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평점 :
그레이엄 그린이 쓴 책이라면 내용과 관계없이 일단 주목을 끈다. 더구나 이 책은 먼저 읽은 독자들의 호응이 잇달아 저절로 큰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그래 <브라이턴 록>이 내가 읽은 최고의 그린이었던 <권력과 영광>을 어쩌면 능가할지도 모른다, 라는 이스트를 살포하게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권력과 영광>도 오래 전에 읽어 스토리마저 가물가물한 터라 정확한 비교라고 하기 어렵지만 하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대가 컸던 만큼 지금의 실망 역시 설악산 울산바위 만하다.
작품은 전형적인 탐정소설이다. 그러나 책을 소개하는 모든 사이트에서, 탐정소설의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악의 본성을 탐구했다거나, 가톨릭 교리와 신앙에 대한 물음을 담아낸 종교문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애초에 종교적 소양이 없는 나는, 주인공인줄 알았던 찰스 “헤일은 브라이턴에 온 지 세 시간도 안 되어서 그들이 자기를 죽일 생각이란 것을 알았다.”라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종교는 개뿔, 작정하고 범죄, 스릴러 소설로 읽기로 작정을 해버렸다.
이 헤일이라는 작자는, 1부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길모퉁이의 신문판매원에서 시작해 판매부수 1만 부의 조그만 지방 신문사에서 주급 30실링을 받는 기자를 했다가, 셰필드에서 5년을 보낸 후 급여가 좋은 메신저 신문사에 입사해 오늘에 이른 사람이다. 메신저 사는 ‘콜리 키버’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1면에 키버의 사진을 실은 후, 키버가 어느 고장에 나타날 것임을 알려준다. 콜리 키버는 진짜로 해당 지역을 돌아다니며 메신저 사의 카드를 숨겨두는데, 카드를 찾은 사람에게 신문사는 10실링을 지불하는 일종의 보물찾기 게임과 유사하다. 근데 손에 메신저 신문을 한 부 들고 키버에게 “당신은 콜리 키버 씨입니다. 나는 일간 메신저 상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하면 매우 큰 상금을 받을 수도 있는 영업전략. 사건이 벌어질 당시의 콜리 키버로 분장하고 다니는 인물이 바로 찰스 헤일이고, 그가 카드를 뿌려야 하는 곳이 브라이턴, 요즘 교통수단으로 런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영국 굴지의 해안 휴양도시다.
그런데 분량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1부가 끝나기도 전에 글쎄 이 찰스 헤일 씨가 살해당하고 만다. 엉뚱하게 사인은 심장 질환에 의한 자연사. 나중에 밝혀지는 진실은 붉은 색과 하얀 색이 마치 이발소 표시, 꽈배기처럼 돌돌 말린 ‘브라이턴 록’이란 이름의 막대사탕을 억지로 목에 쑤셔 넣어 질식사 시키려 하다가 기가 막힌 피해자의 심장이 먼저 오작동을 일으켜 사망에 이른 살인사건이다. 일과 중 빈 시간에 술집에서 헤일 씨를 ‘프레드’라고 호칭하는 한 열일곱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소년이 등장해 아는 척을 하기에 카드와 신문을 주고 10실링이 아니라 10기니를 받을 수 있는 행운을 제의했지만 소년은 이를 거절한 후 빈 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트리고 술집에서 나가는 순간 ‘그들이’ 자기를 죽일 생각이란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건 행위가 아니라 ‘17세 소년’이었다. 물론 책을 읽을 당시엔 10대 나이라는 장벽에 가려 그냥 ‘행인 1’ 정도의 등장인물인 줄 알았다.
조금 후 거리를 지날 때 행상이 여러 물건을 사라고 하는 좌판 안에 면도날이 들어 있는 것을 본 헤일 씨는, 얇은 상처와 예리한 고통을 떠올리고, ‘카이트’가 죽은 것이 그런 식이었다는데, 이것 역시 간략하게 딱 한 줄로 처리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처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등장한 일이니 독자 입장에선 일단 기억을 해두는 수밖에 없다.
