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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예전에 그런 상사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일은 남 시키고 이름은 자기 것을 적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결국 고생은 남이 하고 일은 그가 한 셈이 되게 판을 만드는.
나는 학을 뗐고
같이 일하던 후배는 격투기를 하는, 회사에서 가장 건강한 아이인데도 대상포진에 걸렸다.
내가 가장 빡쳐히는 대목은,
그런 인간이 겉만 잘 포장해 인문학 좀 공부하는 척한다는 것이었다.
인문학은 한번도 그런 가치를 가르친 적이 없는데
그 어떤 책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게 내 고민이었다.
그가 주창하는 세계 속에서 자기만 쏙 빠져나와 있는 채로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지?
그때 많이 들은 말은
"회사생활은 그렇게 하는 거야."
였다.
그처럼은 못 해도 거기 감정이입하지 말 것.
그러니까 회사생활은 대충 스리슬쩍하라는 것인가
뱀처럼 혀만 날름대며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에 내가 찌르르한 이유다.
우연히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앙금 같은 게 남아서 계속 맴도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돼버리는 세계
진실이나 알맹이와는 상관 없이
이것은 내것 하는 것만으로 자본이 허락되기도 하는 세계
사인을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중요하지만
때로 가장 공허해지기도 하는 그 세계.
회사란 그런 곳이란다.
자본이 만들어지고
자식을 먹이고 한 가족을 살리는 곳의 진실
이라는 게

가끔 울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내가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있고 바퀴를 굴리고 있고
나는 어찌할 수도 없이 그 안에서 겨우 발맞춰 사는 사람인 것이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그런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조중균이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
인쇄소를 차리고 소설가가 된 나와 만나는 에필로그까지
소설가가 된 나가 면목이 없지요 라고 말하는 대목까지
좋았다.
그래서 작가의 첫 소설집을 찾아 읽고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 을 읽을 때는
오정희 소설가가 잠시 떠올랐고
다른 작품을 읽을 때는 박완서 소설가의 단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닌 듯 품은 서늘함 같은 것 때문이다.
너무 날카롭지 않은
그래서 거북하지 않은
그런 서늘함이 소설에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돈이 벌고 싶었던 걸까 평범해지고 싶었던 걸까
사람들은 돈이 벌고 싶은 걸까 평범해지고 싶은 걸까
평범
평평하고 그저 그런 땅 위를 걷는 일 같은
어마어마한 행복을 바라면서 회사를 다닐 수는 없잖아

틀려먹었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맞는 것은 뭘까
틀려먹었다면
그러니까
인생에는 결말이란 없으니 말이다.
혹은 모든 결말은 모두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는 결말이 될 수가 없다.
부자가 됐다가도 쫄딱 망하고
쫄딱 망했다가도 또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결국 죽을 때까지 결말이라는 것은 나지 않는다.
부자가 되어서 내내 돈이 많아 별 달리 걱정없이 무위도식하다가 죽었습니다.
이 정도면 행복한 결말인가?
최고인가?
이런 최고의 인생을 대부분 못사니까
우리는 계속 살아야지
이렇게 저렇게
옷을 사다가 신불자가 되기도 하고 까페에서 만화를 그리다 그 신불자가 갔던 일본 나라의 사슴 얘기를 훔쳐보기도 하고('당신의 나라에서')
죽은 친구네 집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그 흔적 같은 것들을 계속 사진으로 남겨보기도 하고
신불자가 되어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너의 도큐먼트')
산부인과에 갔다가 몇 번이나 다시 나오기도 하면서
('센티멘털도 하루이틀')
폐허가 된 동네를 떠나야지 하면서도 머무르며('집으로 돌아오는 밤')
다단계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면서 ('아이들')
외국에 어학연수 갔다 만난 우울증 걸린 애랑 연애 아닌 연애도 하면서('차이니스 위스퍼')
어학원에서는 유부남이랑 바람이 나기도 하면서('우리 집에 왜 왔니')
그저 그런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2016. 5. 16.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