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나오는 인용문들은 영어로 써져 있던 것들을 내가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직역보다는 의역했고, 본문들은 다 영어이니 확인시 유의)


개인적으로 디즈니 영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제페토 아저씨가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 갇혔을 때였다. 어린 나로서는 그렇게 큰 생물체의 창자에 인간이 들어가 안전하게 낚시도 하고 불도 지피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보면 고래 입으로 들어오는 생선들도 많았고, 어쩌면 그 고래가 크고 강력하니 그 안에 살고 있는 제페토 아저씨도 덩달아 안전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나이가 먹고 나니 지금 생각으로는 내가 제페토 아저씨처럼 거대 고래 안에 기생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리바이어던, 성경에 나온 큰 고래, 홉스가 권위체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거대 괴물의 이름. 나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거대 괴물을 한나 아렌트, 토마스 홉스, 미셸 푸코의 개념을 사용해 살펴보고자 한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권위체의 정의부터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부분에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무엇이 권위체인지 말한 해석을 잠시 빌리려고 한다. 


“권위체는 강요와 같은 외부적 방법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힘이 개입되면 권위체는 실패한다. 그렇다고 권위체가 설득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아니다. 설득이란 평등을 전제로 하며 논의의 과정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93)

 

아렌트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는 중요한 역사적 원천을 지적한다. 플라톤은, 아렌트의 해석에 따르면, 대화의 방식 없이 공적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아렌트, 93) 유혈사태를 피하는 것이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에 권위체를 작동시키는 데 있어서는 강제나 힘이 개입되면 안 된다. 반면, 그렇다고 아렌트가 설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설득은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개인 간의 소통과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아렌트가 해석한 플라톤 식의 권위체란 비폭력적이지만 그렇다고 개인들이 평등하지는 않은 정치 시스템이다. 이는 권위체가 평화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포기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토마스 홉스는 권위체의 성립을 위해서는 일반 대중으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권위체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주장한다. 그게 그가 권위체를 정당화시키는 방법이다.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릴 권리를 포기한다. 이 권리는, 이 한 사람에게, 혹은 이 하나의 의회로, 조건 하에 양도되며, 그렇기에 그대들은 그대들의 권리를 그(권위체)에게 넘기며, 같은 원리로 그의 행동들을 허락하는 바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로 집약된 대중이 탄생한다. 이 집약된 존재가 바로 라틴어로 씨비타스라 불리는 커먼웰스이다.” (홉스, 246)

 

위의 인용은 홉스가 사람이 근엄한 약조를 함으로써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하나의 권위체에 양도하는지 보이는 장면이다. 이 양도 과정으로 권위체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과 함께 커먼웰스로 등극하여 모든 개인에게서 차출되어 집약된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내게 있어 홉스의 이러한 방식은 문제적인데, 사람들이 정말 홉스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맹세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근본적으로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맹세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이 보통 알고는 있나? 우리는 특정 권위체 (국가나 정부가 이 권위체라는 말과 바뀌어 쓰일 수 있다고 본다)에 기반한 사회들을 선택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작위로 태어났고, 이에 속절없이 적응해야만 했다. 현재 사회에 어느 정도 만족한 사람들일지라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지금은 행복할지 몰라도 만약 그들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더라면 그들도 이 만족스러운 사회를 버리고 다른 사회를 선택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었던 만큼, 대안을 선택하기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홉스의 이론이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위와 같은 맹세를 한 적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왜 그가 단순히 개인들이 맹세를 했다는 식의 주장에서 나아가 이론을 완성시키기 위한 정당화 혹은 명분을 만드는 이유이다. “사람들이 공통된 권력이 없이 살았을 시절에 그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빠져 살았다. 그 시절에는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투쟁한다.” (홉스, 178) 이 주장은 그의 이론을 받쳐주는 완벽한 디딤돌로,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가 이 질문에 인간 본성이란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라 다스려야 할 질서가 필요하다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나는 홉스의 이론을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비판하기 이전에 그의 이러한 주장이 왜 유효한지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다. 홉스는 자신의 이론에 맞는 나름의 정당한 이유와 맥락을 갖고 있다. 그의 시대는 권위체로 작동하던 왕정이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그는 권위체의 근원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킴으로써 권위체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그의 이론은 왕정주의자들과 의회주의자들 양측에서 다 환영받지 못했는데, 왕정주의자들은 홉스가 권위체의 권력은 민중에서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왕정 권력의 신비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싫어했고, 의회주의자들은 권위체의 신성불가침적 권력을 강조하는 홉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주장은 교체기라는 혼란한 시기에 권위체의 정체성을 재정립함으로써 양측을 화해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자, 이제, 홉스한테 내가 진정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권위체가 없다면 사람들이 잘 살 수 없다는 홉스의 명분은 정당한가? 그 주장은 참인가? 문제는, 권위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폭력과 재앙 속에 살고 있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머나먼 이야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분일초 매 살아가는 나의 삶 속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이 폭력을 최대한 줄이고 통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그리고 필수불가결한 방식으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양도하여 권위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 삶이 권위체가 없는 경우보다 폭력과 전쟁을 덜 발생시키는 구조일까? 우리가 그를 어떻게 알 수 있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만약 사실이라치손,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면서까지 권위체를 만들 필요가 있나? 아니면, 권위체야말로 폭력을 만들어내는 주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커먼웰스가 정녕 필요한지 아닌지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대충 짐작하다시피,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는 하나 숨겨진 문제가 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이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이 괴물은 자신의 무기를 아무 맥락 없이 휘두르는 멍청이가 아니다. 외려, 시간의 조류를 따라 헤엄치며 온갖 변화를 거듭해왔다. 이 영리한 생물은 자신의 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생산해낸다. 제자리에 얌전히 있지 않고 어디 가든 아주 최선을 다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는 홉스가 고안했던 이론적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까지 넘어온다.

