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의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이루는 근간이며 궁극적으로 구성원 전체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한국은 해방 이후 정의를 바로세우는데 사실상 실패했다. 일본의 압제가 친일행위를 하지 않기에는 너무나도 악독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적극적인 친일 부역자들 만큼은 제대로 털어내고 시작했어야했다. 내쳐질줄 았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공직을 유지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을까?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서 독립운동을 해봐야 소용 없다는 인식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가 나라가 위기에 섰을때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을까? 독립운동가들을 앞장서서 잡아들이고 고문하던 노덕술 같은 이를 해방 후에도 중용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점에서 반드시 비판받아야만 한다.

 

 현 여당 대표의 아버지는 전쟁 통에 폭격으로부터 문화재를 지키는 의미있는 행동을 했다지만, 일제시대엔 강압에 못이겼는지 대동아 전쟁에 비행기를 헌납하자는 광고를 남긴다. 친일 행위가 연좌제로 후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반대하지만, 적어도 조상의 부끄러움에 반성하는 태도는 보여주어야하는게 맞다. 하지만 여당의 당수는 자신의 아버지의 행적을 미화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세대에게 어떤 교훈를 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일제가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소위로 임관한다. 해방 후에는 좌파가 득세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남로당에 가입하였으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밝혀지고 그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의 삶에서 읽히는 것은 어떠한 신념이 아니라 적당한 시류에 올라타 출세하겠다는 기회주의적인 야심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아버지를 나라만을 생각하는 신념을 가진 지도자로만 묘사할 뿐, 자신의 아버지가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입장이라도 취할 수 있는 기회주의적 인물이었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처럼 보인다.

 

 5.16 쿠데타가 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사관생도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옹호하는 시위를 벌인 것은 육군 대위 전두환 이었다. 이 일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은 그는 후에 보안사령관에 이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말 그대로 줄을 잘 섰고 한국사회는 성공을 위해서는 연줄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일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라면 줄을 잘 서야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맞다.

 

통일을 준비하고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유신시절, 그 당시 사법부는 정권에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곤 했다. 최악의 사법살인이라고 회자되는 인혁당 사건은 혐의 없는 이들이 판결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사형을 집행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 이었다. 정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사법권이 독재정권을 수호하는데 사용된 것 이었다.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의식 있는 판사들이나 검찰들은 하나 둘씩 사임하게 된다. 정의를 지키려는 판검사들이 사라지자 판결은 더 권력자의 입맛에 맞추어졌고 그에 따라 권력은 공고해졌으며 거기서 나온 부당한 이득은 그들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독재정권은 시위를 탄압하기위해 끈임없이 공안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동백림 사건에 이어 마땅한 이름이 없었는지 모든 사건에 수풀림을 붙이기 시작했고, 그 후 부림, 학림과 같은 근거 없는 숲들이 조성된다. 이 시절 가장 권력과 가까운 이들은 공안검찰과 권력에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려준 판사들 이었다. 공안사건을 맡는 다는 것은 공직생활에서의 성공을 의미했다. 총리인 황교안은 대표적인 공안 검사 출신이며, 교육부장관인 황우여는 학림사건의 배석 판사였다.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던 부림사건의 담당 검사 고영주는 현재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를 맡고 있으며, 최근 그의 발언에 따르면 야당 대표인 문재인 국회의원은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손에 얻자 언론은 구국의 영웅을 미화하는데 열을 올리게된다. 매일 저녁 땡전 뉴스에선 전두환과 영부인이었던 이순자의 행보를 보도한다. 그가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 내리는 비를 보고 가뭄을 겪던 조국에 반가운 비를 몰고는 각하라며 칭송하곤 했다. 한편 의식 있는 언론인들은 협박당하여 퇴출되거나 정권의 동조를 하지 않으면 밥줄을 끊겠다는 말에 마지못해 권력의 힘에 굴복하게 된다. 결국 주류 언론도 사법부와 같이 부정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에 올라탄 공동운명체가 된다.

 

사법부와 언론까지 등에 업은 그들의 자신의 입맛에 맞게 시국 사건들을 조리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광주 민주화운동은 북한군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들이 주도한 폭동이고 따라서 게엄군의 폭력은 공권력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정론직필로 이름을 날렸던 조갑제 기자는 광주 현장에서 들었던 애국가와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생생히 증언한다.

