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NFF (New Face of Fiction)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이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기 전에 류드밀라 스테파노브나 페트루셉스카야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 이이는 당연히 소설가이고, 희곡, 동화, 만화 시나리오를 썼으며, 70대엔 가수로 데뷔한 이력까지 있다.

 

  페트루셉스카야는 1938년에, 일찍이 신사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아지트로 유명한 모스크바의 웅장한 메트로폴 호텔에서 태어나, 볼셰비키 지식인이었던 아버지가 국가의 적으로 찍힌 1941년까지 그 호텔 건물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이후, 현재 지명 ‘사마라’ 당시 쿠이비셰프로 도망을 기도한 아내와 딸 루드밀라를 버리고 만다. 작가와 어머니는 당연히 역경에 처해 쿠이비셰프의 수용시설, 길거리 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작가 류드밀라 페르루셉스카야의 작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공동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당시 류드밀라의 별명이 “모스크바에서 온 성냥개비”였을 정도로 비쩍 마른 몸매였다고. 이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모녀는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이이의 작품집 《지금은 밤》에서 보듯이, 소련에서는 공동 아파트에 사는 극빈자라 하더라도 머리 좋은 청소년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에 갈 수 있어서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진학해 저널리즘을 공부해 학위를 딴다.
  페트루셉스카야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소비에트 작가인 동시에 동유럽에서도 가장 큰 찬사를 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유럽 잡지 <퍼블리셔 위클리>는 이이를 두고 생존해 있는 가장 훌륭한 러시아 작가라고 쓴 바 있다. 이이의 작품에서 독자는 포스트모던 경향, 심리학적 내면, 동시에 체호프에서 볼 수 있는 역설적 터치 등이 섞여 있을 거라는데, 하여튼 이건 위키 백과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내가 읽고 느낀 것이 기초해볼 때, 이건 과장이다. 뒤에 얘기하자.
  페트루셉스카야는 인생의 황금기를 불행하게도 철의 장막 안에서 보냈다. 이이가 쓴 작품들은 하나 같이 KGB에 의하여 검열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 붉은 점의 대머리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하기 전엔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후 세상이 좋아지자 그동안 출간하지 못했거나 했더라도 최소수량만 시중에 나와 독자가 접하기 극히 힘들었던 이이의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이런 와중에 작품이 조금은 과대포장된 것 같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도 페트루셉스카야의 책을 찍겠다고 출판사마다 이이의 전화번호를 찾느라 눈알을 뱅뱅 돌렸던 것인데, 왜 그랬냐 하면, 책이 잘 팔리니까, 돈이 들어오니까.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간한 《시간은 밤》과 단편집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를 꼽는다고 한다. 《시간은 밤》. 재미있게 잘 읽었다. “출판사에 의하여 지원받은 도서”에 대한 독자서평 없이 평균 별점 4.7에 빛나는 잘 짜여진 단편집이지만 내가 《시간은 밤》을 읽은 시점이 하필이면 같은 러시아 여성작가, 그러나 수도capital면 같은 수도냐, 모스크바가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물론 태어날 때는 레닌그라드였지만) 출신이며 페트루셉스카야보다 한 살 언니인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쓴 매혹적인 중단편집 《티끌 같은 나》를 읽은 바로 뒤라서, 물론 페르투셉스카야를 이렇게 읽은 것도 내 팔자이긴 한데, 토카레바에 비해 아주 조금, 약간의 라면 스프 같은 맛이 빠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안다, 알아. 토카레바는 오래 약사로 일하다가 나중에야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작가로의 경력이 페트루셉스카야하고 비교할 수조차 없겠지. 그런데도 하여튼 그렇다니까, 내 입맛엔.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를 넘어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이 소비에트연맹. 공산주의,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그대로 화폭이나, 화면이나, 극장무대나, 초등학교 학예회 단상이나, 원고지 위에 올려놓는 걸 가장 싫어하고, 못견뎌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인간들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들여 일단 귀싸대기 한 대 후려치는 것으로 시작해, 두드려 패고, 고문하고, 또 고문하고 다시 고문해 체제 전복의 죄명을 자백하게 만든 다음, 재판을 통해 유배를 보내거나 형장의 이슬로 만들기 좋아했던 체제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였던 거다. 상황이 이런데 어려서부터 모스크바 성냥개비라는 별호를 받았던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작가가 있으니, 유소년기의 경험이 작가의 영원한 샘물이 되는 건 당연하여, 그걸 펜으로 그리는 것이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인 바에,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제일 잘 하는 걸로 먹고 살며, 좋아하는 걸로 즐기는 법,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벌어지는 짓을 쓰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래서 페트루셉스카야는 소비에트 시절 내내 지겹도록 검열을 받아야 했고, 무수하게 삭제를 당했으니, 비록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와 이 작가의 작품이 어찌 어여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방의 문화계에서 보면 말이지. 솔직히 1920년대 이후 태어난 서양 작가의 경우에 포스트모던 경향이 하나도 없이 작품을 쓴 사람 있어? 있으면 두 명만 대보시지. 없다. 심리학적 내면을 작품에 포함시키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었나? ‘체호프 식 역설적 터치’ 대신 ‘도스토옙스키 식 죄의식’이나 ‘톨스토이 식 도덕관념’을 넣어도 전혀 문제 없……지? 아, 지금 내가 페트로셉스카야를 비난하고 있는 거 절대 아니다. 오늘의 책,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를 다른 방면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위키 백과의 틀림없이 과장된 찬사에 조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뿐이다.

