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Logical Point of View: Nine Logico-Philosophical Essays, Second Revised Edition (Revised) (Paperback, 2, Revised)
Willard Van Orman Quine / Harvard Univ Pr / 198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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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2020년 UCB 봄학기에 가서 선생과 함께 읽은 것들에 대한 짧은 리뷰 글을 영어로 썼던 글을 다시 내가 한글로 번역한 글이다. 한글로 번역할 때 그 뜻을 쉽게 알아먹기 위해 조금 다듬었다.  읽기 자료들의 주제는 후기 분석철학 Post-analytic Philosophy이였다. 


 

            우리가 경험을 하기 전에 아 프리오리적 지식 (선험지식이라 하겠다) 이란 것들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이번 주의 읽기 자료들을 관통한다. 콰인의 경우 그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 사이를 흐트리고 환원주의의 단점을 지적함으로써 선험지식의 가능성을 비판하였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의 독단이 없는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콰인, 20) 하지만 나는 수학처럼 난공불략으로 여겨지는 지식들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순전한 분석명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콰인이 수정에서 자유로운 진술은 없다고 주장할 때 (콰인, 43) 나는 우리가 보기에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학적 지식을 수정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글에는 없는 것이지만 글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예를 들자면, 1+1=2 이라는 수학적 지식을 수정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퓨트넘이 콰인을 반박하는 부분은 나의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데 퓨트넘은 선험지식이 존재함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퓨트넘은 수학조차 수정 가능하다는 콰인의 주장을 요약한 (퓨트넘, 432) 다음, 만약 누군가가 모든 진술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선험지식이라고 주장하는데 (퓨트넘, 435) 그는 이것을 Absolutely Inconsistent Rule (A.I.R) 완벽히 모순된 규칙이라고 부른다. 즉, 퓨트넘은 그 누구도 모든 진술이 참이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진술은 참이면서 거짓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말이고 경험할 필요도 없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퓨트넘의 진술에서 찾은 문제는 이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 관한 것인데, 이 이성이라는 것은 완벽히 모순된 규칙을 선험적으로 부정하도록 만드는 무엇이다. (우리가 이성을 이용해 생각해보면 완벽히 모순된 규칙은 완벽히 모순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퓨트넘을 직접적으로 인용하자면, 그는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완벽히 모순된 규칙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고, 지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퓨트넘, 438) 그의 말이 맞다면, 이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만약 이 온전히 이성적인 사람이 어떤 것은 받아들일 만하고, 어떤 것은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고 지각 있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게임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언어라는 것이 “규칙에 의해 주재되는 행동양식의 공간 (오닐, 14)” 안에서 배워지는 자의적인 문법의 총체라면, 이것이야말로 퓨트넘이 설명하는 이성이라는 말인가? 이런 경우에라면 이성이라는 개념은 선험지식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이성적이고 아닌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언어규칙에 불과하지 않느냐 이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선험지식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라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궁에 있다.

 

Reference:

O'Neill, M. (2001). Explaining 'the hardness of the logical must': Wittgenstein on grammar, arbitrariness and logical necessity.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24(1), 1-29.

Putnam, H. (1979). Analyticity and Apriority: Beyond Wittgenstein and Quine. Midwest Studies In Philosophy, 4(1), 423-441.

Quine, W. (1980).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9 logico-philosophical essays (2d ed., rev. 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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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어제 이 글을 내 공부 일과와 함께 적었었는데 싸그리 다 날아가버려서 다시 적는다. 옛날에 가끔 매일 내가 무슨 공부를 했는지 적곤 했는데 앞으로 열심히 적어보려고 한다. 


1.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을 하려는 정치철학자. 지금 나는 그 목적을 위해 박사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GRE 시험은 그 준비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는데 원체 재미가 없게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2. GRE 공부를 하다가 답답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면 공부를 더 안 할 것 같고 해서 손을 뻗자마자 닿은 책이 Leo Strauss의 What Is Political Philosophy? And Other Studies 였다. 물론 나는 여러 지점에서 레오 스트라우스랑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그가 정치철학의 본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는 많은 공감이 되었다. 이 책은 사실 영국 아재 수업을 위해서 빌린 거였는데, 이 책을 읽는 게 마음에 위안이 되다니, 참 영국 아재의 학식에 내가 빚진 게 많다는 감사함이 든다. 