 

 87년 6월 항쟁이 성공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의를 말하면 모난돌이 정 맞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했어야 했다. 청년 박종철은 고문 중에 죽음을 당했고 목숨을 걸고 그가 지키려했던 선배 박종운은 지금 어디선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구의원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이런 부당함이 승리하는 사건을 목도한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이 현실과의 싸움에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6월 항쟁은 국민들이 수없이 흘린 피값으로 직선제의 개헌을 이끌어내지만 야권의 분열로 군부독재가 사실상 연장된다. 1992년 직선제 개헌 이후 두번째 대선을 1년 앞둔 어느날, 법무부 장관 김기춘은 어느 음식점에 지역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여론전을 펼쳐 여당을 승리로 이끌자고 말한다. 이 대화는 녹음되어 폭로 되었지만 폭로자였던 정주영의 국민당은 오히려 역풍을 맞아 대선에서 3위에 머무르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선되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사정권에 반하여 문민정부를 표방했다. 군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부정한 금전 거래를 금지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회 속에 내재한 불의는 그렇게 빨리 해결되지는 못했다. 군사독재의 연장선인 노태우 정권과 손을 잡은 것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문민정부였기 때문이었다. 군부독재를 청산하기위해 자신이 직접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댔지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한다는 모순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에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 참사와 같은 부실공사로 인한 사건사고는 대통령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동안 싸여왔던 모든 병폐가 드러난 구조적 문제였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사회의 규칙을 정하고 집행하는 입법부와 행정부에서 생겨난 부정이 비효율을 만들어 일선 공사현장에서조차 불합리가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대형 토목 공사 현장에서는 1미터에 철근 몇가닥만 빼먹어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농담은 그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몇차례의 선거가 있었다.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대선 전후에 기가막힌 부정들이 벌어진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이 야당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데 동원된 것이다. 그들은 대북 심리전이라고 말하지만, 왜 야당 후보의 비방이 대북 심리전인지 납득이 되긴 힘들어보인다. 헌법과 국정원법은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이 명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권력만 창출할 수 있다면 반칙도 괜찮다는 논리는 예나 지금이나 일관성이 있다.

 

 이렇게 불의가 득세했던 역사를 살아온 이들이 만들 국정교과서에서 어떤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그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교과서는 자신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같은 배를 타고 왔던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분의 말에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정의를 기초로 쓰여진 역사의 대척점엔 성과와 효율이 있다. 어찌되었든 결과가 중요하니 결과를 놓고 볼때 성과가 있다면 역으로 과정도 정당하지 않겠냐는 것이 역사교과서를 새로 쓰려는 그들의 관점으로 나는 파악한다. 그들의 논리는 결과론적으로 산업화가 성공하고 국민 소득이 높아졌으니 산업화를 이끈 5.16은 군사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었으며 유신 역시 사회 전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필연적인 체제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산업화의 기반을 닦은 사상적 기반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므로 한반도의 절반이나마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시작하게 한 이승만을 국부로 높일 것이며 그 시작인  1948년 정부 수립일은 건국절로 기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다시쓰면 한배를 탔던 세력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역사가 정당화 된다면,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사회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후퇴하고 말 것이다. 반칙조차 좋은 결과를 위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도 법과 그에 따른 절차를 따르지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하는 것 자체로 정당성이 주어진다는 그들의 논리를 따른다면 북녘의 김정은이조차 자유민주주의로 체제전환을 가정하에 그간의 과오를 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이슈가 있을때마다 가슴 한켠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다만 국정화를 외치는 그들 때문이 아니다. 선거로 심판할 수 있는 권력은 무서울게 없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들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를 믿는다. 그리고 나이든 세대의 인구가 더 많은 현 상황에서 야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보인다. 어떠한 부정한 행동을 해도 아무런 제지가 없이 오히려 선택받는 마당에 역사를 바꾸는 것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답답함과 두려움의 근원은 표를 던지는 사람들의 손에 있다.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는 6월 항쟁 직선제로 개헌된 이후 첫 대통령에 당선된다. (민정당의 노태우와 공화당의 김종필의 득표율은 무려 도합 44.7%였다.) 한편, 유신헌법의 창안자이며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인 김기춘은 신한국당에서 공천을 받으며 내리 3선 국회의원이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에서 민주화와 산업화의 기묘한 동거가 이루어졌다. 국민들의 투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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