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사실 어제 이 글을 내 공부 일과와 함께 적었었는데 싸그리 다 날아가버려서 다시 적는다. 옛날에 가끔 매일 내가 무슨 공부를 했는지 적곤 했는데 앞으로 열심히 적어보려고 한다. 


1.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어야 민주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을 하려는 정치철학자. 지금 나는 그 목적을 위해 박사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GRE 시험은 그 준비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는데 원체 재미가 없게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2. GRE 공부를 하다가 답답해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면 공부를 더 안 할 것 같고 해서 손을 뻗자마자 닿은 책이 Leo Strauss의 What Is Political Philosophy? And Other Studies 였다. 물론 나는 여러 지점에서 레오 스트라우스랑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그가 정치철학의 본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는 많은 공감이 되었다. 이 책은 사실 영국 아재 수업을 위해서 빌린 거였는데, 이 책을 읽는 게 마음에 위안이 되다니, 참 영국 아재의 학식에 내가 빚진 게 많다는 감사함이 든다. 


거두절미하고 레오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더 나음을 고민하는 학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나음과 좋음/안 좋음에 대한 추구 자체가 사실 굉장히 고대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본질에 가깝기도 하다. 왜냐하면 다른 철학 분야에 대해서 내가 확신하긴 힘들지만 그 어떤 정치철학자라도 자신의 이론을 내놓을 때 그 이론이 "공동체에 더 낫다/ 적어도 그 공동체가 더 나아지는 데 필요한 비판"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 이론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스트라우스의 생각에 나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스트라우스의 의견에서 내가 살풋이 달라지는 것은, 그 때 영국 아재 수업 들을 때도 영국 아재가 이야기했던 것이, 스트라우스가 꼭 고대 그리스로의 회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상징하는 사실상의 "true standard"를 제공해줄 수 있는, 어떤 본질로서의 정치철학을 꾀하고자 한 것이 핵심이라는 그 부분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무엇이 현 상황보다 더 나아진다는 것을 위해서 파악이 필요한 것은 바로 "true standard" 참된 기준이다. 기준자가 없으면 당연히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 부분에서 스트라우스와는 의견이 좀 달라진다. 고정된 참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이 정답이 없다는 말과 똑같지 않다. 정답은 존재한다. 이건 마치 수능 문제를 푸는 것과, GRE 문제를 푸는 것과도 같다. 상황이 있고 이 상황에 기반하고 있는 여러 전제조건들이 있다. 이 컨디션들이 우리의 상황을 특정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몰아주며 비계까지 깔아놓는 순간 우리는 특정 정답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게 영국 아재 같은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들이 꾀하는 종류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해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생각을 어느 정도 깔면서 내놓고자 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절대적인 것은 없다. 수능 문제도 수능문제위원에 개인이 저항하고 항거할 때 그 내부 논리의 모순성을 발견하면 정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형성시키는 문제들의 조건들도 가변적이기 때문에 그 조건들에 대한 이해도와 그 조건들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개인들의 의지가 맞물려질 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정답도 가변적으로 그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어떤 "절대적"인 정답에 대해 약간 고민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답에 다가가는 방식이 크게 나와 다르다고 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totality, 혹은 the whole"을 바라보고 조망해야 하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며, 또한 political knowledge와 political opinion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부분은 특히 지식인 워너비가 되고 싶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새겨 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트라우스 본인이 적은 것처럼, 이 시대는 지식의 내용도 너무나 빨리 바뀌고 (위에 적었던 그 가변성의 속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변성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확보되고 있기 때문에 opinion의견이 Knowledge 지식을 대체한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더 이상 공중파 뉴스, 검찰, 등에 대해 authority 믿을 만한 권위가 없어지고 유튜브 오피니언 리더들, 유튜버들의 입들로 의견이 지식과 혼동이 되기도 하며 지식인지 의견인지 우리가 따질 기준도 존재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스트라우스는 과학과 역사가 발전된 현재 이 시대의 지식 모델들을 과감히 비판한다. 그는 정치 과학은 정치 철학과 분명히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정치 사상사 (역사)의 발전 역시 정치 철학을 대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철저히 정치철학의 영역을 absolute한 것으로, 비역사적이며 비과학적인 것, 즉 어떠한 맥락 속에서 가변적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사의 문제를 계량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이유도 없는 무엇인가로 설정하려고 한다. 정치철학의 위상을 지키려고 하는 그의 노력을 보면 왜 스타라우스 학파가 정치철학에 남아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내가 짧게 읽은 스트라우스 부분이며 더 읽어야 저번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스트라우스의 질문이 나한테 화두를 전해준다는 것이다. 이 글 쓰다 보니 내가 저번에 영국 아재 수업 때 냈던 한쪽보다 더 안 되는 짧은 think piece 글이 기억났다.


3. 


           Strauss claims that political philosophers should pursue the knowledge of the whole situation to understand human beings and politics (17), looking for a better life and a better society for us (10). However, it is questionable if I could say the concept of the whole and common good exists. In this diversified and complex era, there are not many comprehensive factors that combine people, make them go towards the same good goal, and maintain its integrity. In other words, it seems we need to build the communal base of “us” in which people can belong in the sense of unity to find out what would be good for us. Therefore, it is hard to agree with Strauss when he says history and science destroyed political philosophy (18), not because of people losing the necessity of universal good. Instead, history and science are mere tools for people who have lost the universal truths.


