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문학동네 시인선 136
조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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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의 시집. 더 이상은 없다. 완벽한 골 뽀개기. 해석 불가능한 기호 덩어리의 집합. 죽음과 고통의 실존성을 통해 도달한 언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애초 독해할 수 없는 비문과 가져다 붙인 단어들의 만찬 또는 난장판. 혹시 이것이 괜찮은 시인의 뛰어난 시를 괜히 기평(譏評: 헐뜯어 평함)한다고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이런 시의 부분을 읽어보시라. 시의 제목은 <나 역시 아르카디아에서 쓸모없음을 줍다>. 모두 네 연으로 되어 있으니, 다 소개하는 건 지면이 아까워 셋째 연만 올린다.

 

  개 껍데기 양탄자를 타고 수양아버지여 살붙이 나팔을 불어다오
  음악은 그 자체가 완결된 즐거움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그 음악은 기다릴 수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낭송자의 견해였다. 초상학적으로 그들은 다정한 깃털이었다. 그러한 음악은 떠오름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지만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느린 것은 깊은 물을 잊게 하는 물이었고 빠른 것은 특별히 무기로 간주되어온 남성의 은유 상태로 남은 대천사를 거세하는 개숫물이었다. 그러나 허약한 종(種)을 장신구 삼는 기평(譏評)이 또한 무슨 결박일 수 있으랴? 객인의 미각이 주인이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든 것과 같은 그러한 완결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운율의 빛을 가진 광물이 발아래 파묻혀 있어 우리를 춤추게 하여도 그것이 시의 배신이 아니라면 이 몸짓이 신의 엔진에 부어진 연료로 타오르는 편재론(遍在論) 모두의 음욕(淫慾)과 또한 무엇이 다르랴? 개 껍데기 양탄자를 타고 수양아버지여, 살붙이 나팔을 불어다오.  (제 3연)

 

  자, 긴말 필요 없고, 위의 인용이 어떤 뜻인지 아시는 분, 죄송스럽지만 거수해보시겠습니까?
  문학평론가 김정현은 이이의 시 작업을 “언어를 통해 악의 성스러움에 도달하려 했던 자의 슬픔과 고통이 짙게 스며있는 말, 무가치한 언어들의 허무함 속을 깊숙이 헤매인 자에게만 유일하게 허락될 수 있는 그 말.”이라고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게 설명했다.
  이쯤에서 한 번 웃자. 기호학적으로 “ㅋㅋㅋ”라고 하고 싶으나 엄숙한 “악의 성스러움”을 다룬 시인에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키키키, 하고 웃는다. 근데 김정현은 명색이 평론가인데 “깊숙이 헤매인 자”는 뭐람. “헤매이다”는 국어 3등급 이하 학생들이나 쓰는 말 아닌가? 하여간 지금은 평론 이야기하는 거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고, 이게 어떻게 악의 성스러움에 도달하려 한 시인에게만 유일하게 허락된 문법이냐는 말이지.
  내가 이이한테 돈 꿔주고 못 받은 것도 없어서 괜히 기평할 이유도 하나 없고, 나도 인간인데 가능하면 좋은 게 좋다고, 역시 괜찮은 시인이야 어쩌고저쩌고, 해두는 것이 신상에 이로운 건 아는데, 그러면 독후감이 아니니까 콱, 내놓고 얘기하면, 시인 조연호의 문장은 위악과 의도적인 비문非文으로 독자에게 혼돈의 골짜기 길을 인도하고 있다.
  그동안 생고생을 해가며 터득한, 이런 시 읽는 법을 소개하면, 여태까지 암호해독기를 돌려가며 파편과 미로를 헤맨 결과, 시를 읽기만 하면 된다는 거.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굳이 시를 이해하거나 시에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거창한 내용을 밝히려 생각하지 말고 그저 줄줄이 읽어나가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별점 네 개, 다섯 개를 줄 날이 혹시 올지도 모르겠다는 심정. 좀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저 위에 인용한 “개 껍데기 양탄자” 운운도, 개 껍데기가 뭘까, 내가 안 먹어서 모르지만 개는 껍데기가 맛있다고 하는데 그걸 얘기하는 걸까, 이런 거 궁금해 하지 말고, 문장이 주어 술어 목적어가 있을 곳에 제대로 붙어 있는지 따위도 묻지 말고, 그냥 초등 3학년짜리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읽는 셈치고 그냥 소리 내 읽되, 읽으면서 아니면 말고 만일 리듬이 생길 거 같으면 바로 리듬에 집중해서, 여전히 내용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흥얼거리라는 말씀.
  그러면 시가 아무리 위악과 의도적 비문으로 메워져 있어도, 어디 가서, 혹시 조연호 시집 유고 읽어보셨어요? 햐, 그거 죽여줘요, 죽여줘. 할 수도 있……겠니? 정말?

 

  아, 몰라, 몰라. 이제 나의 고난의 행군은 세 권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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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28 11: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아스트랄 시에는 비평가도 아스트랄해지는가 봅니다.
아이고, 아직도 세 권이나 남았다니, 건투를 빕니다!

Falstaff 2021-06-28 11:24   좋아요 6 | URL
그나마 다행인 건 세 권 가운데 두 개는 창비라는 거예요. 흑흑.....
진짜 개껍데기 같은 독서생활입니다.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6-28 12:4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요즘 어려운 시 읽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덕분에 저는 패스합니다^^

Falstaff 2021-06-28 12:17   좋아요 5 | URL
정말, 요즘엔 시집 읽을 차례가 오면 아이고, 이번엔 얼마나 똥을 쌀꼬... 걱정이 앞선답니다. 흑흑흑.... 아픔을 같이 해주셔고 고맙습니다.

초란공 2021-06-28 12: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군시절 6월 25일만 되면 항상 ‘기념으로‘ 행군하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 25일도 지났는데 계속 행군하시네요~ ^^; 그래도 계속 읽으신다니 화이팅입니다~!

Falstaff 2021-06-28 12:19   좋아요 5 | URL
에휴, 전 그노무 군대도 세 발 이상 차 타고 다니는 험한 델 나와서, 고난의 ‘행군‘이 유별나게 더 힘든 거 같습니다.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흑흑....

coolcat329 2021-06-28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모르는 단어 다 찾아봐도 참 어렵습니다. 개숫물이 남성의 은유상태로 남은 대천사를 거세! ㅋㅋ 개숫물이 거세? 어렵습니다.

근데 개 껍데기 안 드셔보셨다니 조금 의외입니다. 술을 좋아하시면 거의 99프로 던데요.

Falstaff 2021-06-28 20:56   좋아요 2 | URL
무슨 얘기를 써 놓았는지...는 일단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최신형 암호 해독기를 먼저 사야 하는데, 이게 보통 비싸야지요. 에효.... ㅠㅠ

coolcat329 2021-06-28 18: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데 다음 시가 기대가 되는건 폴스타프님의 글이 재밌다는 거겠죠? ㅋㅋㅋ

Falstaff 2021-06-28 20: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고맙습니다.
제가 쿨켓님 때문에 계속 되도 않는 독후감 올린다니까요. ㅋㅋㅋㅋㅋ

경춘선폐선부지 2022-12-27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적으로 공감하는 의견입니다 ㅋㅋㅋ 그래서 전 차라리 첫시집인 죽음에 이르는 계절이 제일 좋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