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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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책을 읽는 이유


이 책을 거의 한 3분의 2 내지 읽긴 읽었는데, 하도 중요한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 처음부터 다시 접어두었던 데를 여기다 기록하면서 세세하고 정밀하게 논하고자 한다.


내가 미국에서 석사할 때 신자유주의라는 수업을 할아버지 교수님 학부 심화 수업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할배 교수님 덕분에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일군의 미국 정치이론 political theorist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버클리대학에서 재직했었던 웬디 브라운도 자주 인용되는 바, 신자유주의를 이 세계 사회가 병든 문제라고 지적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있고, 그 첨두에 선 자들이 바로 이 프랑스의 피에르 다르도, 크리스티앙 라발이며, 나는 이 둘의 공저인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된 듯 하지만, 그 책도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열심히 파내는 내용을 다루었다. 그리하여 우연히 이 책이 한국어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보았는데, 영어번역도 아직 안 된 듯 했고, 그리하야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책을 냉큼 구입하게 된 것이다.


(1) 이 책이 중요한 이유; 특히 이 책이 대한민국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점은? 정신병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공격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사회를 자살사회라 명명하고 싶다. 우울증 사회도 좋겠지만, 죽는 것을 긍정하고, 1999년도 아닌데, 세기말적이고, 노스트라무스의 예언이라도 믿는 것처럼 모두 태어나면 불행하고 헬조선이고 지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는 이 사회. 이 사회는 병들었다. 분명히 병들었고, 그것을 지적하고 싶다.


나는 인간-자연세계는 불교의 설명이 가장 옳다고 본다. 최근 법륜스님의 영상 속에서 아주 내 심금을 울린 말이 있었다.


이 몸뚱아리 하나는 천해질래야 천해질 수 없고, 귀해질래야 귀해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난 것 그대로, 날 것 그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일 뿐이다. 그곳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적 혹은 도교적 인간-자연세계의 법리에서 작동하는 대자연의 순리만이 아니라, 인간적 정치-법망사회의 법리에서 작동하는 인간이면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유학, 법가 등등의 인간 질서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존귀하다.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1등이고 존귀한데, 어찌하여 인간이 태어나고 자기 자신을 천하다고 여기는가? 그것 자체가 이미 "정신병"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병"을 조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2. 신자유주의를 이해하자. 대단한 사상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 책을 해부해보자.


이 책의 서론인 "신자유주의 내전의 전략들"을 펼쳐보자.


p24

이 책은 ‘순수한 시장 사회’를 위한 신자유주의의 기획가 그것을 실현하는 전략의 긴밀한 연관을 밝혀내고자 한다. … 신자유주의는 이론, 저서, 저자들의 집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평등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기획으로, 애초부터 정치적 기획자(Entrepreneurs politiques)인 이론가와 저술가들에 의해 수립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명료한 법과 원칙의 틀 속에서 경쟁에 기초한 자유 사회, 사법의 사회를 수립하려는 공동의 정치적 의지에서 발현했다. …. 달리 말해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대체로 ‘집산주의적 collectivste’이라고 간주된 정치적 기획들에 대항한 전략적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목표는 사회에 일련의 표준적인 기능을 부과하는 데 있다. 그중 모든 신자유주의가 첫째로 꼽는 것은 개인-소비자의 주권 보장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집산주의적 주석=집산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유방임 개인주의에 반대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주장하는 이념이다. 1869년 바쿠닌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할 때는 국가권력 없는 협동조합 사회주의를 의미하였으나, 점차 생산수단 국유화, 사회주의적 경제 통제 일반을 의미하게 되었다. 집산화 경향은 사회주의 국가, 뉴딜 정책을 내세운 미국뿐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파시즘 국가 등에서도 두루 관철되었다. 하이에크 등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옹호하려는 의도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나 계획경제 일반을 집산주의와 동일시하였다.))