스트라우스는 정치철학자들은 철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전체 상황에 관한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17) 우리를 위한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삶을 찾아야 한다고 (10) 주장한다. 하지만 전체적이며 공통적인 선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가 개인적으로 의심스럽다. 다각화되고 복잡한 이 시대에 사람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며 같은 종류의 긍정적인 목표로 이끌어나갈 뿐 아니라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시켜 줄만큼 포괄적인 요소들이 많이 없기 떄문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좋을지 만들어 줄 수 있는 공통적인 감각을 제공해줄 만한 "우리"라는 공통적 토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스트라우스가 역사와 과학이 정치철학 (18)을 파괴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통적인 선의 필요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과학은 이미 공통적인 진실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단지 도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As to a reason why people let the concept of universality go away, I could go further by casting a question. When Strauss argues political philosophy should replace opinions with the knowledge of the nature of political things (11), it means there is an answer in the name of fundamental knowledge of politics. In this case, I could not resist myself asking who is qualified to attain this true knowledge. There are no differences between positivists and Strauss to me since both of them sound conformists. He criticizes positivists pretend to be neutral in the name of relativism, while what they are doing is selecting what they prefer based on their benefits, making people become conformists by not thinking of what would be truly good (20). However, it is the same as what the classical political philosophers have been doing by using vague words such as virtue and good, trapped in the formality of idealism. By maintaining a tautological claim such as virtue is good, they have selected what would be the truths. Those truths are attained by certain people who can understand the idealism with rationality, conforming to the virtues of their society. The meaning of truths has been set up for mainly western white male intellectual class who can be educated on the concept of virtue and being a good citizen based on the western education traditions. In light of this perspective, I can see why people are no more looking for virtues, but freedom, not as the classics did (36). It seems the excluded started raising their voices to have the freedom to find out their virtues, not as a given answer by certain people.


왜 사람들이 공통성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도록 냅두게 되었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더 논의를 전개시켜 볼 수 있다. 스트라우스가 정치처락이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관한 지식을 의견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11) 이 말은 철학에는 근본적인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전제로 까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에 나는 누가 이러한 종류의 지식을 과연 가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실증주의자들과 스트라우스 간의 차이는 나에게 명료해 보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순응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이 들리기 때문이다. 스트라우스는 실증주의자들이 사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연구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짜 좋은지 생각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든다고 (20) 상대주의라는 이름에서 중립적인 척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치 철학자들 역시 이상주의적(관념론적) 형식에 사로잡혀 미덕과 선이라는 모호한 말들을 남발한 것도 실증주의자들이 한 일과 다를 바가 없다. 미덕은 좋은 것이라는 뻔한 소리를 계속 함으로써 그들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선별해왔다. 그러한 진실들은 이상주의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치시키는 종류의 이해를 통해 그 사회의 미덕들에 순응한 사람들에게 계속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진실이 갖고 있는 의미는 보통 흔히 미덕의 개념, 서구적 교육 전통을 기반으로 한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함에 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 왔던 서구 백인 남성 지식인층에게 맞춰져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는 왜 사람들이 고전주의자들이 한 것 (36) 과는 정반대로 미덕이 아닌 자유를 추구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배척받은 자들은 특정 부류한테 받은 정답이 아닌, 그들 자신의 미덕을 찾기 위한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헉 ㅋㅋㅋㅋㅋㅋ 3번 내가 쓴 글인데 내가 번역하면서 헉 했다 ㅋㅋㅋㅋ 나 정말 과감하게 썼었구나 ㅋㅋㅋㅋㅋ 그것도 백인 남자인 영국 아재 앞에서 과감하게 백인 남성들이 지들이 "진리"를 독점해왔다고 쓰고 스트라우스한테 니나 잘하지 뭘 남들 까고 있냐 이렇게 글을 썼었네 ㅋㅋㅋㅋㅋ 아... 


그렇지만 뭐 지금 와서 보면 나는 내가 글 잘 썼다고 생각한다. 문법은 어색한 면이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스트라우스한테 못할 말한 건 아니라고 보고. 3번에서 이야기한 스트라우스의 장점은 사실 내가 4번 항목에서 가감하게 스트라우스 단점을 깐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변적인 의미의 진리를 어떻게 convincing하게 성립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며 위에서 아래로 시혜적인 마인드로 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른 학문은 모르겠으나 정치철학은 현실과 유리 되서는 안 된다고 본다. 특히 내가 하는 종류의 정치철학은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시혜의식에 맞서서 어떻게 하면 "개인"이 "공동체/그룹"이라는 상위 조직에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상실하지 않고 타협해가며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지점에서 개인들에게 공동체의 이미 정해진 "선/좋음"이 강요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민주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개인들은 어떻게든 그 "선/좋음"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에 아주 적어도 형식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실질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선취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5. 결론. 더 열심히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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