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숲 - 나의 문어 선생님과 함께한 야생의 세계
크레이그 포스터.로스 프릴링크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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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야생의 영역으로 헤엄쳐갔다.

 

 

 

에세이와 다큐가 합쳐진 이 아름다운 책은 어느 한 페이지도 허술한 곳이 없다.

생전 처음 보는 바다 생물들의 모습과 마치 나무로 빽빽한 숲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숲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롭다.

 

생전 처음으로 상어의 눈을 보았고, 어린 전복의 껍데기를 보면서 전복이 무얼 먹고 자라는지를 알 수 있게 됐다.

문어가 마술처럼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의 천적인 파자마 상어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때론 그 상어를 질식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삿갓 조개는 자기만의 정원을 만들 줄도 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이 책




의 모든 페이지가 경이롭다.



육지에서 살며 바닷속은 들어가 보지도 못한 나로서는 이 책의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바닷속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생명체를 만나는 기분은 황송하기까지 하다.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크레이그 포스터의 글은 에세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그는 자신의 상황와 바닷속에서 경험했던 순간들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고통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적었다.

그가 경험한 것들을 읽으며 나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을 느끼며 우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생명체와 교감하는 모습을 보는데 부러움과 질투가 동시에 난다.

 

 

모든 사람은 야생의 본성을 갖고 태어난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야생 생활은 수렵 채집인의 지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야생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야생 자연의 본질 중 일부를 알고 그것을 우리 정신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케이프타운 근처의 켈프 숲은 사진으로만 보는데도 아주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생명체가 사는 이곳은 위험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곳이다.

365일 잠수를 하기로 마음먹은 크레이그와 어린 시절부터 잠수를 탔던 로스가 친구가 되어 이 켈프 숲을 누빈다.

크레이그는 백과사전처럼 우리에게 바닷속의 신비를 전하고, 로스는 자신이 바다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들을 통해 나는 인류가 문명화 되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엿보게 되었다.

그들이 경험한 것들이 온전하게 나에게 닿는 느낌이다.

아마도 그들과 나는 서로 일면식도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이어지는 실을 뻗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진화의 결과로 우리는 오래전 모든 생명체와 교감할 줄 아는 능력을 고갈시킨 거 같다.

케이프타운의 바다에서 두 사람은 오래전 지워진 감각들을 하나씩 배워간다.

바닷속 동물들은 그들을 관찰하고(그들은 관찰 당하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믿을만 한지를 판단했으며

자신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마자 그들에게 곁을 내어 주었다.

그들이 옆에서 헤엄치게 해주었고, 그들에게 다가가 맛보고, 느끼고, 같이 놀아 주었다.

이것은 인간이 바닷속 동물들을 관찰하며 쓴 것이라기 보다, 자신들이 관찰 당한 기록을 적고 있는 거 같다.

 

바닷속 동물들이 생각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그들은 육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사는 곳이 달랐을 뿐이지.

 

#나의문어선생님 을 보게 되었다.

다큐는 잘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을 읽고 그 다큐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세상은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더 많은 거 같다.

크레이그와 로스, 그들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이런 세계를 알지 못한 채로 살았을 거 같다.

또 다른 세상을 알게 해준 그들이, 내가 바닷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바다를 알 수 있게 해준 그들이 고맙다.

 

아름다운 문장과 경이로운 사진과 믿을 수 없는 그들의 경험 앞에서 경건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언제쯤 그들과 같은 자연교감의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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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에 있어요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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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찍은 점 하나가 예상치도 못한 곳과 이어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

 

 

 

어마어마하게 큰 몸집으로 백곰 같기도 하고, 마시멜로 맨 같기도 하고, 베이맥스 같기도 하고, 판다 같기도 하고, 가가미모치 같기도 한 여자가 양모 펠트를 뜨고 있는 도서실.

무섭게 생긴 모습에 비해 몸을 포옥 감싸는 듯한 느낌의 목소리를 가진 사서 고마치씨 옆엔 허니돔 쿠키 상자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책 종류를 말하면 엄청나게 빠른 타자치기로 책 목록을 뽑아 준다.

그 목록에는 반드시 요청하지 않은 책과 양모 펠트 인형이 부록으로 딸려 온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눈물을 훔쳤다.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회사 생활이 떠오르고, 장사나 해볼까? 하면서 기웃거렸던 생각이 나고, 독박 육아로 힘들어하는 동생을 도와줄 생각도 못 했던 철없던 언니였던 내가 떠오르기도 하고, 텅 빈 통장을 바라보며 막막했었던 백수 시절도 생각났다.

