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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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의 초사이언, 사이오 님이 2017년 9월부터 2021년 3월까지 무려 3년 반 동안 사진과 더불어 책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시는 바람에, 명색이 서재 친구라면 이건 읽으라, 좀 읽어보라는 압력 같아서 선택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구입할 때 보관함에서 곧바로 장바구니로 옮기는 바람에 땡투를 못 했다는 점. 자리를 빌려 미안한 마음을 표시해본다.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끈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 그런데 어째 손이 가지 않아 차일피일 일독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하긴 내가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책 표지가 좀 선정적이라 그랬나? 그랬을 수도 있다. 더구나 이 책 뒤표지에 큰 글씨로 무엇이라 쓰여 있는가 하면,

 

  “빛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정교한 은 세공품
  심장을 건드리는 것 같은 쓸쓸한 포르노그래피“

 

  물론 카피야 어차피 독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목적으로 쓰는 거지만 나처럼 진중한 독자는 슬립 차림의 예쁜 아가씨 표지와 포르노그래피임을 강조한 카피로 인하여 오히려 읽어볼 생각을 못 낼 수도 있음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왕 포르노그래피임을 강조하려면, 그거 있잖은가, 내용도 카피에 좀 걸맞았으면 오죽 좋겠는가. 이게 포르노그래피면 세상에나, 미셸 우엘벡, 필립 로스, 우리나라의 김혜나, 장정일은 빨간책 대마왕이겠네. 그러니 그걸 기대했다면 애초에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
  곧바로 읽은 감상을 이야기해보자.
  설터. 처음부터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의 문장이 그렇다. 여간해 감상이 섞이지 않은 건조한 문체. 9월, 휴가가 끝나 귀경 행렬로 붐비는 파리의 기차역이다.

 

  “9월. 빛이 넘치는 이런 나날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8월 내내 텅텅 비다시피 했던 이 도시가 이제 다시 움직인다. 새로 채워지고 있다. 식당은 모두 다시 문을 열고 상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전원에서, 바다에서 차들로 빽빽했던 도로여행에서 돌아온다. 기차역이 몹시 붐빈다.”

 

  간결한 문장들. 이제 다시 움직이고 있고 사람들은 돌아오지만 문장은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듯 딱, 자리 잡힌 채 고정되어 있는 느낌. 이제 어느 누가 있어 여기에 훅, 바람을 한 번 불거나, 긴 둘째손가락을 한 번 딱 마주치기만 하면 갑자기 생명이 불어넣어져 활기를 띌 거 같은 풍경에서, 화자 ‘나’는 오히려 하행열차에 오른다.
  1967년에 미국 작가가 쓴 소설. 그럼에도 무대가 프랑스여서 그런지 묘사는 다분히 프랑스 적 에스프리의 향취가 배어 있다. 파리를 떠난 열차는 세송 역, 몽트로 역, 상스 역, 생쥘리앙뮈소 역을 거쳐 환승역인 라로슈에서 잠깐 쉬고 ‘나’의 목적지인 인구 만 오천 명의 작은 마을 오툉 역에 멈춰 ‘나’는 내린다. ‘나’의 목적지는 구시가지 로마 성곽 바로 위에 자리한 위틀랜드 하우스. 대문의 철제 장식에 VAINCRE OU MOURIR, 승리하라, 아니면 죽으라, 1950년에 한반도로 전투 병력을 파병하며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가 자기 병사들에게 한 말이 적혀있다. 크리스티나와 빌리 위틀랜드 부부가 미국인인 ‘나’의 프랑스 체류에 얼마든지 이용하라고 빌려준 집이다.
  이 집에 근사한 구형 자동차 들라주 52년형 컨버터블을 타고 도착한 미국인 청년 필립 딘.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한다. 삶에 반항하느라 예일대를 중퇴해버린 천재.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어 대학에 입학을 해보니 가르치는 것이 너무 쉬운 것들만 있어서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 유람을 왔단다. 아버지는 저명한 연극비평가로 미국 내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명문가 출신 남자. ‘나’는 10월의 어느 날 필립과 오툉 시내의 한 카페 포이에 들러 식사를 했고, 거기서 프랑스 주둔군으로 와 있는 흑인 미국 육군 병사를 애인으로 둔 주말 아르바이트 종업원 안마리 코스탈라가 눈에 들어오는데, 필립 역시 이 터틀넥 스웨터에 검은 스커트, 가죽벨트를 한 안마리를 보더니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 여자는 여러 주 동안 저에 대한 꿈을 꾸었을 겁니다.”
  안마리 코스탈라.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10월 8일 생. 지금은 방년 18세. 서른 두 살의 필립 딘과 안마리는 곧장 연인관계로 접어들어 빌린 들라주 52년식 컨버터블을 타고 프랑스 전역을 누비며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나’가 아무리 보아도 필립은 처음부터 안마리를 자신의 아내감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 반면, 안마리는 당연히 둘이 결혼해 딸 아들 낳고 평범한 가정의 주부가 되리라 믿는다.
  이들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곳이 리볼리 가의 호텔. 저녁을 먹고 고전적이고 널찍한 방에 들어 함께 샤워하고,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 한 번 하고는 잠에 떨어진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더. 음. 나는 이렇게 아침의 섹스를 시작하는 건 처음 읽어봤다.
  “흐릿한 잿빛, 아주 이른 시각이다. 그녀의 입 냄새가 고약하다.”