거두절미하고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더 나음을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나음과 좋음/안 좋음에 대한 추구 자체가 사실 굉장히 고대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본질에 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른 철학 분야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긴 힘들지만 그 어떤 정치철학자라도 자신의 이론을 내놓을 때 그 이론이 "공동체에 더 낫다/ 적어도 그 공동체가 더 나아지는 데 필요한 비판"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 이론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스트라우스의 생각에 나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스트라우스의 의견에서 내가 살풋이 달라지는 것은, 그 때 영국 아재 수업 들을 때도 영국 아재가 이야기했던 것이, 스트라우스가 꼭 고대 그리스로의 회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상징하는 사실상의 "true standard"를 제공해줄 수 있는, 어떤 본질로서의 정치철학을 꾀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라는 그 부분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무엇이 현 상황보다 더 나아진다는 것을 위해서 파악이 필요한 것은 바로 "true standard" 참된 기준이다. 기준자가 없으면 당연히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서 스트라우스와는 의견이 좀 달라진다. 고정된 참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정답이 없다는 말과 똑같지 않다. 정답은 존재한다. 이건 마치 수능 문제를 푸는 것과, GRE 문제를 푸는 것과도 같다. 상황이 있고 이 상황에 기반하고 있는 여러 전제조건들이 있다. 이 컨디션들이 우리의 상황을 특정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몰아주며 비계까지 깔아놓는 순간 우리는 특정 정답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게 영국 아재 같은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들이 꾀하는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생각을 어느 정도 깔면서 내놓고자 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절대적인 것은 없다. 수능 문제도 수능문제위원에 개인이 저항하고 항거할 때 그 내부 논리의 모순성을 발견하면 정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형성시키는 문제들의 조건들도 가변적이기 때문에 그 조건들에 대한 이해도와 그 조건들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개인들의 의지가 맞물려질 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답도 가변적으로 그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어떤 "절대적"인 정답에 대해 약간 고민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답에 다가가는 방식이 크게 나와 다르다고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totality, 혹은 the whole"을 바라보고 조망해야 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며, 또한 political knowledge와 political opinion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부분은 특히 지식인 워너비가 되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새겨 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트라우스 본인이 적은 것처럼, 이 시대는 지식의 내용도 너무나 빨리 바뀌고 (위에 적었던 그 가변성의 속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변성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확보되고 있기 때문에 opinion의견이 Knowledge 지식을 대체한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더 이상 공중파 뉴스, 검찰, 등에 대해 authority 믿을 만한 권위가 없어지고 유튜브 오피니언 리더들, 유튜버들의 입들로 의견이 지식과 혼동이 되기도 하며 지식인지 의견인지 우리가 따질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스트라우스는 과학과 역사가 발전된 현재 이 시대의 지식 모델들을 과감히 비판한다. 그는 정치 과학은 정치 철학과 분명히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 사상사 (역사)의 발전 역시 정치 철학을 대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철저히 정치철학의 영역을 absolute한 것으로, 비역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 즉 어떠한 맥락 속에서 가변적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사의 문제를 계량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이유도 없는 무엇인가로 설정하려고 한다. 정치철학의 위상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노력을 보면 왜 스타라우스 학파가 정치철학에 남아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짧게 읽은 스트라우스 부분이며 더 읽어야 저번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스트라우스의 질문이 나한테 화두를 전해준다는 것이다. 이 글 쓰다 보니 내가 저번에 영국 아재 수업 때 냈던 한쪽보다 더 안 되는 짧은 think piece 글이 기억났다.


3. 


           Strauss claims that political philosophers should pursue the knowledge of the whole situation to understand human beings and politics (17), looking for a better life and a better society for us (10). However, it is questionable if I could say the concept of the whole and common good exists. In this diversified and complex era, there are not many comprehensive factors that combine people, make them go towards the same good goal, and maintain its integrity. In other words, it seems we need to build the communal base of “us” in which people can belong in the sense of unity to find out what would be good for us. Therefore, it is hard to agree with Strauss when he says history and science destroyed political philosophy (18), not because of people losing the necessity of universal good. Instead, history and science are mere tools for people who have lost the universal truths.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자들은 철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체 상황에 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17)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삶을 찾아야 한다고 (10) 주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이며 공통적인 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가 개인적으로 의심스럽다. 다각화되고 복잡한 이 시대에 사람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며 같은 종류의 긍정적인 목표로 이끌어나갈 뿐 아니라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시켜 줄만큼 포괄적인 요소들이 많이 없기 떄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좋을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공통적인 감각을 제공해줄 만한 "우리"라는 공통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스트라우스가 역사와 과학이 정치철학 (18)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통적인 선의 필요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과학은 이미 공통적인 진실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단지 도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As to a reason why people let the concept of universality go away, I could go further by casting a question. When Strauss argues political philosophy should replace opinions with the knowledge of the nature of political things (11), it means there is an answer in the name of fundamental knowledge of politics. In this case, I could not resist myself asking who is qualified to attain this true knowledge. There are no differences between positivists and Strauss to me since both of them sound conformists. He criticizes positivists pretend to be neutral in the name of relativism, while what they are doing is selecting what they prefer based on their benefits, making people become conformists by not thinking of what would be truly good (20). However, it is the same as what the classical political philosophers have been doing by using vague words such as virtue and good, trapped in the formality of idealism. By maintaining a tautological claim such as virtue is good, they have selected what would be the truths. Those truths are attained by certain people who can understand the idealism with rationality, conforming to the virtues of their society. The meaning of truths has been set up for mainly western white male intellectual class who can be educated on the concept of virtue and being a good citizen based on the western education traditions. In light of this perspective, I can see why people are no more looking for virtues, but freedom, not as the classics did (36). It seems the excluded started raising their voices to have the freedom to find out their virtues, not as a given answer by certain people.