그때 이 책을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 역시도 그랬지만 이 책의 인물들도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 하는 일을 해야만 하고,

사랑하는 아이를 얻었지만 일과 양립할 수 없고, 재능을 알아주는 이도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은퇴 이후 취미도, 할 일도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그들이 찾은 곳은 동네 초등학교 옆에 있는 도서실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책을 빌리지만 자신들이 빌린 책보다는 고마치씨가 부록으로 챙겨준 책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언젠가, 언젠가 하는 동안은 꿈이 끝나지 않아. 아름다운 꿈인 채로 끝없이 이어지지.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그 또한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해. 계획 없이 꿈을 안고 살아간다 한들 나쁠 거 없어. 하루하루를 즐겁게 만들어주니까 말이야.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는 과정이 인연스러워서 좋다.

같은 도서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결국 같은 지역을 공유하는 법.

인사를 나눈 적은 없어도 오며 가며 만난 적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인연이 서로 이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뜨거워진다.

 

받아. 책 부록이야. 당신한테는 그거.

 

 

무심히 건네주는 부록은 다른 길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고마치씨에겐 영감이 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일지를 알아보는 마음의 눈.

따뜻한 문장들이 곳곳에서 내 마음을 달래준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소환되고 이제야 비로소 그 감정들이 녹아내리는 거 같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고,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위로의 말을 <도서실에 있어요>에서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눈물이 났던 모양이다.

 

"뭘 찾으시죠?"

 

 

영혼으로 물어 오는 질문에 사람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고마치씨는 알고 있다. 그들이 찾는 게 무엇인지 그게 어디쯤에 있는지.

책을 읽으며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어디쯤 있는지 깨달았다.

 

도모카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히로야처럼 생각만 했지 실천하려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료처럼 미래를 걱정만 했을 뿐. 그 걱정을 현실로 만드는 계획은 없었다.

나쓰미처럼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했기에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고, 억울했다.

마사오처럼 쓸모없이 버려진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저쪽에서 먼저 멋대로 제안한 게 아니라, 나쓰미가 먼저 움직였으니까 주변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는다.

사람도, 기회도, 운도, 삶도.

20대부터 60대까지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는 삶에 대한 회의가 서로의 파장으로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가는지 보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책을 읽고 "살맛 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직 느끼지 못했던 마사오의 심정을 간접 경험하면서 앞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어떻게 다져가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 본다.






생각 없이 단순하게 읽힐 거 같았던 이야기가 너무 깊게 다가와서 마음이 놀랜 모양이다.

잔잔하면서 슴슴하게 인생을 위로해 주는 이야기 <도서실에 있어요>

정말 모든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제목에 한 번 더 마음이 간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 준 작가가 고맙다.

내 머릿속에서 뱅뱅 돌던 생각을 작가님이 예쁘게 다듬어 주셨다.

나 역시 책을 읽는 독자로서 내가 만든 책은 아니지만 즐겁게 읽고 열심히 감상을 남김으로써 책의 흐름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마음이 힘든 사람,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서실에 있어요>는 내가 추천하는 부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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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50
로버트 두고니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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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시더 그로브는 광산이 폐쇄되고 주민 대다수가 이주했을 때 죽은 게 아니라, 세라가 사라진 날 죽었다고. 그 사건 이후 사람들은 대문을 열어놓지 않았고, 아이들은 멋대로 거리를 활보하거나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

 

 

로버트 두고니.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의 시리즈물 첫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는 새로운 시리즈를 갈망하던 내게 신선한 전개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화학교사를 하다 경찰이 된 트레이시.

그녀는 시애틀 최초의 여성 강력반 형사가 되었다.

그녀에겐 20년 전 사라진 동생 세라가 있다. 트레이시가 형사가 된 이유도 세라의 사건에 의문점이 많기 때문이다.

범인은 잡혀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있지만 세라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20년 후에 세라는 백골이 되어 나타났다.

 

"이거 하나는 분명히 해두자. 네가 시애틀에서 잘나가는 강력계 형사일지는 몰라도, 이곳은 네 관할구역이 아니야. 여기서 너는 일개 시민일 뿐이지. 법을 집행하는 건 나다. 그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허깨비 쫓으며 돌아다니는 짓은 그만둬."

