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내민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293
이기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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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시인인 줄 알았다. 표지 그림, 홍익대 미술대학을 다닌 시인이자 《초식》을 쓴 소설가, 화가에다가 음반 취입한 가수이기도 한 이제하의 캐리커처. 시집을 읽기 바로 전에 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를 읽어서 그랬는지, 인물의 목을 가르는 수직선과 목 아랫부분의 자그마한 타원. 그걸 울대뼈로 봤다. 그리고 이름이 이기성. 남잔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1966년생. 정여사의 새까만 과 후배. 흠. 관심이 갔다. 그리하여 첫 번째 시를 읽어본다.

 


  열정

 

 

  닳아빠진 구두 밑바닥에 쩔꺽쩔꺽 들러붙는 생이 식당 앞까지 쫓아온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던져도 킁킁대며 질기게 따라와 누런 혓바닥으로 딱딱한 내 발꿈치를 핥는다. 나, 누추한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적 없고 축축한 불륜의 문장 한 줄 엿본 적 없어도 텅 빈 구내식당 비릿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릇 밥에 코를 박고 조금씩 파먹을 때 문득, 억울하다. 움푹한 그릇에 목묵히 쌓인 어둠 목 언저리 검은 주름으로 깊게 패이고. 유원지에 벗어둔 신발 두 손에 쥐고 하루는 눈 퉁퉁 붓게 울고 하루는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 해는 지고 생은 거듭 누추해지고 혈세血稅의 계절은 닥쳐온다. 끈끈한 식탁에 엎드린 등 뒤에서 검푸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컹컹 짖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  (전문)

 

 

  시집은 2004년에 출간됐다. 이때 시인의 나이가 서른아홉. 시인은 누추한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적 없고 시류에 영합한 문장 하나 만들어본 적 없어도 비린내 나는 구내식당에서야 간신히 밥을 먹는 것이 좀 억울했을 수도 있겠다.
  근데, 아무리 억울하고, 심지어 굶어 죽는 것까지 생각해야 할 지경에 왔어도 그렇지, 이기성의 시들은, 적어도 내가 읽기에 과하게 혹독하다. ‘이기성’을 네이버 검색해 보면, 대표작으로 <수手>라는 시가 뜨고, 이 시집에 그게 실려 있다. 중·고등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지 않은지 하도 오래라, 이 제목 <手>의 뜻이 ‘손hand’임을 알려드리는 것이 과한 친절은 아닐 듯.

 


  지하철 안에서 졸다 눈뜨면 불쑥, 어떤 손이 다가온다. 무거운 고개를 처박고 침 흘리며 졸고 있던 나를 뚫어지게 보며 움푹한 손 내밀고 있는 노파. 창 밖에는 가물가물 빈 등(燈)이 흐르고 헛되이 씹고 또 씹던 질긴 시간을 열차가 거슬러 갈 때, 내가 마신 수천 드럼의 물과 불, 수만 톤의 공기와 밥알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혓바닥으로 무수히 핥아댄 더러운 손. 환멸의 등은 꽃처럼 발등에 떨어지고 움켜쥔 손바닥에서 타오르던 길은 뜨거운 머리카락처럼 헤쳐진다. 살얼음 낀 공중변소 깨진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목을 졸라보던 손, 이제 검은 넥타이는 풀어지고 딱딱한 벽돌처럼 혀는 굳어 있다.
  그러니 이 지리멸렬의 세계여, 내민 손을 거두어라. 찌그러진 심장을 움켜쥔 누추한 손을 이제 그만 접어라. 젖은 이마에 등을 켜고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갈 때 천장에 매달린 가죽 손잡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세계의 지루한 목구멍이 찬란하게 드러난다. 악착같이 손 내밀고 있는 노파의 구부러진 등 힘껏 떠밀고 나는 어둠으로 꽉찬 통로를 달려간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입에 물고 있던 무수한 칼 쨍강쨍강 뱉어내며.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 피륙의 시간을 찌익 가르며 열차는 광폭하게 달린다.  (전문)