이어 등장하는 ‘릴리’라 불리는 여자. 나중에 거리에서 헤일을 다시 만나 진짜 이름이 아이다 아널드라고 알려준다. 아이다는 헤일 씨와 택시를 타고 펠리스 잔교 쪽으로 달리면서 뒷자리에 앉아 초면에 진한 키스를 열심히 나눈다. 헤일은 눈치도 채지 못했지만, 택시를 뒤따르는 25년형 모리스 자동차를 헤일이 눈여겨보고 있는 걸, 아이다는 그 와중에도 알고 있었다. 아이다 아널드가 이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며 맡은 배역이 아마추어 탐정인 것은 헤일 씨가 영원히 알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할 운명이긴 하지만. 잔교 입구 보도에 내린 커플. 진하게 키스를 하는 바람에 엉망이 된 얼굴을 고치러 유료화장실에 들른 아이다가 6분을 쓰고 화장실에서 나와 헤일 씨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시간이 13:30. 아이다는 헤일의 메모 한 장을 얻는다. 브라이턴 4시 경주, 블랙보이. 유명한 브라이턴 경마에 블랙보이한테 걸라는 뜻이다. 아이다는 정말로 경주에 블랙보이에 많은 돈을 걸어 열 배의 배당을 받는데, 이건 아이다에게 아무 소득도 없이 많은 돈을 펑펑 써가며 헤일 씨 사망 사건에 집요하게 매달리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조연 로즈. 헤일 씨의 직업은 카드를 숨기는 일이다. 살인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17세 소년 핑키는 거구의 스파이서에게 헤일 씨의 행적을 위장하기 위해 대신 카드를 숨기게 하는데, 로즈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스노 식당의 로즈 담당 테이블보 아래에도 한 장을 둔다. 이게 결정적 실패. 로즈는 그날이 취직 첫날이었고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은 16세 아가씨라 정확하게 스파이서의 얼굴과 체구와 목소리를 기억한다. 냉혹한 소년 핑키는 살인사건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 얼굴을 들켜버린 스파이서를 2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은 실족사로 위장하고, 로즈마저 죽이면 하필 핑키 근처에서만 살인사건이 나는 모양새라 최악의 경우에 로즈가 법정에서 진술하지 못하게(우리나라 형사소송법 148조에도 있다. 정경심의 사모펀드 및 자녀 입시비리 등의 재판 참조) 무리수를 둬가며 결혼해버린다.
문제는 17세 소년 핑키. 면도날로 겁만 주려고 했다가 그만 목에 깊은 상처를 입어 죽은 카이트의 수하에서 일하다가, 이제 작은 조직의 보스에 앉은 독종. 카이트와 함께 브라이턴 지역의 두 명의 맹주 가운데 한 명인 콜레오니와는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범죄 방면의 지적 능력밖에 보유하지 못해 조직은 점점 거덜이 나고, 자신의 수하도 직접 죽이거나 내쫓거나 해가며 스스로 폭망의 길을 걷는 애송이. 이 아이는 당연히 불행한 유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토요일 밤마다 아이가 보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모가 해치웠던 번식을 위한 행위예술이 가장 깊숙한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 가톨릭교도다운 선과 악의 갈등도 조금 보여주는데 이것을 가지고 선악의 본성을 탐구한다고 하면 조금 오버같다.
하여튼 아이다 아널드, 릴리는 단 한 번, 그것도 짧은 시간만 로즈와의 만남을 통해 헤일 씨 아닌 인물이 카드를 스노 식당에 두고 간 것만을 두고 그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한다. 여기에 경마를 통해 벌어들인 거액으로 지역의 거물 콜레오니 씨가 묵는 호텔의 더블 방에 묵으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내가 이 책을 의미 있게 읽은 독자들과 다를 수 있는 의견은, <브라이턴 록>이 사건 해결의 과정을 그린 탐정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 작가의 시선은 아마추어 탐정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분량을 악당 핑키의 행위와 사고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보스를 잃은 복수로 찰스 헤일을 죽이고, 이 범죄의 은닉을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죽이고, 애정 없이 무리한 결혼을 하지만 부모의 행위로 각인된 섹스에 관한 거부감 등등, 이 작품은 범죄소설의 외연을 한 심리소설에 가깝지 않은가 싶었다는 점. 간혹 이해하지 못할 행동과 어리석은 장면 등은 악당 핑키의 어린 나이로 퉁 칠 수 있을 것이라고 꼼수를 부리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마저 들었다.
핑키의 심리적 갈등으로 인해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라고 하는 악의 본성을 찾는 일이라 하지 않았을까.(하필이면 악의 본성을 찾는 진짜 작품 <나는 고백한다>를 올 초에 읽어버렸다.) 이 작품에서도 악의 본성을 찾았을까? 아니, 아니. 난 이 작품은 애초에 영화로 만들기 위해 1930년대 수준의 독자로부터 재미를 끌어낼 수 있는 온갖 장면을 배열한 대중소설로 봤다. 아마추어 탐정 아이다 아널드가 사건을 분석하는 과정이 너무 축소되는 바람에 추리소설이라도 그리 잘 쓴 추리소설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