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신자유주의의 대중 혐오


p58

1981년 11월 15일부터 19일까지,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멀지 않은 비냐 델 마르에서 몽펠르랭 협회 지역 학회가 개최되었다. 전 세계 신자유주의 조류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한목소리로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피노체트가 세운 새로운 질서를 칭송했다. 이는 하이에크주의자, 프리드먼주의자, 질서자유주의자,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을 따르는 이들 사이의 근본적인 합의, 즉 민주주의는 자유와 문명에 적대적인 위협이라는 견해에 이들 모두가 동의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p59

몽펠르랭 협회 회원이자 훗날 칠레 중앙은행장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카세레스는 같은 자리에서, 1973년 이후 "우민 선동과 도덕적 타락"으로 귀결될 "무제한적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한순간도 고려한 적 없으며,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근본 권리 위에 공공의 이익 보존을 우선하는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살펴보는 우리도 잘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평등이 인간의 본성과 반한다면, 진짜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무제한적 경쟁, 자연스러운 위계인 것인가?


p61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에는 총체적 국가로 나아갈 위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의 결과나 인민들의 결집이 시장의 법칙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여겨지면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전쟁 이데올로기로서 제시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경계한 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공산주의가 진행되는 역사적 과정만 지켜보면 그들의 경계와 걱정은 많은 부분 맞았다. 소위 일컬어지는 맑시즘이 그 초기에는 자연스러운 역사 속 진행단계로서의 사회주의를 말하였다 하더라도, 결국 그 과정에서 엘리트들, 선두자들이 이끄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도래가 이루어졌고, 급기야 공산당과 같은 일당독재가 발생했다.

이렇듯, 누군가가 이끈다는 것 자체가 전체 안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의 의지와 자유를 말살하고, 하나의 특정한 장소로 우리 전체를 이끈다는 것, 그 자체를 신자유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p61

신자유주의의 모든 조류는 '인민주권의 신화'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기초를 세운 선구자들(루이 루지에, 월터 리프먼,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은 '민주주의에 대한 광신', 즉 여론의 지배 혹은 대중의 어리석음이야말로 자유주의를 위협하는 진정한 위험이며, 인민주권 도그마의 유해한 효과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의 선택과 사적 소유라는 최상위 원칙을 존중하는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만을 인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민주주의'다.


즉, 신자유주의자들은 대놓고 엘리트주의 집단인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만인에게 솔직한 이론가들일 수도 있다. 많은 학자들, 특히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학자들 중 양심불량, 혹은 인지부조화에 놓인 자들이 매우 많아서, 자신들이 철저히 엘리트주의적인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한다는 것에서 그렇다.

그러나 저 플라톤부터 보라. 많은 철학자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 구조부터 살펴보라. 그들이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가? 철저히 교육받은 "시민"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인가? 어쩌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가장 솔직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은 인민을 경멸하고, 우매한 떼법을 경멸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떠한가? 인민인가, 아니면 엘리트인가? 아니면 인민이라 생각하는 엘리트인가, 아니라면 엘리트라 생각하는 인민인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스스로 인민인지 엘리트인지, 엘리트가 되고 싶은 인민인지, 인민 주제에 엘리트도 되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알쏭달쏭하지만, 솔직히 엘리트를 지향하는 건 사실이다.

그런 내가 아나키즘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런 주제"에 아나키즘을 바라는 걸까? 엘리트의 폐해를 너무 직접 겪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엘리트의 혜택을 너무 직접 받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p62

1938년 리프먼 학술대회에서 루이 루지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인민주권 위에 수립된 민주주의의 차이를 완벽하게 요약했다. 그는 후자를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며 '불가피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p64

하이에크에게는 '교환학적 게임(jeu catallactique)'속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시장의 자율적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지적 자유의 축소 혹은 철폐를 용인할 수 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전체주의에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완전한 착오다. 전체주의의 반대는 자유주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지도자를 선택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지 그 지도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68

하이에크는 알려졌다시피 경쟁의 결과와 도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 하나다. 그가 보기에 시장은 도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에게 시장은 어떤 집단적 원리로도 반대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개인을 구속하는 의무적인 집단적 행동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목적 달성을 위해 재능을 펼치는 보호된 영역(그들의 '소유')을 개인들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이러한 흥정과 주권 및 정의의 '미신들'로부터 적극적인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복지국가 행정, 우편 혹은 교통 등 특정 서비스에 대한 국가 독점, 노동조합 같은 '수탈자들', 완전고용 정책 등이 탄성했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같은 지속적인 협박에 굴복한 정치권력은 노예가 되며, 그 역시 탄압을 일삼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주정뱅이가 운전하는 압축 롤러 장비와도 같다."