왜 사람들이 공통성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도록 냅두게 되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더 논의를 전개시켜 볼 수 있다. 스트라우스가 정치처락이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의견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11) 이 말은 철학에는 근본적인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까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에 나는 누가 이러한 종류의 지식을 과연 가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실증주의자들과 스트라우스 간의 차이는 나에게 명료해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순응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이 들리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는 실증주의자들이 사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연구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좋은지 생각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든다고 (20) 상대주의라는 이름에서 중립적인 척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치 철학자들 역시 이상주의적(관념론적) 형식에 사로잡혀 미덕과 선이라는 모호한 말들을 남발한 것도 실증주의자들이 한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미덕은 좋은 것이라는 뻔한 소리를 계속 함으로써 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선별해왔다. 그러한 진실들은 이상주의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치시키는 종류의 이해를 통해 그 사회의 미덕들에 순응한 사람들에게 계속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진실이 갖고 있는 의미는 보통 흔히 미덕의 개념, 서구적 교육 전통을 기반으로 한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함에 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왔던 서구 백인 남성 지식인층에게 맞춰져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왜 사람들이 고전주의자들이 한 것 (36) 과는 정반대로 미덕이 아닌 자유를 추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배척받은 자들은 특정 부류한테 받은 정답이 아닌, 그들 자신의 미덕을 찾기 위한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헉 ㅋㅋㅋㅋㅋㅋ 3번 내가 쓴 글인데 내가 번역하면서 헉 했다 ㅋㅋㅋㅋ 나 정말 과감하게 썼었구나 ㅋㅋㅋㅋㅋ 그것도 백인 남자인 영국 아재 앞에서 과감하게 백인 남성들이 지들이 "진리"를 독점해왔다고 쓰고 스트라우스한테 니나 잘하지 뭘 남들 까고 있냐 이렇게 글을 썼었네 ㅋㅋㅋㅋㅋ 아... 


그렇지만 뭐 지금 와서 보면 나는 내가 글 잘 썼다고 생각한다. 문법은 어색한 면이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스트라우스한테 못할 말한 건 아니라고 보고. 3번에서 이야기한 스트라우스의 장점은 사실 내가 4번 항목에서 가감하게 스트라우스 단점을 깐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변적인 의미의 진리를 어떻게 convincing하게 성립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며 위에서 아래로 시혜적인 마인드로 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학문은 모르겠으나 정치철학은 현실과 유리 되서는 안 된다고 본다. 특히 내가 하는 종류의 정치철학은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시혜의식에 맞서서 어떻게 하면 "개인"이 "공동체/그룹"이라는 상위 조직에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하지 않고 타협해가며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지점에서 개인들에게 공동체의 이미 정해진 "선/좋음"이 강요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개인들은 어떻게든 그 "선/좋음"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에 아주 적어도 형식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질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선취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5. 결론. 더 열심히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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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써놓았던 글이 워낙 마음에 안 들어서 한글로 많이 고쳤다. 특히 나는 도입부 글을 재미있게 시작하는 재능은 영 없는 것 같다. 아이디어 자체는 좋은데 문법이 너무 비정확해서 영어글은 참 문제가 많았다.


