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소년의 정신 - 하루키 읽는 법 세계문학공부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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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전 잡썰


야 하루키가 노벨상 받을 일은 절대로 없을 걸...


자칭 (사이비)하루키 팬을 자처하는 지인과 어쩌다 하루키 이야기를 꺼낼때 곧잘 내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밥 딜런도 받는데 하루키 라고 못받을게 있겠냐 또한 내가 하는 말이다

트럼프도 윤 머시기도 대통령 되는게 세상인데 난들 알게 뭐야 여하튼 하루키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양쪽 모두 나름의 이유에 대해 할말은 많을 것이다 


야 아직도 하루키를 읽냐?

그렇다 나는 이제 하루키를 읽지 않는다,라고 선언 씩이나 할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할만큼 하루키를 많이 읽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양을 쫓는... 상실의... 노르웨이... 세계의 끝과... 해변의... 색채가 없는... 그리고 에세이 조금 읽었을 뿐이다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해는 2010년이다 저자는 그때까지 타이완에서 번역 출간된 하루키의 책은 모두 읽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해변의 카프카를 하루키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내가 해변의... 를 읽었을 땐 어린 남자의 방황과 자살의 등장(맞나?) 등 하루키는 또 자기복제를 하고 있나 아 지겨워... 했던 기억만 남아 있는데 역시나 아는만큼 보는 법이라고 중화권 대표적 인문학자가 본 작품과는 천지차이였던 것이다 일단 가방끈은 길고 봐야...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노르웨이 숲에 대해 '이렇게 슬픈 소설이 왜 슬픔을 회피하는 이 시대에 이토록 인기가 있는 걸까?' 하는 물음에 뒤이어 노르웨이 숲 초반의 문장을 가져온다 


우물은 초원이 끝나고 잡목 숲이 시작되는 바로 그 경계선에 있다. 땅 밑으로 빠끔히 열린, 지름 1미터 가량의 어두운 구멍을 풀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둘레에는 목책도, 높다란 돌담도 없다. 다만 그 구멍만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참고로 위 문장은 내가 읽었던 '상실의 시대'(유유정 번역)에서 같은 문장을 옮긴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진정한 발단이면서 소설 전체의 핵심적인 메타포' 라 한다 그러고보니 초원과 숲, 경계선, 목책도 돌담도 없어 빠지기 쉬운 우물 등의 이미지가 소설 전체를 나타내고 있구나 했다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르구나 그렇다고 지금 다시 상실의 시대를 집어들 마음은 일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읽던 그 무방향 시절의 나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저자는 우물과 나오코 레이코 그리고 등장인물들 간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외적인 인물로 지목된 미도리가 가진 의미를 와타나베의 독백을 통해 나타낸다

그것을 저자는 '책임'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책임을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주제로 한 작품이 해변의 카프카라는 것이다


양자오는 30년간 소설을 써온 하루키를 가리켜 '시종일관 소년과 성인의 경계에서 배회하면서 정식으로 성인의 영역에 발 디디기를 거부해 온 하루키는 용감하고 터프한 삶에 사로잡힌 영원한 소년'으로 정의하며 들어가는 말을 맺었다


인문학자 답게 또 그 깊은 조예에서 나올 수 있는 평이다 한편으로 나같은 소설의 '재미'를 좇는 얄팍한 독자 입장에서는 '영원한 소년'이 쓰는 영원한 소년이 매번 등장하는 변주만 되는 소설이 자기복제의 반복이라 느껴 '이제는 하루키를 읽지 않아요'라고 해버리는 것이다


저자가 극찬한 해변의 카프카 그 어떤 점이 훌륭한지 그리고 다른 주장들에 대해 나는 그것에 수긍할지 아닐지 이제 본문을 읽어볼 차례다 인문학자님의 '말빨'에 넘어가 하루키를 가볍다한 내 얄팍함이 부끄러울지 어떨지 흥미롭다


라떼는 말이야 라고 불리울 시절의 어떤 cf에는 당시 대세 여배우?였을 한 여성이 상실의 시대를 손에 들고 읽는 장면도 있었다

이제 그 시절 만큼의 하루키 파워는 아닌지 예전만큼 하루키를 읽지 않는것 같다 당장 이 책의 인스타 피드 량만봐도 에게? 겨우 이것밖에 안되네 싶을 정도다 거대 출판사가 보여준 하루키 신작 소설의 홍보같은게 있었더라면 또 어땠을까 (나 역시 출간된지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책을 알게 되었으니)

하루키 마니아라고 모두 이런 책에 관심이 있을까는 다른 문제긴 하다 내 짐작에 하루키를 못마땅해 하고 뭔가 까대야 속이 시원한 나같은 승질머리라면 환장?하고 볼 책이 아닐까 한다 (역시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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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8-1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춘수씨의 팬은 아니지만
꾸역꾸역 새로운 책이 나오면
읽고 있답니다 그것 참 신기하
지요.