 

 

세라의 시신이 발굴됨과 동시에 트레이시는 이전의 재판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를 갖게 된다.

세라를 강간하고 죽인 죄로 20년간 복역 중인 에드먼드 하우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조작된 증거들로 그가 유죄를 받게 만든 보안관 로이 캘러웨이는 트레이시에게 경고를 한다.

그 사건을 잊으라고.

 

사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의심스러웠던 사람이 있었다.

그자를 어떤 식으로 잡아내느냐가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이자 최고의 반전이라고 생각했다.

로버트 두고니는 독자의 그 생각을 완전하게 비켜갔다.

예상치 못한 반전 앞에서 허를 찔린 기분이 즐겁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말이지!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가 사랑받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일 년에 한 편씩 벌써 8편을 내놓았다니 로버트 두고니의 성실함도 알아주어야겠다.






"이봐, 댄. 트레이시가 자네 친구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걔는 지난 20년 동안 혼자만의 전쟁을 치러왔어. 당시에는 나를 이용하려 했고, 지금은 자네를 이용하고 있지.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네. 그 때문에 걔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미쳐버렸지. 그리고 이제 자네를 자신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그만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나?"

 

 

고향은 세라의 이야기가 되살아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잊고 싶어 했고, 트레이시가 그들처럼 잊고 그곳을 떠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트레이시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에드워드 대신 진범을 원했다.

도대체 그들이 감추는 것은 무엇일까?

 

트레이시는 어린 시절 친구이자 동창인 댄을 세라의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변호사인 댄을 통해 에드먼드의 무죄를 증명하고 진범 찾기에 나서고 동생을 죽인 범인을 풀어 주려는 강력계 형사라는 타이틀로 신문과 방송은 떠들썩하다.

 

그날 저녁에 내가 세라를 집에 데려다줬어야 해, 댄. 걔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했다고.

 

 

기나긴 죄책감.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고, 그녀를 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아온 세월이 20년이었다.

형사가 되었어도 세라를 찾지 못했던 트레이시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사건 이후로 동네의 신망을 얻고 있었던 아버지는 무너져 내렸고, 엄마도 병을 얻었다.

트레이시는 증거들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 악몽이 다시 되풀이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증거를 꾸며내고, 희생자를 만들어 진짜 범인을 은폐하는 걸까?

 

열심히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범인을 추리며 이야기를 읽어 가다가 나도 모르게 헉~ 하게 되는 이야기다.

 

세라의 실종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사그라 들었던 시더 그로브는 세라의 발견과 더불어 다시 각광받는 도시가 되었다.

과거의 망령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은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안정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이시 시리즈의 첫 발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극복해 내는 트레이시의 고집을 보여준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집과 끈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 모든 사람들의 짐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저는 괜찮을 거예요."

 

트레이시의 특성이 앞으로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될 범죄를 어떻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파헤칠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로 인해 트레이시의 일에 있어서 마주하게 될 범죄의 이야기가 기다려지고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된 트레이시와 댄이 그들의 여정을 어디까지 함께 할지도 기대된다.

 

제2의 존 그리샴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로버트 두고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구조와 긴장감 넘치는 반전을 갖춘 법정 장면.

이야기를 제대로 꼬아서 반격할 줄 아는 필력.

왜 우리가 이제야 그를 만나는지 모르겠다!

형사 트레이시 시리즈를 계속 만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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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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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내게 거짓말을 시켰다.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흡인력을 가졌다.

한국인 이민자가 운영하는 고압산소 치료 시설이 폭발하고 자폐아 아이 헨리와 보호자 킷이 사망한다.

불임 때문에 그들과 함께 치료를 받던 의사는 손가락을 잃었고, 그 시설을 운영한 박은 사람들을 구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됐고, 박의 딸 메리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사망한 헨리의 엄마 엘리자베스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미라클 크리크는 이미 범인이 지정되고 그를 둘러싼 재판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매 챕터마다 각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 챕터마다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라고 생각하며 읽어나가다가 이 이야기에서 범인을 찾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범죄소설도, 스릴러도 아니니까...

 

영웅에서 살인자로 바뀌는 데 불과 한 시간,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박유는 아내와 딸을 미국에 보내고 4년을 기러기 아빠로 살았다.

