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써놓았던 글이 워낙 마음에 안 들어서 한글로 많이 고쳤다. 특히 나는 도입부 글을 재미있게 시작하는 재능은 영 없는 것 같다. 아이디어 자체는 좋은데 문법이 너무 비정확해서 영어글은 참 문제가 많았다.


또한 내가 해석한 대로 본문들을 읽어냈기 때문에 어쩌면 나의 오역이 벤야민, 홉스, 데리다의 글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스승 말대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언제나 일정 확률로 오역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자기 주관을 다시 세우는 것만큼 또한 중한 자세가 없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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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권위체가 쓴 가면을 두 손으로 벗기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 general strike 개념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deconstruction 개념을 홉스 비판에 근거하여 따져봄

 

         나는 이 글에서 권위체의 적법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권위체 authority (권위체의 정의를 위키피디아에서 치면, Authority is the legitimate power which one person or group possesses and practices over another라고 나온다. 이것을 해석하면, 권위체란 한 사람이나 혹은 그룹이 타인에게 행사하거나 점유하는 식의 적법한 권력이라는 뜻이다. 즉, 나는 이 권위체를 적법성을 주장하며 타인에게 규칙을 지킬 것을 행사하는 정치적 집단 혹은 기관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시작점에서부터 밝히고자 한다)는 법과 규칙을 제정하는 로고스의 힘으로 적법함을 기반에 쌓아올린 이후 정의를 사수한다. 이 매커니즘은 법 없이는 커먼웰스의 부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토마스 홉스의 논리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식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특히 무엇이 먼저 어떻게 나타났는지의 순서를 설명에서 뒤집어 놓음으로써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장 큰 요지 중 하나는, 홉스와는 정반대로, 부정의는 권위체의 기반인 법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커먼웰스에게 가장 먼저 존재하는 정의/부정의를 따지고 사수할 필요성에 대한 그 강렬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에 따른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권위체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합의를 내렸다고 본다. 그렇지만 권위체는 법을 제정하고 나서부터 사람들에게 법을 따르라고 강요한다. 권위체에게 힘이 실린 이후부터는 권위체가 직접 무엇이 법이며 무엇이 불법인지를 정하는 프로토콜 양식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종의 가치전도 현상 발생이라고 간주하며, 이 중요한 우선순위가 바뀌는 부분을 잘 포착해 낸 것이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이라고 본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권위체에게 쏠린 강한 권능이 그가 일전에 신화적 폭력 mythic violence라고 이야기한 시스템적 힘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을 무효화함으로써 폭력적인 것을 폭력적이지 않게 돌리는 비폭력적인 개념으로 등극한다. 비슷하게, 데리다의 해체 개념 역시 원초적인 정의가 로고스(적법성을 부여하는 절차를 생성시키는 원리이며 데리다가 언어에서 문법과 같은 규칙이라고 보는 힘)가 법 이전에 존재한다는 점을 까발린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데리다는 정의란 법칙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것은 사과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가 가리키는 사과와 사실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묶여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다.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몇몇 중요한 단어들부터 정리하고자 한다. 일단 여기서 말하는 폭력의 개념부터 정리해놓자. 나는 폭력을 독일어인 ‘Gewalt’로 바라보는 데리다의 지적을 따르려 한다. 이 ‘Gewalt’는 영어로 폭력이라고 번역되는데 물리적 폭력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법한 권력, 권위, 공권력”을 이야기한다 (데리다, 6).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의 의미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물리적 폭력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권위가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행사하는 것 역시 단어의 의미에 포괄된다. 내가 이 글에서 중요하게 바라보는 홉스, 벤야민, 데리다 이 셋은 모두 권위체의 적법한 권력  행사 중 하나인 법 제정의 문제에 치중하고, 이것은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반추하게 만든다. 홉스의 경우에 그는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을 법 제정을 위해 필요한 총체적 권력에 붙어주었으며 리바이어던의 권력 행사가 적법함을 주장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벤야민의 경우에는 그러한 법 제정의 폭력성을, 데리다는 법칙으로서 작용하는 언어 권력의 허구성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 모두 법과 규칙이라는 이름의 적법성이 자의적 기준을 정하여 분별의식을 창출하고, 무엇이 적법인지 아닌지의 기준을 결정하는 권위체의 강대한 권력을 따져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권위체는 왜 이러한 종류의 정당화된 권력이 필요한가? 왜 그들은 로고스, 언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법칙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맨 먼저 홉스식의 정의 개념부터 보겠다. 토마스 홉스는 “공통된 힘이 없는 곳에는 법칙도 없다. 