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전 새누리당의 모 의원이 성범죄자를 물리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입안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레이코프의 책인<코끼리는 생각하지마>는 이 법안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 이러한 법안의 기저에는 어떠한 가치가 숨어있는지 밝히는데 큰 도움을 준다.

 레이코프의 말을 빌리자면 진보와 보수의 기저에는 어떠한 근본적인 원형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이고, 다른 하나는 자애로운 부모의 모형이다. 엄격한 아버지는 현 시대를 구성하는 규칙을 옹호하며 이 규칙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징벌을 내리는 존재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부자들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함으로 성공한 사람들이고, 가난한자들은 나태함으로 실패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난은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이들을 위한 복지는 줄이는 것이 마땅하고, 부유함은 반대로 열심의 산물이므로 감세와 같은 정책으로 더 큰 상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위치를 아이들을 계도해야하는 도덕적 절대자에 위치시키기 때문에 소통보다는 일방향적인 지시에 익숙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델은 일사분란함을 특징으로 가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한가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의 원형은 자애로운 부모에 가깝고 이런 원형에는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자녀는 부모와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야하는 존재이지, 일방적인 길들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또한 자녀들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러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을때까지 보살펴야한다는 관점을 가진다. 자애로운 부모의 모형에서 복지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걸음을 떼고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을때까지 도와주는 보살핌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립할 수 있을때까지 교육, 보육 및 의료에서 보편적인 복지를 확대해야하고 그래야만 국민들이 자신의 꿈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원형을 어머니나 아버지와 같은 하나의 성 역할에 국한하지 않는 이유는, 어떠한 성적 특성도 우위에 서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존재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따라서 어느 누구도 타인을 억압할 수 없다는 보편적인 정의로 확대된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보수와 진보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는 유용한 관점을 제공한다. 다시 새누리당의 성범죄자 물리적 거세 안으로 돌아가보자. 엄격한 아버지의 모형을 추구하는 이들이 바라볼때 성 범죄자들은 이미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하지 못한, 심판을 받아야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화학적 거세나 물리적 거세는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범죄자에게 행해지는 징벌에 있다. 따라서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듬어 주었는지는 그들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반면 진보는 범죄를 행하게 만든 구조에 관심이 있다. 표면에 드러나는 범죄 이전에 사회가 이들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지를 돌아보고 필요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접근이 감성적으로는 전-혀 동감을 얻을 수 없기때문에, 물리적 거세와 같은 징벌적인 방법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더 열광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표출이 오늘날의 범죄행위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행동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이 5년간 소통의 부재로 비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것 역시 엄격한 아버지의 모델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원형을 무의식적으로 체화하고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은 계도되어야할 문제아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거세게 반대할수록 그 대상은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쟁이에서 악(惡)의 화신으로 변해간다. 조지 부시가 자신들의 반대측에 위치한 세력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새누리당에서 대통령이 나온다면 이번에도 국민과의 소통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엄격한 아버지의 모형에 기반한다면, 그 누가 대통령의 자리에 앉더라도 또 다른 소통의 불가능만을 양산해는 것은 그 구조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소통 자체를 원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지시해주기를 바라고, 또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수를 지칭하는 정치인들보다 영혼이 없는 그들이 나는 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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