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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품 살인사건 - 약이 독이 되는 위험한 화학의 역사
백승만 지음 / 해나무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미스터리를 오래 읽어온 독자라면 '독살'이라는 키워드가 익숙할 것이다. 애거사 크리스티부터 히가시노 게이고까지, 약병 하나면 트릭은 완성된다. 그런데 그 약병 안에 실제로 무엇이 들었고 인체에서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는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저자 백승만은 경상국립대 약대 학장이자 약화학자. 분자 단위에서 약을 설계해온 전문가가, 이번에는 그 분자가 인간을 죽이러 갔던 실제 사건들을 추적한다. 프로포폴·케타민·스코폴라민·비타민A·보톡스·엑스터시. 약국 진열대와 병원 처방전에 있던 이름들이 어떻게 부검대로 옮겨졌는지 약학자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범죄 실화·과학 교양서·미스터리 비평, 세 장르의 교집합에서만 가능한 글쓰기다.
마취유도제 프로포폴은 매년 전 세계 3천만에서 5천만 명의 환자에게 투여된다. 수술실 안에서는 환자의 의식을 가라앉히는 약이지만, 그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사람을 죽이는 물질이 된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이 그랬고, 한국 연예계를 주기적으로 흔든 사건들도 그랬다. 같은 분자가 정해진 용량을 벗어났을 뿐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갈린다. 한국이 프로포폴을 세계 최초로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지정한 것도, 그 뒤로 10년이 지나도록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타민A로 사망한 사례 또한 책의 시야가 어디까지 닿는지 보여준다. 1974년 영국의 건강식품 애호가 배질 브라운은 열흘간 매일 당근주스 4리터와 비타민A 700만 IU를 섭취하다 사망했다. 일일 권장량의 2000배가 넘는 양이다. 마취제부터 화학무기까지, 모든 분자는 농도와 조건과 의도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에서는 졸피뎀 처방전이 위조되어 거래되고 펜타닐이 청소년 사이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의료용 마약류 처방 건수는 매년 갱신되며, 의료 접근성이라는 자랑은 약물 오남용이라는 그늘과 한 몸으로 자란다. 백승만이 이 책을 펴낸 시점이 절묘하다. 프로포폴은 이미 익숙한 이름이고, 케타민은 우울증 치료제로 부활했으며, 합성 마약은 단속망보다 빠르게 회피한다. 외국 사례들이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의료인의 안일함, 자본의 탐욕, 법망의 허술함이 만나는 자리마다 사람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다. 약학과 화학과 법독성학의 언어를 갖춘 사람만이 그 자리를 미리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언어를 대중의 귀에 들리도록 옮긴 작업이 이 책의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