확실히 이제 춘수씨가 끗발날
리던 시절은 지나갔지요.
뭐 그래도 호기심 가는 작가긴
하니 또 읽게 됩니다.

얄븐독자 2022-08-11 15:41   좋아요 2 | URL
궁금하긴 할것 같습니다 ㅋ 스을쩍 들춰는 보다가 말겠지만요 꾸준히 써낸다는건 진짜 인정할 부분이구요 :)

scott 2022-08-1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이완에서 하루키 옹의 인기가 엄청납니다
무슨 무슨 독서 클럽에 단골 낭독 작가이고
북카페 마다 하루키옹 책으로 도배가 ㅎ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키옹의 진짜 재능은
초기 중기 단편들
그리고 수 많은 번역서라고 생각 합니다
실제로 하루키옹이 번역한 작품들
일본의 영문학자들도
비판을 못할 정도 입니다 ^^

얄븐독자 2022-08-12 00:13   좋아요 1 | URL
한국에도 한번쯤은 왔을 법한데... 어마무시한 계약금도 안겨주기도 했거늘. 뭔가 부담스러웠을까요.
남은 여생을 창작보다 번역을 하려나요 ㅋ
 
비비안 마이어 : 나는 카메라다 비비안 마이어 시리즈
비비안 마이어 지음, 존 말루프 엮음, 박여진 옮김, 하워드 그린버그 해제, 로라 립먼 서 / 윌북아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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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마이어. ‘사진‘에 관심 있다면 한번은 봤을 사진을 찍은 사람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9년 사망할 때까지 15만 장이 넘는 이미지를 남길 만큼 사진을 찍었지만 생전에 그 사진은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예술가로써 누렸을거라 짐작할 수 있는 생활과는 거리가 먼 보모, 가정부, 간병인 등으로 일하며 남의 집을 전전했다
2007년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부쳐진 필름이 2년후 대중들에게 소개되면서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적 반응을 보였다
살아 생전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는 고호나 사후에 아웃사이더 아트 작가로 알려진 헨리 다거와 같은 비운의 예술가들과 그 빌어먹을 예술이 뭔가 하는 생각이...



마이어는 왜 공개하지도 않을 사진들을 그토록 오래 많이 찍었을까 하긴 팔리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는 화가들 어디 한둘일까를 생각해보면 예술을 돈으로 보는 내가 그른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마이어는 노년의 어느날 넘어지게 되고 요양원에서 사망하게 된다 마이어에게는 사진의 인화나 공개 여부는 중요한게 아니었을것 같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까지 프레임 구석구석 구도를 살피고 대상의 한 순간을 잡기까지의 몰입감이나 긴장감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쉼없이 흐르는 순간을 얼음처럼 얼려 한겹 떠내는 영원의 한 찰나에 대한 작업이 사진이고 타인과 교류 없이 할 수 있는 작업 그리고 비교적 간단한 사진 찍기라는 작업을 생각해보면 마이어에게 어울려 보인다

마이어의 손에 25년 이상 쥐어져 있던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정사각형 사진을 만들어내는데 만일 마이어가 현재 생존해 있다면 인스타의 정사각형 형식에 흡족해하며 엄청난 사진들을 올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자니 요양원 침상에서 혼자 눈 감았을 그가 더욱 쓸쓸해보인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에다 사진사 라는 말 하나도 더해본다

사진사 라는 말을 단박에 알아챈다면 당신은 나같은 ‘노땅‘인 확률이 높다 요즘 애들?이 과연 ‘사진사‘라는 말을 알까
소풍을 가거나 가을 운동회 때면 어김 없이 목에 커다랗고 검은 카메라를 매고 나타나 가족 사진이나 친구들 사진을 찍어주는 아저씨. 인화된 사진은 (아마)집으로 부쳐주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에 카메라가 있는 집은 그야말로 ‘부자‘였던 것이다 우리집에 처음 카메라가 들어온건 중동 건설 노동자로 나갔던 아버지가 보내온 자동 필름 카메라였다
막상 카메라가 집에 있어도 필름값과 현상비를 생각하면 공짜로 막 찍어대는 스마트폰 카메라처럼 찍을수는 없었다