 

  이렇게 해서 연애 소설이 통상 그렇듯이 둘의 사랑이 끝날 때까지를 그렸다. 초두에 얘기했듯 있어서 보거나 들은 대로 기록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조한 문체로 적어놓은 작품을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래 분량에 비해 시간 소모가 많았고 간혹 지겹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 읽는 작가는 한 번에 두 권 이상을 구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쇼핑의 간격이 길어서 그랬는지 설터의 작품은 어쩌다 보니 두 권을 샀고, 지금은 소설집 《어젯밤》을 읽고 있다.
  <스포츠와 여가> 읽기를 마치면서 이젠 설터는 끝, 이라 단정해 별 기대 없이 소설집을 펼쳤다가, 아 이런, 그렇다. 만일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가 역자의 문체로 쓴 것이 아니라면, 설터의 문체는 장편보다 단편에 훨씬 어울리는 건 아닐까. 난 여기서 “단편에 훨씬 어울린다.”라고 쓰고 싶다. 그러나 주장을 할 수준이 아니라서 이렇게 얘기하고 마는데, 이제 겨우 단편 두 개를 읽었을 뿐이지만, <스포츠와 여가>도 이렇듯 몇 개로 잘라서 나누어 썼더라면 독자가 읽기도 훨씬 편하고,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진 단편‘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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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22 09: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포츠와 여가>는 전 별로였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설터는 단편이 좋은 작가 같아요. 그래서 <어젯밤>이 훨씬 좋았고요(단편 모음집에서도 <아메리칸 급행열차>보다는 <어젯밤>이 낫습니다.). 장편 중엔 <가벼운 나날>이 가장 낫더라고요. 물론 저는 번역된 장편 중 <사냥꾼들>은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비교한 것입니다만. ㅎㅎ

Falstaff 2021-07-22 09:39   좋아요 3 | URL
내일 <어젯밤> 독후감 올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설터는 제 목록에 없을 거 같습니다. 장편을 쓸 때도 단편을 여러 편 겹쳐 쓰는 식으로 부분을 잘라 썼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더군요. 하여튼 아쉬운... ㅎㅎ

잠자냥 2021-07-22 09:48   좋아요 3 | URL
연속해서 먹으면(?) 안 되는 작가가 있는데, 설터도 그 부류 중 하나 같아요. 연속해서 읽으면 넘나 질린다능; ㅋㅋㅋㅋ

아, 그리고 설터 문장 요즘 같은 날씨에 읽기 힘들지 않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2 10:27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요즘 같은 날씨에 <수영장 도서관> 읽는 것보다는 훨씬 덜 쫄려요! ㅋㅋㅋㅋㅋㅋㅋ
<수영장 도서관>은 독후감 쓰기도,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2 12:48   좋아요 5 | URL
아, 써주세요 <수영장 도서관>! ㅋㅋㅋ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습니다요!