내가 방금 인용한 부분에서, 이 책의 가장 주요한 목표는, 신자유주의의 지상목표라고 보이는 '순수한 시장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라는 사회주의적 개념에 극심한 알러지 반응을 보인다.


p26

2000년대 초에는 신자유주의가 기업, 기관, 개인,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긴다는, 독특하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기능에 주목하는 해석이 존재했다. 이 해석은 당시의 신자유주의를 무법사회(이른바 '정글의 법칙')에 근접한 초자유주의로 보거나 애덤 스미스의 자연주의로의 회귀, 또는 본래의 '순수한 자본주의'의 복원 등으로 해석하던 오독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시장 질서에 필수적인 법적 기반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자유주의 고유의 개입주의 형식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신자유주의의 급진적인 반민주주의를 과소평가했으며, 신자유주의의 통치 방식이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고, 작은 수정과 승리들, 일련의 실험과 시행착오들을 거쳐 평화적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요컨대 최근 신자유주의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 계보의 해석들은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수단이 되는 폭력을 간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방금 인용한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내가 작업하다 말다 작업하다 말고 있는 아나키스트 라이브러리를 살펴보면,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라고 해서 신자유주의와 아나키즘을 거의 일치시켜서 보다가 가장 메인인 아나키스트(?)들의 철퇴를 맞고 너희는 아나키스트 아니다! 라고 구박받는 세력이 있는데, 신자유주의를 살펴보다 보면 왜 아나코 캐피탈리스트가 자기들을 바득바득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요컨대 자본을 국가든 무엇이든 자신들을 조종하거나 하는 세력 없이, 자유로운 자본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나갈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우파적인 의미로 아나키즘을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가장 크게 발생한 문제, 이 책의 투사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고전 자유주의나 일군의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나 하는 사람들처럼 무언가 단순히 개입없는 보이지 않는 손에서의 순수한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로, 신자유주의는 엄청난 정치적 기반을 창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따위는 치워버리고,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온 몸을 불사른 열정적 투사들이요, 학문적 노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꿈꾸는 그 정치적 기반이 상당히 '반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민주주의적 운영을 꿈꾸는 메이저 아나키스트들이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좁디좁은 아나키즘적 영역에 불과했겠지만, 아나키즘은 차치하고, 신자유주의가 먹어가고 있는 혹은 먹어버리고 포화되어 어쩌면 다른 것으로 진화하고 있을지도 모를 이 사회 안에서, 신자유주의의 씨앗 혹은 진화과정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가치에 불을 지펴버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번 생각해보라. 요새 세상에 민주주의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이 얼마나 팽배해졌는지... 민주주의 사회에 꼭 필요한 관용과 이해가 사라지고 혐오와 공격과 테러로 나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보라... 사회 내부에 적으로 가득 차, 당최 '공통, 공공성'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 사회를 보라... 이것이 정신병이 아니라면 당최 무엇인지?


p27-28

이미 월터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질서자유주의자 알렉산더 뤼스토프는 평등에의 요구를 정면으로 비난했다. 그는 "봉건 영주제가 강요한 인위적인 서열을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위계로 대체하는 대신, 서열의 원칙 자체를 부정하고 그 자리에 평등이라는 잘못된 허위의 이상을 가져다 놓았다"라고 이야기하며, 평등에 대한 요구를 시대의 '병리적 증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벌이는 전쟁은 경쟁을 위한 전쟁인 동시에 평등에 대항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나는 요새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본다. 인스타그램이든 인터넷 커뮤니티이든, 한국인들이 아주 자주 하는 말이 생겼는데, 모두 다 유전자 때문이니 노력은 그른 것이다?라는 소리인 것이다. 저번에 누칼협이라는 신조어를 접하고서도 참 어찌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한국인들과 전세계인들을 정신병으로 몰고간다는 나의 이론이 착착 떨어질까 무서울 정도였는데, 유전자 드립 치는 것을 보면 와-정말 내 이론이 백프로 맞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게 신자유주의적 이론이다. 사람들은 이제 평등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열, 위계,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클래스들과 우월한 클래스들이 있고 그 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행복한 꽃길을 걸어 마지않으나, 아닌 자들은 그대로 글러먹었다-뭐 이런 것이다.


이런 정신병을 갖고 있는데 아기를 낳고 싶을까?


이렇게 보면 신분사회가 사라졌지만, 그 사라진 신분사회에 신분을 어떻게든 우겨서 다시 재창조해서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의 정신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관성인 것이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다른 논리를 적용해서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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