그때의 사람들이 뭘 하든 일단 ‘찍고‘ 보는 요즘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기괴하다 하거나 놀라지 않을까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다못해 식상하기 까지한 인증샷이나 셀카의 사진들. 어쨌든 사진은 사진이 맞는데 그 옛날의 그 사진과는 다른것 같은... 이러니까 노땅인 것이겠지

어떤 사진이 담고 있는 피사체나 구도 등 모든 사진에는 찍은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이가 그 의도를 전달받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론 의도를 숨기고 싶은 사진도 있을테고

한장한장 마이어의 사진집을 넘기며 사진 속의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 하는 생각이나 사진을 찍은 마이어의 의도나 생각들은 또 뭘까 싶기도 하다

인스타를 비롯한 sns 상에서 우리는 사진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인위적으로 철저하게 셋팅된 모습일지언정 우리는 오히려 그런 ‘셋팅‘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에서 어떤 위안을 얻으려하는건 아닐까

사진 찍는건 좋아하지만 찍히는건 죽어라 싫어하는 나는 그래서 얼굴 위주의 셀카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사람은 어떤 심리일까 싶다 똑같은 자기 얼굴을 왜 자꾸 찍어대는지

그럴듯한 폰카 사진이 찍히면서 내가 사진에 취미가 있나 싶어 제대로된 디카를 사봤는데 뜻밖으로 좋은 취미였고 프레임을 통해 보는 또다른 세상이 신기하기만 했다 결국 데세랄까지 가서 찍어보기도 했지만 들고나가본지가... 내 수준에선 굳이 카메라로 찍지 않아도 찍고 싶은건 충분히 폰카도 넘치니까

오늘도 뭔가를 찍는다
일단 찍고 본다
남는게 사진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렇게 또 남긴다는 것도 웃긴것이 여간해선 아니 거의 100% 인화되는건 없고 오로지 디지털 신호로 저장되어 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삭제된다는 것이다

찍기도 쉽고 삭제도 쉬우니 그야말로 진공묘유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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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의 자전소설 3부작 가운데 서머타임 을 읽다가 상관없는 잡썰

처음 존 쿳시라는 이름을 듣고 그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재빨리 도서관으로 가 그의 소설을 읽은건 쿳시가 노벨상을 받기 전이니 꽤나 세월이 흐름을 느낀다
쿳시를 소개하던 선생은 요즘 주목하고 있는 작가라고 했는데 과연 선생의 안목이 대단했음은 그의 노벨상 수상과 그에 따라 국내에 출간된 쿳시의 작품들을 보면 알수 있겠다 물론 이전에 벌써 부커상 2회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한강 작가가 부커상을 수상하기 전에는 생소한 상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그렇게 비교적 초기에 쿳시라는 작가의 작품을 맛보기 식으로 접했지만 딱히 흥미를 끌만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이 호락호락한 것도 아닐 뿐더러,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쿳시의 작품은 그 옛날 읽은 그 하나밖에 없다, 처음 읽었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짜증스럽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코맨트가 여기 어딘가에 있긴 하다
이후 쿳시가 나름 국내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넖혀가고 출간되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많은 독자들이 읽고 리뷰가 넘쳐나는 와중에도 첫 작품 때문에 손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늘 관심 영역권 안에는 있었고 언젠가는 쿳시를 읽어야 할텐데 하며 신간들을 체크하고만 있었다
비교적 최근 서점 매대에서 이 자전소설 삼부작의 출간을 확인할 당시에도 아 또 쿳시 책이 나왔네 하고 시큰둥했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 건 상투적 표현이지만 그만큼 틀린 말도 아니란 것이다 인스타나 북플에서 누가 읽으면 따라읽게 되거나 일단 지르고보는 경우가 많은데 지금이 그렇다
좋은게 좋다 식의 리뷰와 그 리뷰어는 그닥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나름 믿고 보는 리뷰어의 리뷰에 쿳시 바람이 불었달까



자서전과 자전‘소설‘은 당연하게도 완전 다른 것 아니던가
쿳시는 이 자전 소설 속에서 더는 생존 작가가 아니다 일단 그 설정이 흥미로웠다 인터뷰로 진행되는 것도 좋은 설정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가상의 인물들이지만 그것 역시 살아있는 쿳시가 써내려가는 것이니 그 인물들을 내세워 쿳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하면 빨리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은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작품과 자신에 대한 평판을 써나갈 때 좀 낯 간지럽거나 하진 않을까 그리고 타인이 생각하는 쿳시가 아닌 자기자신이 본인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역시 이 책을 거침없이 집어들게 했다