 

  페트루셉스카야의 다른 직업은 희곡, 동화, 만화(영화) 시나리오 작가. 여기서 희곡만 제외하면 동화와 만화. 이들의 공통점은 어린 고객을 위한 작업이란 뜻이고, 특히 1930년대 생인 작가의 경우라면 어려서 숱하게 들은 노변담화, 즉 옛이야기가 작업의 커다란 자산이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어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가운데 생각보다 엽기, 공포물이 많다. 전 세계 동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캐릭터가 귀신, 도깨비, 괴물, 유아살해 같은.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는 러시아의 여러 잡지에 실렸던 것들을 모아 2009년 10월에 미국 펭귄 북스에서 초판 출간했다. 이 책에 실린 모두 스물한 편의 단편은 소비에트 시절이나 그 이전 시절을 무대로 온갖 엽기 귀신, 도깨비, 괴물, 유아살해, 혼돈, 이것들을 다 합해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충만하다. 동시에 뉴욕 타임스 북 리뷰는 2009년 12월에 베스트셀러로 치켜 올렸던 바, 작품이 미스터리와 우화적 요소를 담뿍 담고 있다고 평했다.
  동화와 만화영화 시나리오 창작에 깊게 관여했던 소설가가 생각하기에, 내가 알고 있는 옛이야기를 보다 현대적 옷을 입혀 다시 꾸며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유아살해를, 20세기 초중반에 바닥 세척용으로 쓰던 가성소다, 즉 양잿물을 뒤집어 씌워 죽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한다. 다른 방을 쓰고 거실과 욕실,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웃 여자가 아이 엄마이자 친구가 외출한 사이 방문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한 아이의 발목을 향해 양잿물을 좌악 뿌려, 아이고 어머니, 잔인하게도 처리하는 걸, 미스터리와 우화적 요소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이건 70세에 육박한 소설가가 어릴 적 들어 알고 있던 우화 자체를 성인 독자 읽으라고 변주하기로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쓴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첫 작품인 표제작부터 마지막 <검은 외투>까지 모두 다 그렇다.
  그리하여 이 책을 여름은 여름이되 날 선선해진 8월 말이 아니라, 진짜 찐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7말 8초의 성하에 읽으면 정말로 좋을 납량물로 보는 게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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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3 08: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보면, 시 한 편 잘못썼다고 호텔에 감금하는 벌을 내려서 주인공이 호텔 바깥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삶을 살게 되거든요. (혹시 읽으셨나요?) 그런 벌이 있으니까 이런 소설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리뷰를 읽으니 이 작가는 실제 그런 삶을 얼마간이지만 살았던거군요.

그나저나, [시간은 밤] 이라면 제가 또 가지고 있습죠. 이 책은 패스하고 시간은 밤 읽으면 되니까 오늘은 충동 당하지 않고 얌전히 갈 수 있네요. 호호.

Falstaff 2021-09-03 08:51   좋아요 2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주인공이 저 위에 이름을 올린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잖아요. ㅋㅋㅋㅋㅋ
페트루셉스카야의 아버지가 로스토프 백작과 비슷한 ˝인민의 적˝으로 찍혔었나봅니다. 이 와중에 처자식이 저 시골로 도망가려고 하니까, 스탈린한테 걸렸다 하면 무조건 사형에 처해질 위기라는 걸 직감하고 처자식을 버렸겠지요. 에휴, 하필이면 그때 태어나 모진 고생을 할 건 뭡니까.
금요일에 별 셋짜리 나오면 다부장님이 호호호 웃으시는군요! ㅋㅋㅋㅋ 참고하겠습니다!

다락방 2021-09-03 08:59   좋아요 2 | URL
앗. 저 방금 모스크바의 신사 폴스타프 님 리뷰 보고 왔어요. 이 이름이 그 이름인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아니, 그런 이름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계세요?????