 


  아침이건 저녁이건, 신도림이나 교대 트랜스퍼의 인파들, 내가 서울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 역시 이들 속에서 고단한 평생을 보내기 싫어서였다. 그래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단박에 그림이 그려졌다. 망가지는 것을 무릅쓰고 잠의 악마에 굴복해 험한 모습으로 졸고 있다가 누군가가 섬찟하게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끼는 순간.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어보니 한 노파가 내 눈을 뚫어져라 내려보며 텅 빈 손을 디밀고 있는 장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다음이다. 시인은 이때 자신이 마신 수 많은 물과 불, 공기와 밥알, 혓바닥으로 핥아댄 더러운 손을 연상하고 이어서 공중변소에서 목을 졸라보던 손으로 확장하더니 검은 넥타이와 벽돌처럼 굳은 혀, 즉 죽음의 이미지까지 상상할 수 있는 시적 표현으로 전개해나간다. 시인의 삶은 이렇다. 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과 사람살이가 어둠으로 꽉 찬 통로를 달려가는 인간, 눈과 귀를 틀어막고 칼춤을 추며, 시간을 찌익 가르면서 광폭하게 달리는 거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차라리 논문을 쓰지그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그건 아닐 듯. 시인은 도시인 또는 현대인의 삶 속에 담긴 비극이나 참담함을 표현하는 행위를 여러 방식으로 모색하다가 나름대로 적절한 형태를 찾았을 것이다. 지지한다. 그러나 이리 상세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는 참담의 광경을 과하게 노골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예컨대 다음 시를 보자.

 


  모란시장에서

 


  내가 만났던 몇 장의 검은 구름을 끌고 구불텅거리는 길 돌아온다. 찐득한 누린내 가득 고여 있는 골목, 가래침 뱉으며 시커먼 고무장화 신은 사내가 철창 앞에 서면, 화들짝 벌어지며 경련하는 눈, 눈동자들. 허연 이빨 드러내며 필사적으로 으르렁대던 것도 잠깐, 사내의 핏발 선 눈과 딱 마주치자 개들, 빈 밥그릇에 눈길 뚝 떨구며 문득 고요해지는 것이다. 마른 절벽처럼 갈라진 정작의 틈새 그들이 마지막 본 것은 비릿한 공포가 아니라고 말해준 건 노점판에 엎드린 늙은 구름. 광대뼈 불거진 그의 비틀린 입가엔 거품 말라붙고, 하긴 누린내 속 어슬렁거리던 개들이 다리 사이에서 벌겋게 부풀어오른 꽃을 피우기도 했으리라. 나도 덩달아 붉은꽃 피는 몇 개의 풍경 지나 빈 저녁 떠도는 누린내 속 돌아온다. 목덜미에 축 늘어진 지루한 시간들 여태 좁은 진창에 뒹굴고 있다.  (전문)

 


  성남 모란시장 개고기 시장 광경일 터. 얘기했다시피 문제는 너무 잘 보인다는 거. 거기다가 시인 특유의 상징과 은유와 우화를 가미해 실제보다 살짝 과장된 비극적으로, 잔혹하게 받아들인다는 거. 이때쯤 해서, 아, 이 시집을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그래도 박상률의 잔망스러운 시집 《국가 공인 미남》도 끝까지 읽은 사람이다. 중간에 집어 던지지 않고. 하여튼 박상률하고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래서 그이와 비교하는 것이 이기성에겐 미안한 일(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한데, 나는 다음 시를 읽고서는 도무지 나머지 시를 다 읽을 자신이 없어 조용히 책을 덮었다. 시적 평가가 어떠하든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소행성 에로스에 대하여

 