옮긴이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백프로 ‘뻥‘은 아닌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대개의 문학작품 독자들은 작품에 빠지게되면 작가의 시시콜콜한 사적인 영역에 까지 관심이 넓어지기도 하는데 대중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 작가가 자전소설을 썼다면 그 관심사가 어느 정도는 충족되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참고로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영어본에는 삼부작과 삼부작을 묶은 ˝시골생활의 풍경들˝ 까지 네 권이라고 한다 쿳시는 통합본을 낼때 원고의 상당부분을 고쳤다고 하는데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영어본을 봐야 한다
국내 번역본은 작가의 요청에 따라 영어 통합본에 따랐다고 한다

원서 볼 능력이 안되는 입장이다보니 도대체 어디에 무엇을 뜯어 고쳤나 하는 호기심이 더더욱 강렬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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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0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교수님 입니다!
저는 쿳시라는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 하지 않았다면
읽을 생각을 안했을 겁니다

쿳시 새 번역본은 어디가 추가 되고 고쳐 졌는지 저도 궁금!^^

전 Youth가 가장 좋았습니다 ^^

얄븐독자 2022-08-03 06:59   좋아요 0 | URL
일반적 독자층에선 쉬운 작가는 아닌것 같긴합니다 저 역시 그나마 노벨상 후광이나 추천이 있어 관심이 있었구요 섬머타임만 읽고 말려고 했는데 청년시절 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오트 쿠튀르 문학과지성 시인선 539
이지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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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가끔 뇌가 허물어지곤 하였다.


발작과 증명처럼

날이 빛나고


_부분



이 시집이 어떤 시집인가는 뒤쪽에 실린 해설의 초반을 참조하면 되겠다


시집에 무언가 군말을 덧붙이기가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해석과 예측의 불가능성, 그러니까 이 구절, 저 대목, 이 문장들은 어떠한 맥락 속에서 상호 작용을 하고 또...


_204p


해석이 불가능하고 맥락 없이 이 구절 저 구절들이 시집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그런 읽을 거리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지아의 시집은 좋은 선택지가 되겠다 최근 출간된 두번째 시집 이렇게나 뽀송해 역시 기대가 된다

이렇게 비유를 해보면 어거지스러우려나

이 시집은 사진집 같다고나 할까

투명한 유리창 너머 보이는 장면을 무의식적으로 팡팡 찍은 그런 사진

서정시가 주관이 가득한 그림이라면 이 시집에 대한 느낌이 사진집을 한 페이지씩 넘기는 듯했다는 거다

물론 이것도 정확한 비유는 아닐 것이기에 자칫 선입견을 불러올까 조심스럽다


빛은 사람을 알까. 그래서 붉어집니까

76p


앞뒤 문장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그럼에도 설명은 못하겠지만 이런 문장이 갖는 매력은 부정할수 없겠다

하지만 시집이 온통 이렇게만 채워지지는 않고 아래와 같은 표현도 있으니 참고 하시라


먼 풍경을 보면

내 등이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아

80p



의자야 일어나

거기서 일어나


1. 불완전한 연구


 어제

 내가 먹던 요깃거리를 돌려줬으면 좋겠어.

 필요하거든.


 ……

 허무가 나를 몽롱하게 만든다면

 몽롱을 내가 허무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이 성질은 무엇인가.

 이 물질은 무엇인가.


 그 사이에 테이블을 두고

 밟고 올라가

 높은 곳을 본다.


 얼룩소는 어둠의 조끼를 찢어 간혹 허무와 몽롱을 멀어지게 할지어니, 모과의 아둔한 머리를 물어 가죽을 만든다면 생굴이 안 되고, 돌멩이를 깨무는 개미들의 행진에 대한 이슈는 아, 촌스럽다. 촌스러워 꽹과리를 치네. 비유들이 길어서 줄다리기를 하네. 영차영차. 나의 일은 무엇인가. 뭇별의 할 일은 뭔가.


 면연력.


 슬픔이 나를 휘저어, 담백한 나를 마시네.