또한 내가 해석한 대로 본문들을 읽어냈기 때문에 어쩌면 나의 오역이 벤야민, 홉스, 데리다의 글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스승 말대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언제나 일정 확률로 오역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자기 주관을 다시 세우는 것만큼 또한 중한 자세가 없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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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권위체가 쓴 가면을 두 손으로 벗기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 general strike 개념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deconstruction 개념을 홉스 비판에 근거하여 따져봄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의 적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권위체 authority (권위체의 정의를 위키피디아에서 치면, Authority is the legitimate power which one person or group possesses and practices over another라고 나온다. 이것을 해석하면, 권위체란 한 사람이나 혹은 그룹이 타인에게 행사하거나 점유하는 식의 적법한 권력이라는 뜻이다. 즉, 나는 이 권위체를 적법성을 주장하며 타인에게 규칙을 지킬 것을 행사하는 정치적 집단 혹은 기관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시작점에서부터 밝히고자 한다)는 법과 규칙을 제정하는 로고스의 힘으로 적법함을 기반에 쌓아올린 이후 정의를 사수한다. 이 매커니즘은 법 없이는 커먼웰스의 부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토마스 홉스의 논리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식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특히 무엇이 먼저 어떻게 나타났는지의 순서를 설명에서 뒤집어 놓음으로써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장 큰 요지 중 하나는, 홉스와는 정반대로, 부정의는 권위체의 기반인 법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커먼웰스에게 가장 먼저 존재하는 정의/부정의를 따지고 사수할 필요성에 대한 그 강렬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에 따른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권위체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합의를 내렸다고 본다. 그렇지만 권위체는 법을 제정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에게 법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권위체에게 힘이 실린 이후부터는 권위체가 직접 무엇이 법이며 무엇이 불법인지를 정하는 프로토콜 양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가치전도 현상 발생이라고 간주하며, 이 중요한 우선순위가 바뀌는 부분을 잘 포착해 낸 것이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라고 본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권위체에게 쏠린 강한 권능이 그가 일전에 신화적 폭력 mythic violence라고 이야기한 시스템적 힘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을 무효화함으로써 폭력적인 것을 폭력적이지 않게 돌리는 비폭력적인 개념으로 등극한다. 비슷하게, 데리다의 해체 개념 역시 원초적인 정의가 로고스(적법성을 부여하는 절차를 생성시키는 원리이며 데리다가 언어에서 문법과 같은 규칙이라고 보는 힘)가 법 이전에 존재한다는 점을 까발린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데리다는 정의란 법칙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사과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가 가리키는 사과와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묶여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다.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몇몇 중요한 단어들부터 정리하고자 한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폭력의 개념부터 정리해놓자. 나는 폭력을 독일어인 ‘Gewalt’로 바라보는 데리다의 지적을 따르려 한다. 이 ‘Gewalt’는 영어로 폭력이라고 번역되는데 물리적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법한 권력, 권위, 공권력”을 이야기한다 (데리다, 6).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의 의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물리적 폭력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권위가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것 역시 단어의 의미에 포괄된다. 내가 이 글에서 중요하게 바라보는 홉스, 벤야민, 데리다 이 셋은 모두 권위체의 적법한 권력  행사 중 하나인 법 제정의 문제에 치중하고, 이것은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반추하게 만든다. 홉스의 경우에 그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을 법 제정을 위해 필요한 총체적 권력에 붙어주었으며 리바이어던의 권력 행사가 적법함을 주장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그러한 법 제정의 폭력성을, 데리다는 법칙으로서 작용하는 언어 권력의 허구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 모두 법과 규칙이라는 이름의 적법성이 자의적 기준을 정하여 분별의식을 창출하고, 무엇이 적법인지 아닌지의 기준을 결정하는 권위체의 강대한 권력을 따져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체는 왜 이러한 종류의 정당화된 권력이 필요한가? 왜 그들은 로고스, 언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법칙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맨 먼저 홉스식의 정의 개념부터 보겠다. 토마스 홉스는 “공통된 힘이 없는 곳에는 법칙도 없다. 법칙이 없는 곳에는 부정의란 개념도 없다” (홉스, 181)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커먼웰스를 조직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개별 상위에 존재하여 개별들을 묶어내는 권위체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따질 때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공통된 힘이 없이는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커먼웰스의 조직 없이는 우리에게 부정의한 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부정의라고 말해줄 커먼웰스가 없어서 모든 행위들이 다 정의롭고 비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사람들은 무엇이 부정의인지를 말해줄 권위체를 찾아야만 부정의를 심판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연 권위체 없이는 부정의도 없는가? 법의 집행만이 부정의의 존재를 보장하고 부정의를 심판하는가? 홉스가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따지기 위해 커먼웰스가 탄생하는 기원을 상정해보자.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할 수단이 없는 폭력적인 상황들 때문에 겁에 질려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힘을 모아 집단적인 힘을 창조한다. 이 순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보존을 선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홉스, 182) 다른 말로 사람들은 상실의 두려움이 있어서 공통적인 힘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범위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그 상실의 공포 중 하나가 바로 부정의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합당한 이유없이 잃었을 때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사람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서 무엇인가를 상실한 경우와는 다르다. 