 

미셸 푸코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학자이다. 그의 많은 저작들은 어떻게 권력이 생산체계를 조직하고, 결과를 생산해내며, 사회 안에서 담론의 내용을 결정하고, 사회 시스템을 작동시키는지를 다룬다. 그의 책 “비정상인”은 진실의 담론이란 “과학적 상태 혹은 과학 기관들에서 검증받은 사람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표현된 담론” (푸코, 6)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권력이 전문성과 과학의 권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맥락 안에서 작동됨을 보인다. 즉, 리바이어던은 변신의 단계에서 홉스식의 커먼웰스라는 껍데기에서 탈피해 푸코식 판관으로 변태한 것이다.

푸코의 지적은 그가 권력체가 가진 힘이 인간을 육체만이 아닌 영혼도 구속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알가론이라는 사람의 사례에서 이를 입증한다. 이 경우에, 소위 정신과 의사들이란 사람들은 다음처럼 증언했다.

 

“그가 범죄자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우리의 관할영역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범죄자라고 가정하고, 정말 그 일을 했다는 전제 하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저는 그가 어떻게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을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푸코, 16, 17)

 

위의 인용은 종교재판관이나 카톨릭 사제들처럼 신의 이름으로 신도들을 판단하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신이라는 이름이 단지 요즘에는 과학으로 대체되었을 뿐, 이제 그것들은 국가를 승인하고 다른 종류의 권위체들로 하여금 사람을 진단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내려준다. 한때 십자군이 종교가 권위체와 사회 규범의 근원으로 작동하던 시기에 성스러운 해방운동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이제 과학과 이성이 모든 이의 잣대가 된 시대에 폭력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취급된다. 이는 이제 권위체가 홉스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권리를 한곳에 양도받아 머물러있는 식이 아니라 누가 정사잉고 아닌지의 판단의 잣대를 설정해가며 개인들의 윤리를 재고 그 영혼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인다. 즉, 권위체는 누가 폭력적이고 아닌지, 정상인이고 아닌지를 가리는 힘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한마디로, 그것들은 (여기서 ‘법적 진술’을 의미함) 법적 차원의 진실을 생산해내는 과정에서 특정 진술들의 초법적 성격이라는 진실과 권력의 특정한 효과를 갖는다” (푸코, 11)고 잘 요약한 바 있다. 이 말인즉슨, 푸코가 이야기하는 초법적 성격의 특정 효과는 권력체의 본질을 관통하여 권력체 스스로에게 유리할 진실과 판단들과 잣대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에게 권리와 자유를 양도한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적법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따질 능력을 더 이상 지니지 않는다.

 

이때까지 나는 아렌트에 기반해 권위체의 정의를 처음에 살펴본 다음,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이론도 같이 살펴보았다. 그의 이론은 권위체가 개인간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인 간 합의를 전제로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들에게는 폭력이냐 아니냐의 기준을 정할 판관으로서의 권리따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어떤 종류의 행동양식이 폭력적이고 비정상적인지를 권위체의 판단을 통해서만 알 분이다. 리바이어던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립하여 사회 체계 안에 깊숙이 그 또아리를 틀어박은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권위체는 사회양식을 생산하는 능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우리가 권위체를 필요로 하는지조차의 질문에 대한 열쇠도 자기 품 안에 가지고 있다. 리바이어던은 우리에게 권위체가 필요하며 폭력과 비정상을 사람들 등 위에 낙인찍으며 폭력의 증거들을 입증한다. 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게 우리 소관도 아닌 한 이제 그 증거들이 참인지 아닌지도 믿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판단을 믿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남는다. 하나는 이 권위체를 유지시켜 권위체가 생산해내는 판결과 설명에 의존을 하든지, 혹은 권위체를 의심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이다. 위대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을 우리의 수호자로 모시며 살든지, 혹은 사냥해서 이놈의 뱃속을 갈라 빠져나오든지 말이다.

 

         

Reference:

Arendt, Hannah. 1961.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The Viking Press, Inc.

Foucault, Michel. 2003. Abnormal: Lectures at the collège de France, 1974-1975. 2003. London: Verso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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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저번 학기 글을 번역한 것인데 많이 쳐내고 좀 다듬은 것도 있지만 기본 글 방향은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스스로 이 글에 대한 비판지점을 여러 가지 생각해보았다. 선생이 코멘트 달아준 것 중 하나는 내가 너무 홉스가 성악설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홉스가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것도 그렇고, 논리가 하나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가 홉스식 리바이어던 괴물에서 푸코식 판관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데, 글을 보면 그 두 가지 양식이 같은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즉, 권위체가 가진 홉스식 성격과 푸코식 성격이 어떤 시대에도 항상 작동하느냐 아니면 시대를 따라 진화했느냐- 나는 후자로 봤는데 글을 읽으면 부분적으로 내가 이 두 가지를 동일선상에서 같이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부분의 내적 동일성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 글을 비판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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