_부분


앞에서 사진 어쩌구 했지만 그림이든 사진이든 그것에서 받는 느낌을 찾아 헤매는 일이 시집(책) 고르기 아니겠나

그런 느낌에 대해 공유한다는게 과연 가능한 것일까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이런 시집을 수백권 읽는다고 이런 시를 쓸 수 없듯 아무리 떠들어도 무엇이 전달될수 있을까 굳이 전달할 필요도 없지 않나

그러니 시집 가운데 시 한두 편만을 올려두는게 가장 좋은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불필요한 오해가 될 수도 있는 일

어쨌건 읽을 놈은 알아서 찾아 읽을 일이니 뭐



나는 위로를 모르는 인간이거든. 그런데 말이지.

위로라는 그 천박한 길목에서 나는 무슨 버스를 타고 떠나버려야 하나,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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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7-2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시를 읽는다고
어휘능력이 키워지고 있는지 궁금해 질때가! ㅎㅎ


얄븐독자 2022-07-30 08:23   좋아요 1 | URL
자꾸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휘력이 늘지 않을까요 :)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마다 나타내는 표현력에 깜짝깜짝 놀랄때가 많아 그래서 시집을 보나봅니다
 
자살에 대하여 -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하미나 해제 / 돌베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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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지하게 자살을 실행에 옮길 사람은 볼 필요가 없다 (볼 사람도 없겠지만)

이 책은 자살을 하나의 대상으로 하고,

그 행위의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그렇다고 다른 자살에 관한 책보다 특별한 어떤 내용이 보이지는 않지만

깨알같이 예로 든 작가들이나 작품들에 대한 사실들은 재미 있다


이 책은 2015년에 초판이 발간되었고 2020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서 5년전 출간한 자신의 책에 대해 돌이켜보면서

2015년에 쓴 이 책의 마지막에 대해

다소 태평한 방식으로 너무 빨리 낙관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아

불만족스럽다고 썼는데 나 역시 그렇게 읽었다

굳이 저자 나름의 결론을 도장 찍듯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어찌보면 결론 내릴만한 말은 너무나 뻔하게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는거 아니냐 그 말이다

그런 불만족 때문인지 서문에 추가된 소셜미디어와 자살 세대라는 꼭지에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 점은 새로웠다

만일 이 책을 읽을 작정이라면 반드시 서문부터 읽기를 바란다


자살이나 죽음에 관한 책에 관심이 많다보니

신간 목록에서 이 책의 제목만 보고도 얼른 차례를 살펴보았는데

차례의 제목이 이 책을 읽게 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책을 읽는 내내 나름의 재미랄 수 있던 점은

이미 영상으로도 소개했던 장 아메리, 에두아르 르베, 에밀 시오랑과 같은 작가들을

저자도 언급하면서 특히 르베의 국내 미번역 소설 자살에 대해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그동안 품고 있었던 궁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만큼

더욱 그 소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자살을 했거나 자살과 연관된 작가들,

카뮈나 버지니아 울프,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 같은 작가들이 등장해서 좋았다


그 다음으로 소셜미디어와 자살 세대라는 꼭지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흥미로웠다


저자가 인용한 한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시장 포화 상태에 이른

2012년 이후 자살사고의 빈도 수, 자살 시도 정도, 자살 수 같은

다수의 행동에서 실제로 중대한 증가가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십대 초반 소녀들의 자살률은

2012년 이후 두 배가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 통계를 들지않아도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악영향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다

나 역시 인스타그램 이용자지만 과장되고 편집된 채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며

과연 이 이미지들의 세계가 무슨 의미일까 하는 허탈한 생각을 하면서도

중독된 듯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 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원고를 쓰는 날 포탈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등장했다


이러니 최악의 SNS” 인스타 중독, 이렇게 무섭습니다


헤럴드경제 2021.9.21.

http://naver.me/xB4V4vfP


자살에 대하여 Notes on Suicide


언제부터인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뉴스에서

자살이라는 용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고 하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들으면서 자살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용어의 대체가 과연 자살 예방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다만 그 상황에 대한 구체적 방법까지 보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아진 보도지침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큰 동기는 자살을 둘러싼 어휘를 넓히고,

그 현상을 기술하고 이해할 더 많은 단어를 찾으며,

공허하고 진부한 말보다는 공감으로 자살을 대하는 것이었다.