저, 얼마나 야한지 궁금하다고 쿨캣 님인가 쟝쟝 님이 그러셔셔 차마 타이핑 치긴 뭐하고 사진 찍은 게 있거든요? 근데 그거 페이퍼로 올리려다가.... 에휴 관뒀습니다(제 서재 알라딘에서 블라인드 처리할까 봐?ㅋㅋㅋㅋ). 19금이 아니라 29금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2 13:10   좋아요 1 | URL
저도 게이 러브씬은 차마 인용하지 못하겠고요, 대신 경험담 하나 올렸답니다. ㅋㅋ

공쟝쟝 2021-07-22 22:02   좋아요 2 | URL
(수영장도서관을 두리번 거리며 담는다 ㅋㅋㅋ)

잠자냥 2021-07-22 22:08   좋아요 2 | URL
쟝쟝!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야 아니야 기대하는 그런 거 아니야~~~~

공쟝쟝 2021-07-22 22:17   좋아요 1 | URL
왜욧! 전 엄연히 29살 넘었다구욧!!!!

Falstaff 2021-07-23 08:50   좋아요 1 | URL
장쟝님, 당연 29 이상이시겠지만, 여자 남자 베드씬하고 느낌이 아직은 다릅니다. 이것도 차별이냐, 하시면 할 말 없는데요, ^^;;; 아직 좀 낯설어서 그렇다고 이해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ㅋㅋㅋ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셔야 할밖에요.
맨 그런 거만 나오는 건 아니고요, 두 장면 정도만 으 이건 아직은 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고요, 나머지는 참 억세게 장황합니다. 여름에 고문당하기 아주 적당한 책입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09:37   좋아요 1 | URL
네,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뭔가 그 에로틱한 거 기대하시면 안됩니다;; 쟝쟝님...에로틱하 거 찾으시면 다른 거 읽으세요. ㅋㅋㅋㅋ

아니, 근데 폴스타프 님! 두 장면 정도만 그랬어요? 전 세 장면인데.... ㅋㅋㅋㅋ

독서괭 2021-07-22 10: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엇 저 어제 아이책 중고로 주문하면서 같이 담을 책 찾다가 이책 주문했는데요 ㅋㅋ 저도 syo님 덕에 이 표지가 굉장히 익숙합니다ㅋ

Falstaff 2021-07-22 10:39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사신 건 꼭 읽어야 합니닷! 그리고 별 세 개를 줘서 그렇지 읽을 만하긴 합니다. ^^;;;

다락방 2021-07-23 07: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사이오 님은 ㅋㅋㅋ 제가 모르는 알라디너라고 생각했지 뭐예요? 쇼님도 셜터 좋아하는데 초사이어인이 또 있구먼.. 했는데 이 분이 그 분이군요? 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2 22:10   좋아요 3 | URL
우리가 아는 사이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8:51   좋아요 0 | URL
syo 님은 자기 이니셜이 여러가지로 불리는 걸, 지금 은근히 즐기고 있답니다. ㅋㅋ

잠자냥 2021-07-23 09:37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런 걸 다 아는 사이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7-2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 님 왜 수영장 도서관 리뷰 안 올리셨어요.... 흑 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7-23 09: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그건 다음 주 금욜에 올라옵니다.
몇년 전에 이 루틴 한 번 깼다가, 저역자한테 을매나 귀싸대기를 얻어 터졌는지, 하이고, 그 담부터 재수없어서 애초에 정한 스케쥴을 무조건 따르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