부정의하다는 감정은 우리가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일들을 막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의란 것은 우리가 당연하고, 정당하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며 부정의는 당연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길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부정의와 같은 상실을 피하고 정의를 사수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건설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홉스식의 기원을 따져봐도 발견되는 사실은 권위체 없이도 부정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권위체가 있어야만 처벌할 부정의가 존재한다는 홉스의 생각과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정의는 객관적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의 문제이며 감정의 문제이다. 우리는 논리적 이성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가슴 안의 불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해결하고 정의를 지키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란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반으로 작용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로고스를 이용할 때처럼 이론으로 잘 다듬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자기보존을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순서를 왜곡할 때 나타난다. 내가 앞서 밝힌 것처럼 집단적 권력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부정의를 수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집단적 권력이 정의와 부정의 사이의 구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의 폭력에 대한 비판은 홉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전도시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법 제정은 폭력의 즉각적 현현이 가능할 정도의 권력을 상정한다. 정의란 모든 신성한 목적을 창출하는 길의 법칙이며 모든 신화적 폭력의 기초로 작동하는 힘” (벤야민, 248)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정의 개념을 신화적 폭력의 힘으로 착취하는 권위체를 비판한다. 벤야민이 니오베를 예시로 드는 것에서처럼 권위체의 힘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이는 정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제 사람들은 피하고자 하는 상실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권위체의 권위를 무서워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벤야민이 여기서 신화적 폭력mythic violence과 신성한 폭력divine violence을 구분하는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권위체가 적법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온 왜곡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신화적 폭력으로 규정하는 권위체의 힘이란 자연적이지 못하다. 신성한 폭력은 정반대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온 삶에 걸쳐 존재하는 순수한 힘”이다 (벤야민, 250). 이 힘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들이 감히 정의를 따지지 못한다. 이는 비인간적 영역에 속하여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폭력을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 없게끔 만든다. 왜냐, 이 힘은 우리가 뒤집을 방법따위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권위에 도전한 니오베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하는 것과 같이 피가 난자한 모습을 보여야만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 재해가 신성한 폭력의 예시인 반면 반역은 신화적 폭력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자연 재해의 경우 누구도 비극을 막지 못하고 그들이 땅에 흘린 피는 곧 비에 휩쓸려 사라진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을 받아들인다. 자연은 자신이 죽인 자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삶을 거둔다. 그렇지만 신화적 폭력은 반역자들의 머리를 요구하며 그 머리들을 최대한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의 피는 기억되어야 한다. 신화적 폭력은 그들을 희생시키며 어떠한 자비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벤야민이 “첫번째 (신화적 폭력) 경우는 희생한다; 두번째(신성한 폭력) 경우는 받아들인다” (벤야민, 250)라고 이야기한 것과 상통한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이 의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개념이 신화적 폭력을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화적 폭력의 비정상적 힘이 권위가 형성된 기초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사람들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그들의 피를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이는 기존의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이기에 그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파괴되어야 한다. 벤야민은 총파업이 일시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총파업은 지배질서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총파업은 “국가 권력을 전적으로 파괴” (벤야민, 246)하는, 권위에 대항하는 중점적 저항이 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총파업이 비폭력적이라는 설명이다. 총파업이라는 말 자체가 듣기에도 꽤나 파격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라는 것은 일견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은 권위체가 힘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결과인 폭력의 신화적인 행위들을 뒤집고 무효화시킨다는 점에서 비폭력적이다. 총파업은 권위체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 축적된 폭력의 발생들을 지운다. 폭력을 지운다는 관점에서 총파업은 비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총파업이 신성한 폭력의 다른 형태이면서 동시에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라는 지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신성한 폭력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받아들이고 무화시키는 거대한 힘이며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의 영향력을 0으로 무효화시키지만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지는 큰 힘이기도 하다. 이 아나키스트적 혁명은 모든 신화적 폭력을 없앨 것을 꿈꾸며 법제정의 근원으로 작동하는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에 이별을 선고한다. (벤야민, 246)