_29p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자살자의 유족에 대한 자살자의 무책임을 들어 자살자에 대한 비난과

자살의 이유에 대해 우울증이나 어쩔수 없는 고통 때문이라는 의견들을 나타낸다

순수한 자유의지에 따라 자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심스런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거나 신변상 특별한 문제가 없는 자살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자살을 둘러싼 어휘나 단어란 말은

말 그대로 용어의 문제도 있겠지만 자살을 둘러싼 생각의 폭이

한정되었다는 것으로 나는 읽는다

생각이 다양해져야 그에 따른 말도 생겨나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현상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서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쓰고 있듯 자살에 대한 생각이 다양해질 때

자살에 대한 표현도 더 많아질 것이다


자살은 왜 비도덕적이라 여겨지는가


지금 이야기해보고 있는 이 책을 비롯해 제목에 자살이란 단어가 포함된 책을

지인이나 가족이 보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

소설책이나 처세에 관한 책처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까?

반대로 내가 읽고 있는 자살 관련 책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책상 위에 던져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만큼 자살이라는 행동에 대해 기본적으로 죄악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생각의 뿌리가 어디인지 역사적 종교적 사실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대충 짐작하듯 그런 생각은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종교인이기도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자살이 부도덕하다거나 죄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인간 각자의 생명에 대한 결정권은 온전히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국가나 공동체에 대해 어떤 의무가 있다고 한다면

국가나 공동체도 개인의 생존에 대해 어떤 책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자살 유서


저자는 20135월 자살 유서 쓰기 워크숍을 조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맨하튼의 작은 공간에서 설치 미술의 일환으로 2주 동안 진행되었다

대다수의 자살자는 유서를 남긴다고 하고

저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자살 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살 유서는 고대 이집트부터 존재했을 것이고

18세기 자살 유서의 특징은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신문사에 유서를 보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생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프로이트의 논문을 근거로 자살 유서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하고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졸업식 연설을 언급하기도 한다

자살 유서를 여러 편 쓰기도 한 커트 코베인의 유서를 통해

사랑과 증오의 양가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일반적 유서 보다 자살 유서가 좀 더 극적이라고 볼 때

상상하기도 싫다는 사람도 많겠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무슨 말을 남기겠는가


남은 이들에게 전하는 인사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하는 독백같은 게 어울리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렇게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구나


자살자들


인간을 비롯 모든 생명체들은 죽음을 맞는게 필연인데

유독 인간의 죽음 가운데 자살로 죽음을 택하면

그 삶은 자살만이 대표 이미지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다


자살은 삶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통해 삶을 봄으로써,

삶에서 복잡성을 박탈해버림으로써 그렇게 할 뿐이다

_124p


사고나 병으로 죽는 죽음과 자살로 죽는 죽음은

왜 그토록 다르게 취급될까

자살이 그토록 유별난 죽음인걸까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 하면서 자살이라는 주제는

곧 삶은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나 성격상 이 질문까지 나가는 것은 좀

오버스럽고 불필요하다고 본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이 책과 어울리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의 답을 어느 승려가 한 말로 비유 해보자면 이렇다


삶에는 이유가 없다

주어졌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다

없는 이유를 자꾸 찾다가 못찾으면 자살밖에 없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책의 마무리를

굳이 이렇게 해야하나 김이 빠지는 것이었다


어쨌든간에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 데이비드 흄의 자살에 대하여

하미나 작가의 해제 역시 빠트리지 말고 읽어봐야 할 것이다


이런식으로 얇다면 얇은 이 책 내용의 빙산의 일부도 안될만큼 떠들어 봤다

그럴듯한 떡밥 같은 걸 던져놓고 이 책을 읽고 싶게끔 해야할까

글쎄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어차피 이런 책은 찾아서 볼 사람은 뜯어말려도 볼 그런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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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5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뒤르켕의 <자살론>
오마이뉴스에서 진행한 김호기
교수님의 강의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삶의 이유를 찾는 미션이 어쩌면
살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
까 싶기도 하네요.

얄븐독자 2022-07-25 21:07   좋아요 1 | URL
어느 스님의 말씀으로는 삶에는 이유가 없다, 그 없는 이유를 찾다 못찾으면 그 끝에는 자살밖에 없다 라 했는데 저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scott 2022-07-28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에는 이유가 없다

주어졌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다]
이 말에 깊이 공감 합니다

친구가 대학 1학년 때 스스로 생명을 끝내 버렸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 할 수 없고
머물 곳(마음)이 없어서
그만 ㅠ.ㅠ

얄븐독자 2022-07-28 00:59   좋아요 0 | URL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떠나면 더더욱 힘겨운것 같습니다 삶이란게 깃털처럼 가볍다가도 천근만근 보다 무겁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