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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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내게 거짓말을 시켰다.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엄청난 흡인력을 가졌다.

한국인 이민자가 운영하는 고압산소 치료 시설이 폭발하고 자폐아 아이 헨리와 보호자 킷이 사망한다.

불임 때문에 그들과 함께 치료를 받던 의사는 손가락을 잃었고, 그 시설을 운영한 박은 사람들을 구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됐고, 박의 딸 메리는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 없었던 사망한 헨리의 엄마 엘리자베스가 범인으로 지목되고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미라클 크리크는 이미 범인이 지정되고 그를 둘러싼 재판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매 챕터마다 각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매 챕터마다 새로운 용의자가 나타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라고 생각하며 읽어나가다가 이 이야기에서 범인을 찾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범죄소설도, 스릴러도 아니니까...

 

영웅에서 살인자로 바뀌는 데 불과 한 시간,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박유는 아내와 딸을 미국에 보내고 4년을 기러기 아빠로 살았다.

미국에 건너와 지인의 도움으로 이 고압산소 치료 시설을 꾸렸고,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곧 자리를 잡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이제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환자들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재판 시작 이틀 만에 그도 주요 용의자가 되었다.

그날 그는 왜 자신의 자리를 비웠을까?

 

 

특수아동을 키우는 건 단순히 삶이 변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 자체가 바뀔 뿐만 아니라 중력의 축이 변경된 평행 우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다른 이들의 평범한 삶도 무너뜨려서 자신의 짐을 나누고 덜 외로워지고 싶었다.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 테리사, 엘리자베스, 킷.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을 잊고 아이의 삶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면 질타를 받아야 할까?

엘리자베스와 킷은 자폐아를 키우는 엄마들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누구의 아이가 더 심한지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곧 '내가 더 힘들어'라는 무언의 경쟁이었다.

테리사는 예쁘게 잘 자라던 딸 로사가 하루아침에 뇌성마비가 되자 로사에게 올인한다.

단 한시도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엄마들.

그들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법을 찾아 이곳을 찾았다.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의 고통이 테리사, 엘리자베스를 통해 절실하게 전해진다.

게다가 그들은 비과학적 자폐 치료는 아동학대라는 시위대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이민자들

 

박유 : 딸을 위해 이민을 선택했지만 말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른 세상에서 가정을 이끈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영어에 능숙해지는 아이와는 달리 어눌하고 자신감 없는 말투로 영어를 써야 하는 가장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들기만 한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켜야만 했다.

 

메리 : 아빠는 4년 동안 엄마와 나를 버려뒀다.

아빠가 없는 내내 엄마는 가게 주인에게 속아 노예처럼 부려지고 나는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미라클 크리크에서 그를 만났다.

 

영 : 남편이 나에게 거짓말을 시켰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남편도 딸도 모두 낯설어졌다.

그리고 나는 남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

 

맷 : 내게 동양인 패티시가 있었나?

그건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여자랑 결혼했고, 또 다른 한국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그날 사고가 나서 손가락 없는 의사가 되었다.

 

재닌 : 남편의 불륜녀를 찾았다.

그녀를 만났던 날 그 사건이 벌어졌다.

내가 내던진 담배와 성냥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방화, 살인사건, 불륜, 특수아동을 키우는 엄마들, 이민자 가정.

키워드만 봐도 범죄소설의 가치를 증명할 거 같다.

그리고 4번의 법정신은 매번 반전을 선사한다.

각자 인물들의 시점으로 사건을 보기에 독자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화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을 알기에 그들의 행동도 이해된다.

그렇게 반전과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접하고 나면 그저 담담하게 슬프다.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변수들이 불러온 참사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거짓말이 불러온 고통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불러온 실수였다.

 

"우리 모두 변명거리는 있어.

......

지난 일 년간 우린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상관이 있고 없는지 우리 멋대로 결정했어. 그러니까 우리 책임이야."

 

 

 

이 매력적인 이야기는 앤지 김의 데뷔작이다.

누군가의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노련하다.

전직 변호사였던 작가답게 법정신은 매번 반전을 거듭했고, 나비효과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본인들이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말, 행동,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하나의 캐릭터도 버리지 않고 서사를 들려주어 모든 인물들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들 보다 더 이 이야기가 좋은 이유는 '책임'지는 법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벌인 일이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켰을 때.

고의가 아니라 순간의 실수였거나, 순간의 충동이었거나, 순간의 잘못된 생각이었더라는 이유만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도와 법망을 우습게 만드는 이들이 많다.

소설이라면 더욱 그것들이 활개를 치는 전개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그런 '기적'은 없다.

 

그 어떠한 "고의" 와 "계획"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고통을 당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미라클 크리크"에 기적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조마조마하게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던 마음이 평온해진 이유는 한때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이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진실이 묻히지 않고 세상으로 걸어 나와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미라클 크리크.

올해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

기적이 없는 기적.

미라클 크리크.

오래 잔향이 남을 이야기였다.


 

이 비극의 가장 극적이면서 얄궂은 부분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날 일어난 일 전부가 그저 좋은 사람의 단 한 번의 실수가 초래한 예기치 못한 결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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