그나저나 모스크바의 신사 별 다섯 리뷰여서 너무 씐나요! 저도 그 책 재미있게 읽고 팔지 않고 갖고 있는 책이거든요. 그 리뷰 읽고나서 궁금한건데, 그런데 우아한 연인에는 별 셋 주셨네요? ㅋㅋ 저는 우아한 연인 먼저 읽었었고 그거 너무 좋아서 모스크바의 신사 나오자마자 읽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우아한 연인 읽고 <월든> 읽었다가 월든 너무 재미없어서 깜짝 놀랐어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03 09:20   좋아요 3 | URL
우와.... 진심으로, 진심으로 다락방님이 <우아한 연인> 먼저 읽고 그게 재미나서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셨을 거다, 라고 생각했답니다.
저는 거꾸로 읽었는데요, 기대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우아한 연인>을 읽으니 이게 영 아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우아한 독후감이 별 셋 주고도 이달의 서재로 뽑혔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건, <월든>이 느므느므 재미없다는 겁니다. 재미로 읽는 책은 아니지만 (번역 때문이지는 모르겠고요)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아이고....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9-03 09:23   좋아요 2 | URL
월든 저도 재미 없었어요.. 심지어 헨리 소로 성격 꽤 나빠 보임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9-03 09:24   좋아요 3 | URL
저도 월든 읽고 소로 싫었습니다 ㅋㅋㅋㅋㅋ 뭐야 이사람 으으 했어요 ㅋㅋㅋㅌㅌ

독서괭 2021-09-03 11:38   좋아요 1 | URL
<모스크바의 신사> 엄마가 읽고 재밌다고 저 갖다 주셨는데..아직 고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ㅜㅜ

Falstaff 2021-09-03 12:22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모스크바의 신사>는 오늘 시작하세요. 하여튼 금요일이나 연휴 전에 시작하시는 게 좋습니다. 한 번 열었다 하면 도무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평일 시작하시면 직장에서 하염없이 졸 수도 있습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1-09-03 13:31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그렇다면 <우아한 연인> 먼저 읽어주시면 안돼욤? 🙄

Falstaff 2021-09-03 13: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9-03 13:40   좋아요 1 | URL
헛.. 폴님, 그정도로 재밌나요? 다락방님, <우아한 연인>은 사야하잖아요. 이미 오늘 또 추가주문하는 바람에 이번달 주문 끝났어요. <독서공감>이 곧 올거란 말이죠 ㅎㅎㅎ

Falstaff 2021-09-03 14:13   좋아요 1 | URL
괭님, 모스크바 신사 재미있어 하는 건 남녀노소가 없다니까요!

잠자냥 2021-09-03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도 이거 첫 단편만 읽고 일단 내려놨는데! 여름이 다 갔어요!!! 그럼 내년 여름에? ㅎㅎㅎ

Falstaff 2021-09-03 09:24   좋아요 3 | URL
앗! 내년 여름은 이 책 때문에 션~하게 보내겠네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1-09-03 11: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으아 첫줄의 작가 풀네임 너무 어려워서 입속으로 굴려봤어요 ㅋㅋㅋ 절대 못 외울 것 같아요 ㅋㅋ 위키의 평에 대한 폴님의 시비걸기 넘 재밌습니다. 그리고 이 책 리뷰로 얻은 결론은 <티끌 같은 나>를 읽어야겠군.. 이네요!>ㅁ<

Falstaff 2021-09-03 12: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러샤 이름이 좀 그런데, 나중엔 익숙해집니다.
옙. 이 책은 지금 품절이기도 하고 그러니 <티끌....>부터 ㅎㅎㅎ

그레이스 2021-09-03 1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카레바에게서 아주 조금 라면수프가 빠진 맛을 알기 위해서는 토카레바 먼저 읽어야겠네요^^
신사배리린든읽고 있는데 폴스타프님 리뷰 보고 ...암튼 재미있네요. ㅎㅎ

Falstaff 2021-09-03 12:27   좋아요 3 | URL
와우 신사배리린든 읽으셔요? 아참, 그거 제가 별 닷 개 준 소설 아닙니까. <허영의 시장>은 별로더니 베리 린든 보니까 진짜 디킨스 라이벌이더라니까요! 판매지수가 오르지 않아 나중에 백자평 하나 더 썼다는 거 아닙니까. ㅎㅎ

토카레바하고 페트루셉스카야, 아무나 먼저 읽으시면 되는데, 하여튼 전 토카레바가 조금 더 좋았습니다. ㅎㅎㅎ

새파랑 2021-09-03 12: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간의 밤을 먼저 읽어봐야 겠네요~!! 저도 <티끌 같은 나> 좋았었는데 약간 스프가 빠지더라도 좋겠죠? 😅 여름이 가서 아쉽네요 ㅜㅜ

Falstaff 2021-09-03 12:56   좋아요 3 | URL
글쎄 아무나 먼저 읽어도 된다니까요. ㅋㅋㅋㅋㅋ
전 여름 가니까 살 접히는 곳에 땀 안 차서 좋은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