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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의 그림자 - 전통건축, 그 종의 기원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건축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서적은 꾸준히 구입해보는 편이다. 그러나 책장에 꽂혀있는 장서량과 이해도는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매번 읽으며 좌절하는 것은 부재의 이름은 왜 죄다 한문이며 종류는 또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그래, 이걸 외우고 공부한다고 한다고 치자. 공포(栱包)는 왜 필요한것이며 또 굳이 주심포(柱心包)와 다포(多包)식으로 나누는지, 처마는 왜 곡선이며, 안쏠림과 배흘림 기둥은 어째서 나온 것인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 단순히 한국의 미(美)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물로 양식과 형태가 나왔고, 최종적으로 미적인 형태를 가지게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종이컵의 '최적화'에서 시작한다. 최소한의 종이를 사용해서 대량 생산과 보관이 가능하고, 그 자체로도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형태로 발전해 온 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컵이다. 새로운 디자인 내놓으려 해도 도안을 바꾸는 것 이상의 변화가 힘든 이유는 이미 종이컵은 최적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이 전통건축에도 설득력있게 전개된다. 전통건축은 비, 바람, 중력과의 오랜 싸움 끝에 만들어진 최적화의 산물이다. 이를테면, 비에 의해 손상되기 쉬운 모서리 부분을 더 들어올리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으로 지붕의 처마곡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목재를 부식시키는 비의 들이침을 막기 위해 처마를 한뼘이라도 더 뻗어야했기 때문에, 주심포(기둥상부에만 처마를 받치는 부재가 존재)에서 더 많은 부재를 지지할 수 있는 다포(기둥상부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처마를 받치는 부재가 존재) 양식으로 변해갔다고 설명한다. 바깥 기둥이 안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는 안쏠림은 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기둥을 약간 기울여 조립해야 공사중에 쓰러짐을 방지할 수 있고, 공사에서 발생하는 오차를 줄일 수 있었을거라 추측한다. 아름다운 곡선이나 외형은 모든 기본적인 조건들이 충족되고 형성된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최근 화제거리인 서울시청 신청사에 관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보았다. '한국 전통 양식으로 했으면 좋았을텐데.'
청와대는 목조로 만들어온 기와집의 재료를 콘크리트로 바꿔치기한 것이고 경복궁에 있는 민속박물관은 법주사 팔상전을 비롯해 다양한 요소들을 버무려 뻥튀기 시켜논 시쳇말로, 종합선물셋트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의 전당의 오페라 하우스는 '갓'의 형태를 추상화했다고 한다. (오마이 갓) 조금 덜 직설적인 것으로는 기둥과 처마 요소를 극대화한 광화문의 세종문화회관 정도가 있겠다. 과연 이러한 형태적인 모방을 전통의 성공적인 계승 혹은 재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전통건축물 양식을 살려 지은 건물이나 재해석한 건축물중에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런 시도는 왜 자꾸 실패하는 걸까? 이 책에서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은 비와 바람 그리고 중력에 대해 처절하게 싸워가며 얻어낸 결과물인데,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베껴놓은 건축물이 그 아름다움을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굳이 전통 건축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인데, 유럽의 성, 궁전을 껍데기만 그럴듯 하게 모방한 예식장을 떠올려보자.)
전통건축에 발생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에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이 책은, 읽는 내내 지루함 없이 없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충분히 흥미로울만한 대중성까지 갖춘 책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실무자에게도 유용한 관점을 제공하리라고 본다. 전통건축의 표피를 모방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다. 쉽게 읽히면서 전문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이 책이 언젠가는 전통건축에 관한 고전으로 자리잡지 않을까하는 예측을 덧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