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재 열전 -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인문적 세계를 설계한 개혁가들
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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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천재들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운명과 가난으로 인하여 대부분 가시밭길의 연속인 삶을 살다가 갔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는 매월당 김시습.

세종이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했지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광인 행세를 하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나 관직에는 오르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방랑했다.

김시습 하면 <금오신화>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는 이 금오신화를 석실에 감추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후세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고도 뜻을 펼치며 살지 못했다.

아마도 시대를 앞선 생각들이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시절을 못 만났기에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당쟁사상 첫 번째 역옥인 기축옥사를 조종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은 3백여 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당쟁 시대를 열었던 장본인이었다.

 

 

시로서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정철은 정치에 있어서는 세상에 길이 남을 오점을 남겼다.

솔직해서 적도 많았던 정철. 시에서는 솔직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정치적 인생은 과연 솔직했을까?

그를 칭찬했던 선조마저 "정철에 대해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까 염려된다." 라고 말했으니 그는 정치에서만은 천재적이지 않았나 보다.

 

그는 사람 하나를 쓰는 데도 반드시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을 구해서 쓰고자 했고, 올바른 사람은 구하게 되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밤낮으로 생각하고, 혹 촛불을 돋우고 차기를 살피다가 날이 밝으면 입계하곤 했다. 그러므로 이산해의 수하에 있던 관원들이 감히 그 자제들을 위해 벼슬자리를 청탁하지 못하고, 친구들도 감히 사사로운 부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올곧았던 이산해.

이산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마땅한 사람을 구해서 쓰고자 했던 천재 이산해.

동인의 영수였지만 기축옥사 때에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을 만큼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 이산해.

허나 임진왜란 때 탄핵 받고 파면되었다.

 

"내가 음식을 만들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내 정성을 다하는 것은 조금도 몸이 상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손수 제사 음식을 장만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은 미래에 있는 거 같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 아니던가!

 

이 천재들 가운데 홍일점인 허난설헌.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던 천재 시인.

허씨 가문의 자유로움 속에서 차별받지 않고 공부했던 그녀는 시집을 가서부터 외롭게 살았다.

며느리의 학식이 불편했던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자시보다 똑똑한 부인이 부담스러웠던 남편이 밖으로만 돌고 그래서 부부 금실이 좋지 않다고 세간에 알려진 불행을 넘어서 아이들마저 차례로 잃은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연꽃 서른아홉 송이가

서리같이 싸늘한 달빛 아래 지는 구나

.....................

허균은 누이가 지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시를 짓고서 이듬해에 신선 되어 올라갔구나. 3에 9를 곱하면 27로서 누님 나이와 같으니, 인사에 있어 미리 정해진 운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짐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꿈에서 본 장면을 적은 이 시에 나온 숫자가 공교롭게도 삶을 다한 나이와 같으니

그 심오함은 알아낼 수가 없다.

 

허나 후대에 허난설헌의 시들이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허균 때문이라니 아이러니하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문집을 지을 때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의 아름다운 시구나 시편 중에 사람들이 드물게 보는 것을 채집하여 첨입시켜서 허난설헌의 성세를 떠벌렸으니 그것으로 인해 표절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누이를 찬양하기 위해 한 일들이 결국 누가 되는 일이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허난설헌이 가풍이 비슷한 집안과 혼인을 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얼마 전 읽었던 책 <우리가 수학을 사랑한 이유>에 조선 후기 영수합 서씨 부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들의 후원아래서 수학을 열심히 연구했고, 남편과 아들이 그녀가 지은 시들을 그들의 문집에 부록으로 발행하였다.

그래서 영수합 서씨는 비록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지은 시들은 남아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허난설헌도 그런 남편을 만났더라면 더 많은 아름다운 시들과 문장들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빨리 생을 달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

 

신경준은 그 당시 사대부들과는 달리 기예와 기술을 매우 중시한 실속파였다고 한다.

<훈민정음운해>를 지었고, 우리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지리서 <산수고>를 탄생시켰다.

 

 


 

 

조선을 지킨 마지막 천재 황현.

 

빼어난 시인이자, 역사가이며, 그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알린 황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살아간 시대는 풍전등화의 시대였다.

조선 말기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는 글로써 시대를 세세히 기록했다.

직접적으로 권력의 자리에 서지 않았지만 자신의 고향에서 신문과 관보를 통해 나라의 상황을 관찰하여 <오하기문>과 <매천야록>을 남겼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글이 아니라 신문과 관보를 통한 정보만으로 쓴 글들이라서 어쩌면 미덥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쏠리지 않았을 거라 짐작해 본다.

 

이 아홉 분의 천재들 중에 21세기로 소환하면 좋을 천재는 누구일까?

나는 이산해를 소환하고 싶다.

그의 천재성은 시대를 앞섰다는 것이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에서도 적과 아군 모두의 존경을 받았고, 그 시대에 직접 요리를 해서 제사를 올렸다는 신박함이 그의 정신을 돋보이게 한다.

지금 이 시대는 정치와 상관없이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 하나 잘못 써서 모든 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언제까지고 되풀이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알았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각을 보게 되었고

몰랐던 인물들을 알게 되어 새로운 지식을 충전하게 된 조선 천재 열전.

현시대의 천재들도 덩달아 궁금해져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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