         이제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식대로 정의와 법의 관계를 바라봤는지 살펴보겠다. 그의 철학이 프랑스인으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관점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그 난해한 텍스트도 일견 이해가 될 법 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어의 제한을 매일 겪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능력이 남들보다 더 큰 편일지 모른다. 그의 핵심 주장은 곧 언어라는 것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에 강압적이란 것이다. 언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구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영어를 바르게 구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데리다, 4) 만약 누군가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필수로 해야 하는 일은 언어의 법칙을 이해하고 배우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언어의 법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규칙을 준수하고, 잘 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외국어를 쓰는 사람이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인데, 모국어를 쓰는 사람은 그들이 사용해 온 모국어라는 언어가 그들이 새롭게 배워야 하는 두 번째 언어만큼 가상적이며 기능적이었다는 것도 성찰할 수 있다. 우리가 두번째 언어를 배울 때 깨닫는 것은 새로운 언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규칙들을 외우고 익숙해져야만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제2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금만 돌이켜보면 모국어를 배우는 것도 사실은 두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과 원리적으로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어릴 때라서, 모국어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일종의 강요를 받으며 익혔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만약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우리가 해당 공동체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존재할 수 있다고 치손 언어 구사력이 좋지 않으면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여기에서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언어 학습의 이야기가 법칙과 정의 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몽테뉴를 인용하는 것을 참고하면, 언어와 같은 법칙에 기대는 것은 적법한 픽션 (환상) 없이는 정의(혹은 옳음)를 사수하기 위해 작동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 12) 이는 내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부정의와 권위체의 순서 오류라는 이야기와 맥락이 상통한다. 나는 앞에서 부정의가 권위체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부정의의 존재 때문에 권위체가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그대로 언어에 대입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무슨 말을 하기 이전에 마음 속에 어떤 이미지 혹은 감정 혹은 느끼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써야 하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란 말이 빨갛고 둥그런 그 과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그 빨깧고 둥그런 과일을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다. 단지 우리는 법칙을 깔아줌으로써 그 두 가지를 연결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언어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의미를 완벽히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데리다가 설명한 적법한 픽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 안에서 법칙이 제대로 사용될 때만 언어들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환상 말이다. 하지만 언어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권위체와 권위체의 법칙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가 법칙은 해체가능(데리다, 14) 하지만 부정의는 해체가 불가능하다고 (데리다, 15)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정의는 근본적인 요소이며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무엇이다. 감정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법칙은 그렇지 않다. 법칙 이전에는 그 법칙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 마음이 있고나서야 사람들이 법칙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며, 그 필요성이 합의로 도출된 다음에야 강제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권위체의 강제성이란 사람들의 요구에 의존적인 것이지 그 자체로 근원적인 것이기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해체가 권리의 해체가능성 (권위, 적법함 같은)으로부터 정의의 비해체가능성을 구분하는 간격 사이에 발생하는” (데리다, 15) 이유이다. 해체는 권위체 이전에 존재하는 생생한 그 감정이 생겨난 그 다음에 권리가 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그 둘 사이에 껴서 권리 사이에 숨겨진 근원적 감정으로서의 정의를 발굴해낸다는 점에서 바로 정의롭고, 벤야민의 총파업과 같이 비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권위체에 수반되는 강력한 집행력이야말로 정의를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권위체가 관리하는 법칙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분별을 만들어내며 부정의를 처벌한다. 이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권위체가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법칙을 행사하고 생산해내고 있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이는 우리가 정의/부정의가 권위체의 기원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권위체는 정의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부정의의 감정을 사수하기 위해 집합적인 권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법칙과 권위체란 우리로 하여금 자기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정의/부정의의 사수를 요구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로고스는 가장 근본적이며 비해체적인 정의의 감정을 포착할 수 없고, 오로지 이것의 실현을 도울 뿐이다. 그러나 현재 권위체의 권력은 신화적 폭력으로만 작동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을 생산해내는 그 자체로 강대한 힘으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도전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희생시켜 자신의 원래 목적인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벤야민과 데리다의 개념을 사용해서 보면 이렇게 비대해진 권위체를 해체하고 총파업으로써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비폭력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 둘이야말로 권위체의 가식적인 가면이 적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질서를 왜곡하면서 신화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을 알고 그 가면을 찢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권위체의 가면 뒤에는 그 어떤 얼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여백은 우리가 항상 우리 위에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우리를 우리보다 더 큰 힘으로 짓누르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라 믿기 힘들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가면이 찢겨지고 나면 우리는 감정 하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위한 권위체를 만들어냈지 이것에 의해 조종당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당혹감 말이다.