미국에 건너와 지인의 도움으로 이 고압산소 치료 시설을 꾸렸고,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곧 자리를 잡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이제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환자들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재판 시작 이틀 만에 그도 주요 용의자가 되었다.

그날 그는 왜 자신의 자리를 비웠을까?

 

 

특수아동을 키우는 건 단순히 삶이 변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 자체가 바뀔 뿐만 아니라 중력의 축이 변경된 평행 우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다른 이들의 평범한 삶도 무너뜨려서 자신의 짐을 나누고 덜 외로워지고 싶었다.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 테리사, 엘리자베스, 킷.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을 잊고 아이의 삶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면 질타를 받아야 할까?

엘리자베스와 킷은 자폐아를 키우는 엄마들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누구의 아이가 더 심한지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곧 '내가 더 힘들어'라는 무언의 경쟁이었다.

테리사는 예쁘게 잘 자라던 딸 로사가 하루아침에 뇌성마비가 되자 로사에게 올인한다.

단 한시도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엄마들.

그들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법을 찾아 이곳을 찾았다.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의 고통이 테리사, 엘리자베스를 통해 절실하게 전해진다.

게다가 그들은 비과학적 자폐 치료는 아동학대라는 시위대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이민자들

 

박유 : 딸을 위해 이민을 선택했지만 말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세상에서 가정을 이끈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영어에 능숙해지는 아이와는 달리 어눌하고 자신감 없는 말투로 영어를 써야 하는 가장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들기만 한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켜야만 했다.

 

메리 : 아빠는 4년 동안 엄마와 나를 버려뒀다.

아빠가 없는 내내 엄마는 가게 주인에게 속아 노예처럼 부려지고 나는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미라클 크리크에서 그를 만났다.

 

영 : 남편이 나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남편도 딸도 모두 낯설어졌다.

그리고 나는 남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

 

맷 : 내게 동양인 패티시가 있었나?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여자랑 결혼했고, 또 다른 한국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그날 사고가 나서 손가락 없는 의사가 되었다.

 

재닌 : 남편의 불륜녀를 찾았다.

그녀를 만났던 날 그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내던진 담배와 성냥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방화, 살인사건, 불륜,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 이민자 가정.

키워드만 봐도 범죄소설의 가치를 증명할 거 같다.

그리고 4번의 법정신은 매번 반전을 선사한다.

각자 인물들의 시점으로 사건을 보기에 독자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화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을 알기에 그들의 행동도 이해된다.

그렇게 반전과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접하고 나면 그저 담담하게 슬프다.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변수들이 불러온 참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거짓말이 불러온 고통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불러온 실수였다.

 

"우리 모두 변명거리는 있어.

......

지난 일 년간 우린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관이 있고 없는지 우리 멋대로 결정했어. 그러니까 우리 책임이야."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앤지 김의 데뷔작이다.

누군가의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노련하다.

전직 변호사였던 작가답게 법정신은 매번 반전을 거듭했고, 나비효과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본인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말, 행동,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캐릭터도 버리지 않고 서사를 들려주어 모든 인물들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들 보다 더 이 이야기가 좋은 이유는 '책임'지는 법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벌인 일이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켰을 때.

고의가 아니라 순간의 실수였거나, 순간의 충동이었거나, 순간의 잘못된 생각이었더라는 이유만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도와 법망을 우습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소설이라면 더욱 그것들이 활개를 치는 전개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런 '기적'은 없다.

 

그 어떠한 "고의" 와 "계획"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고통을 당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미라클 크리크"에 기적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조마조마하게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던 마음이 평온해진 이유는 한때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이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묻히지 않고 세상으로 걸어 나와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미라클 크리크.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

기적이 없는 기적.

미라클 크리크.

오래 잔향이 남을 이야기였다.


 

이 비극의 가장 극적이면서 얄궂은 부분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날 일어난 일 전부가 그저 좋은 사람의 단 한 번의 실수가 초래한 예기치 못한 결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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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재 열전 -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인문적 세계를 설계한 개혁가들
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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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천재들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운명과 가난으로 인하여 대부분 가시밭길의 연속인 삶을 살다가 갔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는 매월당 김시습.

세종이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했지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광인 행세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관직에는 오르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방랑했다.

김시습 하면 <금오신화>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는 이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추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고도 뜻을 펼치며 살지 못했다.