  너는 에로스에서 태어났다 아기야, 너는 물과 불과 네 어미의 빚이 낳은 자식. 반지하의 셋방에서 어미의 몸이 썩는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걸음마를 배운다. 더듬더듬 옹알이를 뱉으며 창 틈으로 들어온 햇빛을 따라 휘청휘청 걷는다. 나비처럼 한줌에 잡힐 듯한 햇빛 자꾸 달아나고 속주머니에 꽁꽁 숨겼던 네 어미의 빚이 썩는 냄새, 지울 수 없는 그 냄새가 너의 양수다, 그리운 탯줄이다, 아기야. 악취는 천천히 문틈으로 새어나가 이웃을 부르고 낯설고 무뚝뚝한 이웃들 도끼로 문 때려부술 때, 한줌 쇠냄새 나는 퍼런 공기 두 눈을 찌르고 두 살배기 아기는, 욕지기를 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얼굴 없는 어미의 빚 받으러 달려온 허공의 검은 별자리, 컴컴한 방에서 울퉁불퉁한 얼굴처럼 껴입고 늙어갈 때 아기야, 먼지뿐인 너의 별 에로스는 천공에서 너를 기다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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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18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인용된 시들이 다 공포물로 여겨져요ㅋㅋㅋㅋ 팔스타프님의 분석덕분에 시인이 너무 멀리 떠나보낸 균형감을 찾은것도 같구요. 이런 책 출판하셔도 좋을것 같은데요?😆👍

Falstaff 2021-05-18 09:36   좋아요 1 | URL
오, 이 시집은 진짜 호러물 비슷해요. 으스스... ㅋㅋㅋ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신 거 같아서 고맙습니다. ^^

coolcat329 2021-05-18 0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모란시장하면 저 개시장에서 받은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ㅠ 저 시에서 말하는 그 누린내...아직도 그 광경과 냄새가 기억납니다 ㅠ

소행성 에로스는 머리 속에 그려지는 상황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슬프네요.

Falstaff 2021-05-18 10:02   좋아요 2 | URL
전 모란시장 말만 들었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시 읽으면서 분위기 좀 잡았습니다.
근데 넓게 보시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요 뭐. 것으로야 말끔한 거 같아도 말입죠.

전 이런 시도 소설도, 좋은지 안 좋은지는 다음으로 하고, 도무지 읽고 싶지 않답니다. ㅜㅜ

stella.K 2021-05-18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 중에 정 여사라 하심은ᆢ?ㅋ

Falstaff 2021-05-18 10:03   좋아요 1 | URL
어느 분 우편에서 편히 쉬고 계십니다. ㅋㅋㅋㅋ

stella.K 2021-05-18 20:58   좋아요 1 | URL
헉, 그리 쓰시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나요? ㅋㅋ

Falstaff 2021-05-18 21: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아니시겠지요, 설마.
근데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 제가 몰라서 말입죠. ㅋㅋㅋㅋ

stella.K 2021-05-18 21:1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시는 것 같은데...
전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 falstaff님 가까이 옆에 계신 분이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봅니다. 그러게 저리 쓰시면 저 같이 호기심 많은
사람은 잠을 못 잡니다. 오늘 밤 잠 다 잔 것 같습니다. 어쩌나..ㅋㅋ

2021-05-18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8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1-05-18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히 읽을 수 없는 시들이네요.
광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Falstaff 2021-05-18 15:31   좋아요 2 | URL
옙. 절대 편하지 않습니다. 다 읽을 수가 없었습지요.
광기보다는 삶의 비극성을 제 수준의 독자가 감상하기엔 너무 처참하게 그려놓았다고 하고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1-05-18 15:33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스크롤하면서 잠깐 보기에도 그런 광경들이 보이는데 시집 전체를 다 읽고 나면 또한번 불면증에 시달릴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Falstaff 2021-05-18 16:09   좋아요 1 | URL
그럼 읽으시면 안 되지요. 불면증이라니..... 그게 을매나 고생스러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