Reference:

Benjamin, Walter, Critique of Violence (The version uploaded on Ilearn)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Derrida, Jacques. 1992.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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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나오는 인용문들은 영어로 써져 있던 것들을 내가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직역보다는 의역했고, 본문들은 다 영어이니 확인시 유의)


개인적으로 디즈니 영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페토 아저씨가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 갇혔을 때였다. 어린 나로서는 그렇게 큰 생물체의 창자에 인간이 들어가 안전하게 낚시도 하고 불도 지피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보면 고래 입으로 들어오는 생선들도 많았고, 어쩌면 그 고래가 크고 강력하니 그 안에 살고 있는 제페토 아저씨도 덩달아 안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고 나니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제페토 아저씨처럼 거대 고래 안에 기생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리바이어던, 성경에 나온 큰 고래, 홉스가 권위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거대 괴물의 이름. 나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거대 괴물을 한나 아렌트, 토마스 홉스, 미셸 푸코의 개념을 사용해 살펴보고자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권위체의 정의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부분에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무엇이 권위체인지 말한 해석을 잠시 빌리려고 한다. 


“권위체는 강요와 같은 외부적 방법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힘이 개입되면 권위체는 실패한다. 그렇다고 권위체가 설득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설득이란 평등을 전제로 하며 논의의 과정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93)

 

아렌트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는 중요한 역사적 원천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아렌트의 해석에 따르면, 대화의 방식 없이 공적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아렌트, 93) 유혈사태를 피하는 것이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권위체를 작동시키는 데 있어서는 강제나 힘이 개입되면 안 된다. 반면, 그렇다고 아렌트가 설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설득은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개인 간의 소통과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아렌트가 해석한 플라톤 식의 권위체란 비폭력적이지만 그렇다고 개인들이 평등하지는 않은 정치 시스템이다. 이는 권위체가 평화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포기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토마스 홉스는 권위체의 성립을 위해서는 일반 대중으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권위체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주장한다. 그게 그가 권위체를 정당화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릴 권리를 포기한다. 이 권리는, 이 한 사람에게, 혹은 이 하나의 의회로, 조건 하에 양도되며, 그렇기에 그대들은 그대들의 권리를 그(권위체)에게 넘기며, 같은 원리로 그의 행동들을 허락하는 바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로 집약된 대중이 탄생한다. 이 집약된 존재가 바로 라틴어로 씨비타스라 불리는 커먼웰스이다.” (홉스, 246)

 

위의 인용은 홉스가 사람이 근엄한 약조를 함으로써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하나의 권위체에 양도하는지 보이는 장면이다. 이 양도 과정으로 권위체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과 함께 커먼웰스로 등극하여 모든 개인에게서 차출되어 집약된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내게 있어 홉스의 이러한 방식은 문제적인데, 사람들이 정말 홉스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맹세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근본적으로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맹세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보통 알고는 있나? 우리는 특정 권위체 (국가나 정부가 이 권위체라는 말과 바뀌어 쓰일 수 있다고 본다)에 기반한 사회들을 선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작위로 태어났고, 이에 속절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현재 사회에 어느 정도 만족한 사람들일지라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지금은 행복할지 몰라도 만약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들도 이 만족스러운 사회를 버리고 다른 사회를 선택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었던 만큼, 대안을 선택하기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의 이론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위와 같은 맹세를 한 적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왜 그가 단순히 개인들이 맹세를 했다는 식의 주장에서 나아가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한 정당화 혹은 명분을 만드는 이유이다. “사람들이 공통된 권력이 없이 살았을 시절에 그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 살았다. 그 시절에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 (홉스, 178) 이 주장은 그의 이론을 받쳐주는 완벽한 디딤돌로,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이 질문에 인간 본성이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라 다스려야 할 질서가 필요하다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나는 홉스의 이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비판하기 이전에 그의 이러한 주장이 왜 유효한지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홉스는 자신의 이론에 맞는 나름의 정당한 이유와 맥락을 갖고 있다. 그의 시대는 권위체로 작동하던 왕정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그는 권위체의 근원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킴으로써 권위체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그의 이론은 왕정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 양측에서 다 환영받지 못했는데, 왕정주의자들은 홉스가 권위체의 권력은 민중에서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왕정 권력의 신비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싫어했고, 의회주의자들은 권위체의 신성불가침적 권력을 강조하는 홉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주장은 교체기라는 혼란한 시기에 권위체의 정체성을 재정립함으로써 양측을 화해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자, 이제, 홉스한테 내가 진정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권위체가 없다면 사람들이 잘 살 수 없다는 홉스의 명분은 정당한가? 그 주장은 참인가? 문제는, 권위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폭력과 재앙 속에 살고 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머나먼 이야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분일초 매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이 폭력을 최대한 줄이고 통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방식으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여 권위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 삶이 권위체가 없는 경우보다 폭력과 전쟁을 덜 발생시키는 구조일까? 우리가 그를 어떻게 알 수 있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만약 사실이라치손,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권위체를 만들 필요가 있나? 아니면, 권위체야말로 폭력을 만들어내는 주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커먼웰스가 정녕 필요한지 아닌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대충 짐작하다시피,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하나 숨겨진 문제가 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이 괴물은 자신의 무기를 아무 맥락 없이 휘두르는 멍청이가 아니다. 외려, 시간의 조류를 따라 헤엄치며 온갖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 영리한 생물은 자신의 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산해낸다.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고 어디 가든 아주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홉스가 고안했던 이론적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까지 넘어온다.

 

미셸 푸코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학자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어떻게 권력이 생산체계를 조직하고, 결과를 생산해내며, 사회 안에서 담론의 내용을 결정하고, 사회 시스템을 작동시키는지를 다룬다. 그의 책 “비정상인”은 진실의 담론이란 “과학적 상태 혹은 과학 기관들에서 검증받은 사람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표현된 담론” (푸코, 6)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권력이 전문성과 과학의 권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맥락 안에서 작동됨을 보인다. 즉, 리바이어던은 변신의 단계에서 홉스식의 커먼웰스라는 껍데기에서 탈피해 푸코식 판관으로 변태한 것이다.

푸코의 지적은 그가 권력체가 가진 힘이 인간을 육체만이 아닌 영혼도 구속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알가론이라는 사람의 사례에서 이를 입증한다. 이 경우에, 소위 정신과 의사들이란 사람들은 다음처럼 증언했다.