이러한 일탈은 국가가 선험적으로 최상의 사회질서를 정의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적 환상에서 비롯된다.


방금 인용한 바와 같이, 하이에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특히 나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차용하고자 적극 노력하는 대한민국인들의 정신병에 문제가 있다면, 특히 신자유주의의 기본 논리들과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한민족의 이때까지의 성향이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이에크는 국가에 의존하는 자유 개인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민족은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환상에 젖은 사람들이 많다. 국가의 통치보다는 사회의 자치를 꿈꾸는 나로서도 그와 같은 "국가중심주의"는 상당히 경계가 되는 바다. 하이에크는 이를 오만이라고 정의내리는 듯 하나, 나는 오만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거시 권력에 기생하고자 하는 나약함, 경계하고자 하는 의존성, 큰 누님형님에게 안기고자 하는 소인의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의 민족성 안에 이러한 점이 있다고 비판하는 나의 의견에 이 글을 읽는 이들이 동의할런지, 아니면 반대할런지?


p68-60

질서자유주의자 발 터 오이켄은 ... 그에 따르면, 정신적 공허함이 지배하는 신 없는 세계에서 대중은 자 신들이 전능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능한 총체적 국가에 자신의 구원을 의탁한다. 대중은 만족을 얻을수록 평등의 이름으로 더 많은 요구를 내세우게 되고 국가는 약해진다. 잘못은 대중의 지나친 요구에만 있지 않다. 신자유주의자들은 합리주의에 사로잡혀 사회와 경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통치할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들의 해로운 역할을 지적한다. 그로부터 계획경제, 중앙집권제, 사회주의, 그 모두를 아우르는 '집산주의'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p73-74

모든 신자유주의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대중'으로 이해되는 인민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가? 루지에의 답은 명확하다. 새로운 '귀족'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하며, 대중으로부터 분리된 정치적 권력기관을 세울 수 있는 '통치의 기술'을 점령해야 한다.

(책 내에서 길게 루지에 인용)"통치의 기술은 지혜, 기술, 고귀함을 요구한다. 또한 과거에 대한 지식, 미래에 대한 대비, 가능성에 대한 감각,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에 대한 지식, 책임감, 역량 등이 요구된다. 통치의 기술은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며 엘리트에 의해서만 행사되어야 한다. 통제되지 않은 대중은 이와 정반대다. 대중은 마술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 가능성을 판단하는 감각이 없다. 대중은 지도자들의 배신이나 악의 때문에 자신들이 원하는 기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믿는다. 대중은 무지하고 거만하다. 대중은 스스로를 만능으로 여기며, 기술자와 지식인(intelligenzia)의 자리를 넘본다. 대중은 프랑스혁명 법정이 라부아지에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참으로 흥미롭다. 이토록 21세기의 대한민국, 전세계 사회상을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마치 미래를 읽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문학자, 철학자들 이상으로 점궤 잘 맞추는 점쟁이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 내가 일전에 사람들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우리는 신중세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신분이 사라진 사회에서 평등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월성을 끝없이 찾아나가는 인스타그램을 보라. 인스타그램의 아름다움 속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짓 필터로 환상을 만들어나가며 우월함을 뽐내는 그 행동에, 인스타그램 자체의 죄는 없다. 언제나 기술은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새로운 중세의 신을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육체를 또 한 번 구속시킨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천민화" 시킨다.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 주체들이 "이 불행한 지옥에서 노예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안 한다는 구호를 생각해보라.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이 세계는 신분사회이고, 노예를 나의 대에서 끝이 나야 한다는 그 결연한 구호의 진의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러한 신자유주의 사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만들어진 사회이다. 신자유주의에 크게 기여한 미제스를 인용한 본책의 2장 마무리로 나의 이번 글도 끝낸다.


p76

미제스 역시 이를 인정했으며 제자들에게 이념 전쟁을 독려했다. "대중은 사유하지 않는다. (...) 정신적으로 인류를 지도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들은 우선 자신들이 고안한 생각을 수용하고 이해할 줄 아는 집단에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생각이 대중에게 확산될 것이며, 점차적으로 응축되어 시대의 여론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