법칙이 없는 곳에는 부정의란 개념도 없다” (홉스, 181)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커먼웰스를 조직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개별 상위에 존재하여 개별들을 묶어내는 권위체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를 따질 때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공통된 힘이 없이는 정의 개념을 사수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커먼웰스의 조직 없이는 우리에게 부정의한 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부정의라고 말해줄 커먼웰스가 없어서 모든 행위들이 다 정의롭고 비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사람들은 무엇이 부정의인지를 말해줄 권위체를 찾아야만 부정의를 심판할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과연 권위체 없이는 부정의도 없는가? 법의 집행만이 부정의의 존재를 보장하고 부정의를 심판하는가? 홉스가 주장하는 것의 옳음을 따지기 위해 커먼웰스가 탄생하는 기원을 상정해보자.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할 수단이 없는 폭력적인 상황들 때문에 겁에 질려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힘을 모아 집단적인 힘을 창조한다. 이 순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보존을 선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홉스, 182) 다른 말로 사람들은 상실의 두려움이 있어서 공통적인 힘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범위는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그 상실의 공포 중 하나가 바로 부정의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합당한 이유없이 잃었을 때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사람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서 무엇인가를 상실한 경우와는 다르다. 부정의하다는 감정은 우리가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일들을 막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정의란 것은 우리가 당연하고, 정당하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며 부정의는 당연하지 않고, 정당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길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부정의와 같은 상실을 피하고 정의를 사수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건설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렇게 홉스식의 기원을 따져봐도 발견되는 사실은 권위체 없이도 부정의는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는 권위체가 있어야만 처벌할 부정의가 존재한다는 홉스의 생각과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부정의는 객관적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의 문제이며 감정의 문제이다. 우리는 논리적 이성으로 이것을 설명할 수 없다. 가슴 안의 불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해결하고 정의를 지키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란 사회적 연대를 위해 기반으로 작용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로고스를 이용할 때처럼 이론으로 잘 다듬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자기보존을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순서를 왜곡할 때 나타난다. 내가 앞서 밝힌 것처럼 집단적 권력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부정의를 수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와 같은 사람들은 집단적 권력이 정의와 부정의 사이의 구별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의 폭력에 대한 비판은 홉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 순서를 전도시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법 제정은 폭력의 즉각적 현현이 가능할 정도의 권력을 상정한다. 정의란 모든 신성한 목적을 창출하는 길의 법칙이며 모든 신화적 폭력의 기초로 작동하는 힘” (벤야민, 248)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정의 개념을 신화적 폭력의 힘으로 착취하는 권위체를 비판한다. 벤야민이 니오베를 예시로 드는 것에서처럼 권위체의 힘은 자기 존재를 과시하며 이는 정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제 사람들은 피하고자 하는 상실의 두려움과는 별개로 권위체의 권위를 무서워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벤야민이 여기서 신화적 폭력mythic violence과 신성한 폭력divine violence을 구분하는 지점이 중요한 이유는 권위체가 적법성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온 왜곡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신화적 폭력으로 규정하는 권위체의 힘이란 자연적이지 못하다. 신성한 폭력은 정반대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온 삶에 걸쳐 존재하는 순수한 힘”이다 (벤야민, 250). 이 힘은 너무나 거대하여 사람들이 감히 정의를 따지지 못한다. 이는 비인간적 영역에 속하여 우리로 하여금 신성한 폭력을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 없게끔 만든다. 왜냐, 이 힘은 우리가 뒤집을 방법따위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적 폭력은 눈으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권위에 도전한 니오베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하는 것과 같이 피가 난자한 모습을 보여야만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경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 재해가 신성한 폭력의 예시인 반면 반역은 신화적 폭력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자연 재해의 경우 누구도 비극을 막지 못하고 그들이 땅에 흘린 피는 곧 비에 휩쓸려 사라진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을 받아들인다. 자연은 자신이 죽인 자들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들의 삶을 거둔다. 그렇지만 신화적 폭력은 반역자들의 머리를 요구하며 그 머리들을 최대한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의 피는 기억되어야 한다. 신화적 폭력은 그들을 희생시키며 어떠한 자비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벤야민이 “첫번째 (신화적 폭력) 경우는 희생한다; 두번째(신성한 폭력) 경우는 받아들인다” (벤야민, 250)라고 이야기한 것과 상통한다.


