이턴 역 광장을 지날 때 하늘에서 초고속 수송선 볼러가 추락하여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숱한 사람이 즉사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음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이때 길을 지나던 백발의 신부, 젊은 얼굴을 한 백발의 퍼스 프랭클린 신부가 십자가를 들고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종부성사를 해주기 시작했으며, 중상자 역시 간절히 성사를 바라는 눈길을 하는 걸 메이블이 목격한다.

  이어서 곧바로 손바닥만 한 장비를 들고 등장하는 요원들. 정부에서 파견한 안락사 대원들이 투입되는 순간이다. 메이블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죽음에 대하여 깊고 깊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냥, 그렇게 끝나고 마는 것일까. 집에 돌아와 올리버의 설명을 들으니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것이란다. 그래서 진정한 성직자는 안락사 대원들이라고. 안락사 운동을 그토록 오래 막아온 것도 자비심을 거론한 역겨운 종교였었다고. 인본주의의 신은 하루에 만 번은 죽었다 다시 살아난 위대한 신이란다. 기독교를 세운 타르수스 출신의 사울보다 월등한 안락사 대원들. 딱 한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인본주의의 신.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죽음 후의 영혼에 관한 의심의 씨앗은 뿌려진다.


  나는 여기서 더 읽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종교는 이제 내 관심사가 아니라서. 구원과 영혼과 사후 세계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모든 것, 아울러 올리버가 주장하는 종교의 대체물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길 잃은 검은 양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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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24 09: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길잃은 검은양 폴스타프님이군요 ㅎㅎ 뒷이야기가 삭제되어 있어서 더 궁금증을 유발하시네요 😅

Falstaff 2021-09-24 10:58   좋아요 4 | URL
옙. 한 번 집 나가버리니까 여간해서 집생각이 안 나더만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9-24 09: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뭔가 표지가..... 상당히 책으로부터 저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표지였습니다. ㅋㅋㅋㅋㅋ
폴스타프 님이 중간에 책 그만 읽는 경우 꽤 드물지 않나요? 그럼에도 폴스타프 님은 이런(?) 책도 도전하시고 매번 감탄합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21-09-24 11:00   좋아요 3 | URL
이 책이 은근히 많이 인용되더라고요.
가톨릭 사제가 쓴 미래 디스토피아라서 그런가 봅니다. 저도 기대 잔뜩 했다가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유도˝하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만. ㅋㅋㅋ
언제나 영혼보다는 빵이 먼저라는 게 신념입니다. -_-;;;

coolcat329 2021-09-24 12:17   좋아요 3 | URL
저도 표지가 참...그러네요.

- 2021-09-24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기서 그만 두시면 어떡해요? ㅋㅋㅋㅋㅋ 흥미진진한데??🤔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송기라함은 역시 911을 떠올리게하고 말이죠. 그러나.. 뭔가 적어주신 세계관은 잉?스러워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어느 부분이 예언서 같다고한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읽을 생각은 없다ㅋㅋㅋ) 폴스타프님이 읽고 마저 써주실 부분이 궁금하다!!

잠자냥 2021-09-24 10:44   좋아요 3 | URL
그대가 뒷부분 읽고 이어서 페이퍼 쓰시오.... 물론 <제2의 성> 다 읽고 나서....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24 11:03   좋아요 4 | URL
공장쟝님 / 교황 성하께서는 앞으로 점점 종교가 설 자리가 좁아진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거 같습니다만, 뒤를 안 읽어서 뭐라 탁 이야기하긴 좀 그렇습니다.
아네요. 전 더 안 읽을 거예요. ㅋㅋㅋ 그냥 상상만 하시는 것도 재미날 거 같은데요!

잠자냥 님 / 브라보! 공장쟝님한테 미루자는 데 한 표!!!! ㅋㅋㅋㅋ

- 2021-09-24 17:35   좋아요 2 | URL
앙돼… 😩

2021-09-24 1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26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