 

“그가 범죄자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우리의 관할영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범죄자라고 가정하고, 정말 그 일을 했다는 전제 하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저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푸코, 16, 17)

 

위의 인용은 종교재판관이나 카톨릭 사제들처럼 신의 이름으로 신도들을 판단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단지 요즘에는 과학으로 대체되었을 뿐, 이제 그것들은 국가를 승인하고 다른 종류의 권위체들로 하여금 사람을 진단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려준다. 한때 십자군이 종교가 권위체와 사회 규범의 근원으로 작동하던 시기에 성스러운 해방운동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이제 과학과 이성이 모든 이의 잣대가 된 시대에 폭력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취급된다. 이는 이제 권위체가 홉스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권리를 한곳에 양도받아 머물러있는 식이 아니라 누가 정사잉고 아닌지의 판단의 잣대를 설정해가며 개인들의 윤리를 재고 그 영혼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인다. 즉, 권위체는 누가 폭력적이고 아닌지, 정상인이고 아닌지를 가리는 힘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한마디로, 그것들은 (여기서 ‘법적 진술’을 의미함) 법적 차원의 진실을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특정 진술들의 초법적 성격이라는 진실과 권력의 특정한 효과를 갖는다” (푸코, 11)고 잘 요약한 바 있다. 이 말인즉슨, 푸코가 이야기하는 초법적 성격의 특정 효과는 권력체의 본질을 관통하여 권력체 스스로에게 유리할 진실과 판단들과 잣대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에게 권리와 자유를 양도한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적법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질 능력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때까지 나는 아렌트에 기반해 권위체의 정의를 처음에 살펴본 다음,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이론도 같이 살펴보았다. 그의 이론은 권위체가 개인간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 간 합의를 전제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들에게는 폭력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정할 판관으로서의 권리따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어떤 종류의 행동양식이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지를 권위체의 판단을 통해서만 알 분이다. 리바이어던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립하여 사회 체계 안에 깊숙이 그 또아리를 틀어박은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권위체는 사회양식을 생산하는 능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우리가 권위체를 필요로 하는지조차의 질문에 대한 열쇠도 자기 품 안에 가지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며 폭력과 비정상을 사람들 등 위에 낙인찍으며 폭력의 증거들을 입증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게 우리 소관도 아닌 한 이제 그 증거들이 참인지 아닌지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판단을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는다. 하나는 이 권위체를 유지시켜 권위체가 생산해내는 판결과 설명에 의존을 하든지, 혹은 권위체를 의심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이다. 위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을 우리의 수호자로 모시며 살든지, 혹은 사냥해서 이놈의 뱃속을 갈라 빠져나오든지 말이다.

 

         

Reference:

Arendt, Hannah. 1961.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The Viking Press, Inc.

Foucault, Michel. 2003. Abnormal: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4-1975. 2003. London: Verso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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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번 학기 글을 번역한 것인데 많이 쳐내고 좀 다듬은 것도 있지만 기본 글 방향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스스로 이 글에 대한 비판지점을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다. 선생이 코멘트 달아준 것 중 하나는 내가 너무 홉스가 성악설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홉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것도 그렇고, 논리가 하나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가 홉스식 리바이어던 괴물에서 푸코식 판관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데, 글을 보면 그 두 가지 양식이 같은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즉, 권위체가 가진 홉스식 성격과 푸코식 성격이 어떤 시대에도 항상 작동하느냐 아니면 시대를 따라 진화했느냐- 나는 후자로 봤는데 글을 읽으면 부분적으로 내가 이 두 가지를 동일선상에서 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부분의 내적 동일성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 글을 비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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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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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보다 재미없었다. 그냥 일단 글 자체가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으며 의미망 운운이 여러 사람 책에서 여러 번 봤다고 여겨져서 참신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심플하게 세상은 하나 안에 잡탕처럼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의미망이 계속 서로 중첩되고 연결된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있기 때문에 세계가 여러 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여전히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개인적으로 철학 이야기하면서 영화나 창작물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좀 웃기다고 생각해서, 지젝이 이거 좋아했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갔다. 문학에 대한 인용은 분명 가능하긴 한데, 뭔가 전체적으로 산만하단 느낌도 있었고 결말과 하고자 하는 말이 명시적이지 않아서 크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추가

좀 생각해본 건데, 전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인류 공통이 해결해야 할 자연환경 파괴 문제 같은 것은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내가 재미 없다고 하도 넘겨보긴 했지만, 솔직히 세계가 중첩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의미에 얽여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뻔하면서 굳이 논리로 입증까지 할 문제가 없어 보여 이러니 철학하면 아무 쓸모 없다는 소리 듣나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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