         발터 벤야민의 총파업이 의미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이 개념이 신화적 폭력을 무너뜨리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신화적 폭력의 비정상적 힘이 권위가 형성된 기초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사람들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그들의 피를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이는 기존의 존재이유를 상실한 것이기에 그 모순이 드러남으로써 파괴되어야 한다. 벤야민은 총파업이 일시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이야기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총파업은 지배질서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총파업은 “국가 권력을 전적으로 파괴” (벤야민, 246)하는, 권위에 대항하는 중점적 저항이 되어야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총파업이 비폭력적이라는 설명이다. 총파업이라는 말 자체가 듣기에도 꽤나 파격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라는 것은 일견 납득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은 권위체가 힘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결과인 폭력의 신화적인 행위들을 뒤집고 무효화시킨다는 점에서 비폭력적이다. 총파업은 권위체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 축적된 폭력의 발생들을 지운다. 폭력을 지운다는 관점에서 총파업은 비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총파업이 신성한 폭력의 다른 형태이면서 동시에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라는 지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신성한 폭력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받아들이고 무화시키는 거대한 힘이며 총파업은 신화적 폭력의 영향력을 0으로 무효화시키지만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지는 큰 힘이기도 하다. 이 아나키스트적 혁명은 모든 신화적 폭력을 없앨 것을 꿈꾸며 법제정의 근원으로 작동하는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에 이별을 선고한다. (벤야민, 246)