아마도 시대를 앞선 생각들이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절을 못 만났기에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당쟁사상 첫 번째 역옥인 기축옥사를 조종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은 3백여 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이었다.

 

 

시로서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정철은 정치에 있어서는 세상에 길이 남을 오점을 남겼다.

솔직해서 적도 많았던 정철. 시에서는 솔직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정치적 인생은 과연 솔직했을까?

그를 칭찬했던 선조마저 "정철에 대해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까 염려된다." 라고 말했으니 그는 정치에서만은 천재적이지 않았나 보다.

 

그는 사람 하나를 쓰는 데도 반드시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을 구해서 쓰고자 했고, 올바른 사람은 구하게 되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밤낮으로 생각하고, 혹 촛불을 돋우고 차기를 살피다가 날이 밝으면 입계하곤 했다. 그러므로 이산해의 수하에 있던 관원들이 감히 그 자제들을 위해 벼슬자리를 청탁하지 못하고, 친구들도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올곧았던 이산해.

이산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을 구해서 쓰고자 했던 천재 이산해.

동인의 영수였지만 기축옥사 때에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을 만큼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 이산해.

허나 임진왜란 때 탄핵 받고 파면되었다.

 

"내가 음식을 만들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내 정성을 다하는 것은 조금도 몸이 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손수 제사 음식을 장만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은 미래에 있는 거 같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 아니던가!

 

이 천재들 가운데 홍일점인 허난설헌.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던 천재 시인.

허씨 가문의 자유로움 속에서 차별받지 않고 공부했던 그녀는 시집을 가서부터 외롭게 살았다.

며느리의 학식이 불편했던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자시보다 똑똑한 부인이 부담스러웠던 남편이 밖으로만 돌고 그래서 부부 금실이 좋지 않다고 세간에 알려진 불행을 넘어서 아이들마저 차례로 잃은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연꽃 서른아홉 송이가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 구나

.....................

허균은 누이가 지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시를 짓고서 이듬해에 신선 되어 올라갔구나.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짐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꿈에서 본 장면을 적은 이 시에 나온 숫자가 공교롭게도 삶을 다한 나이와 같으니

그 심오함은 알아낼 수가 없다.

 

허나 후대에 허난설헌의 시들이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허균 때문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문집을 지을 때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의 아름다운 시구나 시편 중에 사람들이 드물게 보는 것을 채집하여 첨입시켜서 허난설헌의 성세를 떠벌렸으니 그것으로 인해 표절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누이를 찬양하기 위해 한 일들이 결국 누가 되는 일이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허난설헌이 가풍이 비슷한 집안과 혼인을 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얼마 전 읽었던 책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에 조선 후기 영수합 서씨 부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들의 후원아래서 수학을 열심히 연구했고, 남편과 아들이 그녀가 지은 시들을 그들의 문집에 부록으로 발행하였다.

그래서 영수합 서씨는 비록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지은 시들은 남아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허난설헌도 그런 남편을 만났더라면 더 많은 아름다운 시들과 문장들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빨리 생을 달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

 

신경준은 그 당시 사대부들과는 달리 기예와 기술을 매우 중시한 실속파였다고 한다.

<훈민정음운해>를 지었고, 우리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서 <산수고>를 탄생시켰다.

 

 


 

 

조선을 지킨 마지막 천재 황현.

 

빼어난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알린 황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살아간 시대는 풍전등화의 시대였다.

조선 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는 글로써 시대를 세세히 기록했다.

직접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서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향에서 신문과 관보를 통해 나라의 상황을 관찰하여 <오하기문>과 <매천야록>을 남겼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글이 아니라 신문과 관보를 통한 정보만으로 쓴 글들이라서 어쩌면 미덥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쏠리지 않았을 거라 짐작해 본다.

 

이 아홉 분의 천재들 중에 21세기로 소환하면 좋을 천재는 누구일까?

나는 이산해를 소환하고 싶다.

그의 천재성은 시대를 앞섰다는 것이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에서도 적과 아군 모두의 존경을 받았고, 그 시대에 직접 요리를 해서 제사를 올렸다는 신박함이 그의 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정치와 상관없이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 하나 잘못 써서 모든 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언제까지고 되풀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알았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각을 보게 되었고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어 새로운 지식을 충전하게 된 조선 천재 열전.

현시대의 천재들도 덩달아 궁금해져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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