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칠레, 최초의 신자유주의 반혁명


p32

그 (하이에크를 말함)의 역할은 경제학 이론가를 넘어 정치적 지도자에 가까웠다.


p32-33

존 래널라프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1970년대 말 보수당 정치 모임에서 한 발언자가 실용주의 노선을 옹호하기 시작하자 대처는 테이블 위에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올려놓으며 참석자들을 향해 '이게 우리가 믿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 그로부터 몇 달 후, (앞에서 언급된 1981년 1월 5일 대처의 하원 발언 이후) 1981년 4월, '하이에크 교수'는 피노체트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엘 메르쿠리오 El Mercurio>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지하다시피, 독재자가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의 완전한 부재 속에서 통치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자유주의를 결여한 민주 정부보다 자유주의적 독재를 선호합니다."


독재자가 자유주의 통치가 가능한 것,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학교 교과서에서부터도 사회 시간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상반되는 가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균형을 이룸으로써 우리 사회가 운영된다는 표현을 배웠던 적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불필요/쓸모없는' 민주주의를 제거하고, 자유주의만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책은 그 다음부터 프랑코주의라든지 아옌데 정권을 언급하며 역사적 맥락을 상당히 인용하는데, 정말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해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나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헉헉대며 내용을 따라가고 그에 대한 의의를 파악하는 데만 집중하였다. 그러나 고맙게도 책은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법을 정리하였는지 소개한다.


p41

그리고 마침내 피노체트의 군사정권은 1978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노동 플랜 The labor plan'이라는 새로운 노동법을 공표한다. 국가, 자본, 노동 간 새로운 관계를 제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 법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매우 엄격한 조건으로 제한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 조직을 최대한 분열시키기 위해 각 직장 내 복수 노조 설립과 노조 간 경쟁을 장려했다. 또한, 1978년부터 1982년까지 '7대 현대화'라고 명명된 개혁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부분적 또는 전면적인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개혁의 범위는 노동법, 연금, 보건, 교육, 사법, 농업과 농지 문제, 지방분권 등을 망라했다. 그리고 그 사이 1980년, 신헌법이 공표되었다. 이 헌법은 정부 정책 노선의 변경을 사전에 차단하는 법적 자물쇠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본문은 칠레 헌법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시작한다. 칠레와 남미 역사, 문화, 정치에 대해 기초적인 수준조차도 지식이 없는 나는 챗지피티 4o를 활용하여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보수적인 독재정권이었다는 사실도 지금에서야 알았다.


p42

군사정권의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스만은 카를 슈미트가 고안한 '제헌 권력 pouvoir constituant' 개념을 동원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실존적으로 주어진 의지에 의해 정초되고 국가의 존재 의의가 명시된 헌법만이 유효하다.


p44

상원은 보통선거로 선출된 26명의 의원과 별도로 여러 국가기관에서 지명한 9명의 의원을 둔다. 그 중 4명은 각 군 사령관이 맡는다. 하이메 구스만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임명된' 의원들을 두는 이유는 "선거로는 국가의 근본적이고 영원한 의지를 철저히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칠레 정치체제에서 보통선거의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자율성이 헌법에 명시되었다. 이런 독립성은 신자유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상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이 새로운 질서를 수정하거나 되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옛날에 능력주의 meritocracy라 하여 일반 보통선거로부터 국가의 기능과 공무원들의 업무를 보장하는 중국의 체제가 떠올랐다. 딱 독재 운용할 때 같은 맥락의 시스템들이 활용되는 것이다. 칠레나 중국이나 상관없이 말이다.


https://blog.aladin.co.kr/wolf974/9691202


p45-46

이 체계의 핵심을 이루는 근본 원칙이 있으니, 바로 보충성의 원칙 principle of susidiarity이다. 이 원칙은 19세기에 고안되고 20세기 코포라티즘(주: 1960년대 유럽에서 정치적 안정과 지속적 경제 성장을 위해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정부, 고용주, 노동자 대표가 참여하는 각종 위원회가 등장하였다. 이런 위원회들의 작동 원리나 이념을 가리켜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에 의해 전용된 가톨릭교회의 사회 교리에서 유래되었다. 이 교리는 개인들을 통합하여 사회집단을 구성하는 자연적 공동체들 사이의 위계를 강조한다. 자연적인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현대 정치에 대항하여, 개인의 의지에서 시작해 사회 내 자연스러운 집단으로 여겨지는 가족, 동업 조합, 지역, 교회, 군대 나아가 국가와 같은 일련의 조직들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칠레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은 보충성의 원칙을 사회를 마비시키는 국가주의를 끝장내고 경제적 자유, 사적 소유, 시장을 지탱하는 근본인 개인의 자유를 방어하는 원칙으로 재해석한다. 그들에 따르면 보호받는 개인들의 영역은 어떤 집단적 주체도 합리적으로 변형시킬 수 업는 문화적 전통들의 비의도적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이러한 생각은 하이에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보충성의 원칙의 장점은 사회질서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와 개인들 간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의 가치를 화해시킨다는 점이다.

... 따라서 국가는 민간 부문이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만 시장의 영역에서 행동을 개시한다. 이런 논리에 의해 기본 서비스가 민영화되고, 기본권(보건, 교육, 주체, 연금 등)이 사적 영역으로 이양되며, 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체계가 가지는 불만이라 함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조직들 혹은 개인들 간의 위계를 비자연적으로 조작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위계가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자연적이라는 말이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한가? 나는 이러한 주장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역사학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인간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a는 a대로 작동했으니 그저 그러려니-하면 끝나는 것이겠지만, 기록이 있다면 a는 b라는 이유로 c로 작동하다가 어느새 다시 d로 작동한 것인데 사람들이 d가 시초부터 유지된 줄 알고 있다-와 같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p51-52

칠레 신자유주의의 특성 중 신자유주의의 근본 논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구축은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국가를 약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의 규율 권력을 창조하고 보강하는 국가기관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국가는 결코 '약한 국가'가 아니라 '행동주의적이고 유능한 국가'이다. 둘째,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시장 법칙에 의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셋째, 경제의 '탈정치화'와 사법의 헌법화가 함께 진행된다. 이러한 결합은 프리드먼을 신자유주의의 창시자로 칭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칠레의 신자유주의 실험에 대한 하이에크의 영향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호세 피녜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호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정치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여기에서 "정치를 폐위시키자"라는 하이에크의 슬로건이 곧바로 연상된다.


방금 인용한 부분은 특히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냐에 관해 고전적인 자유주의 (Laissez Faire)의 자유방임적 가치에 비롯한 작은 정부를 신자유주의 이념과 헷갈려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법하다. 신자유주의는 지향하는 바를 위해 적극 노력하는 극한의 효율 정부를 추구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정부의 사이즈가 작아지기 쉬울 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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