         이제 데리다가 어떻게 자기 식대로 정의와 법의 관계를 바라봤는지 살펴보겠다. 그의 철학이 프랑스인으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의 관점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그 난해한 텍스트도 일견 이해가 될 법 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어의 제한을 매일 겪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능력이 남들보다 더 큰 편일지 모른다. 그의 핵심 주장은 곧 언어라는 것은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에 강압적이란 것이다. 언어는 올바른 방식으로 구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영어를 바르게 구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영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데리다, 4) 만약 누군가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필수로 해야 하는 일은 언어의 법칙을 이해하고 배우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에 언어의 법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규칙을 준수하고, 잘 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외국어를 쓰는 사람이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인데, 모국어를 쓰는 사람은 그들이 사용해 온 모국어라는 언어가 그들이 새롭게 배워야 하는 두 번째 언어만큼 가상적이며 기능적이었다는 것도 성찰할 수 있다. 우리가 두번째 언어를 배울 때 깨닫는 것은 새로운 언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규칙들을 외우고 익숙해져야만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제2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를 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조금만 돌이켜보면 모국어를 배우는 것도 사실은 두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과 원리적으로 같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어릴 때라서, 모국어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일종의 강요를 받으며 익혔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만약 언어를 습득하지 못하면 우리가 해당 공동체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존재할 수 있다고 치손 언어 구사력이 좋지 않으면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해서는 내가 굳이 여기에서 지면을 할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언어 학습의 이야기가 법칙과 정의 사이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몽테뉴를 인용하는 것을 참고하면, 언어와 같은 법칙에 기대는 것은 적법한 픽션 (환상) 없이는 정의(혹은 옳음)를 사수하기 위해 작동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 12) 이는 내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부정의와 권위체의 순서 오류라는 이야기와 맥락이 상통한다. 나는 앞에서 부정의가 권위체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그 부정의의 존재 때문에 권위체가 성립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그대로 언어에 대입시켜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무슨 말을 하기 이전에 마음 속에 어떤 이미지 혹은 감정 혹은 느끼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써야 하는 표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란 말이 빨갛고 둥그런 그 과일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저 그 빨깧고 둥그런 과일을 나타내는 지표에 불과하다. 단지 우리는 법칙을 깔아줌으로써 그 두 가지를 연결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언어의 법칙을 준수함으로써 의미를 완벽히 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데리다가 설명한 적법한 픽션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 안에서 법칙이 제대로 사용될 때만 언어들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는 사람들의 환상 말이다. 하지만 언어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권위체와 권위체의 법칙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리다가 법칙은 해체가능(데리다, 14) 하지만 부정의는 해체가 불가능하다고 (데리다, 15)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정의는 근본적인 요소이며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무엇이다. 감정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법칙은 그렇지 않다. 법칙 이전에는 그 법칙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 마음이 있고나서야 사람들이 법칙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며, 그 필요성이 합의로 도출된 다음에야 강제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권위체의 강제성이란 사람들의 요구에 의존적인 것이지 그 자체로 근원적인 것이기 아니라는 것이다. 그게 “해체가 권리의 해체가능성 (권위, 적법함 같은)으로부터 정의의 비해체가능성을 구분하는 간격 사이에 발생하는” (데리다, 15) 이유이다. 해체는 권위체 이전에 존재하는 생생한 그 감정이 생겨난 그 다음에 권리가 제정했음을 보이기 위해 그 둘 사이에 껴서 권리 사이에 숨겨진 근원적 감정으로서의 정의를 발굴해낸다는 점에서 바로 정의롭고, 벤야민의 총파업과 같이 비폭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권위체에 수반되는 강력한 집행력이야말로 정의를 사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권위체가 관리하는 법칙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분별을 만들어내며 부정의를 처벌한다. 이는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권위체가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법칙을 행사하고 생산해내고 있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이는 우리가 정의/부정의가 권위체의 기원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권위체는 정의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의/부정의의 감정을 사수하기 위해 집합적인 권력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법칙과 권위체란 우리로 하여금 자기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정의/부정의의 사수를 요구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로고스는 가장 근본적이며 비해체적인 정의의 감정을 포착할 수 없고, 오로지 이것의 실현을 도울 뿐이다. 그러나 현재 권위체의 권력은 신화적 폭력으로만 작동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을 생산해내는 그 자체로 강대한 힘으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자기에게 도전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희생시켜 자신의 원래 목적인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벤야민과 데리다의 개념을 사용해서 보면 이렇게 비대해진 권위체를 해체하고 총파업으로써 공격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비폭력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정의로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 둘이야말로 권위체의 가식적인 가면이 적법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질서를 왜곡하면서 신화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을 알고 그 가면을 찢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권위체의 가면 뒤에는 그 어떤 얼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여백은 우리가 항상 우리 위에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우리를 우리보다 더 큰 힘으로 짓누르고 있다고 믿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라 믿기 힘들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가면이 찢겨지고 나면 우리는 감정 하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위한 권위체를 만들어냈지 이것에 의해 조종당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당혹감 말이다.


Reference:

Benjamin, Walter, Critique of Violence (The version uploaded on Ilearn)

Hobbes, Thomas. 2009. Leviathan: The Matter, Forme, and Power of a Common-Wealth Ecclesiastical and Civill. Floating Press. 

Derrida, Jacques. 1992.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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