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가치는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것일까. 가치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인 개념을 내포하고있기때문에 우리 자신의 가치를 그 자체에서 찾는 것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가 외부로부터 온다고 가정한다면 그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으로 전락하고만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오늘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삶을 살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모나 소득이나 학벌이 대표적인 외부적인 판단의 잣대일 것이다. 이러한 판단근거에 의해 하나의 큰 시장을 형성하는데, 시장이 요구하는 상품 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성형을 하고, 자동차를 구입하며, 그럴듯해 보이는 직장을 다니기를 강요당한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도, 혹은 이런 비판의식 없이,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는 공허한 행동을 이어간다. 결국 타인의 가치평가에 민감할수록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만족을 충족시켜주어야하는 수단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러한 매커니즘이 누군가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주는 신자유주의 체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개인의 가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챗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갈 수 있는 소비구조만을 원하는데, 자아를 잃고 타인의 평가로 인정받으려는 개인은 이러한 구조의 소멸하지 않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보수적인 정치권력을 유지시키는데도 큰 일조를 한다. 자신을 잃고 조직과 국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한 독재자에게 90프로 이상의 지지율을 보여준 역사를 돌아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그 당시는 단지 먹고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정당화를 한다고 치더라도, 그러한 향수를 국민소득이 2만불에 다다른 오늘날 되살리려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자신의 삶과 가치를 스스로에게서 찾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결국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있는 느낌, 조직이나 국가에 소속된 느낌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신할 수 있는 쉬운 대체제이니까 말이다. 온 국민이 올림픽과 메달리스트에게 열광하는것을 그저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부속품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내 삶 그 자체로써의 자신이 되어야한다. 인간이 좀 더 고차원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사육당하는 돼지새끼마냥 단순히 먹고 사는것만이 이슈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만의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