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배자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정란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 시간,

죽은 계절, 크리스마스가 오면,

늑대들은 바람으로 연명하며

사람들은 자기 집에 죽치고 들어앉아

추운 계절을 준비하며, 불을 쬐고 있다.

문득, 나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너무나 열렬한 사랑의 감옥을

그만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생겼다.

-프랑수아 비용

 

책 서면에 이 문장들이 써있다. 이 문장들은 의미 이전에 아름답다. 겨울이 오자 문득 생각난 어떤 감정, 그러나 그 감정은 공간 속에서 생성된 것,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것, 갑작스레, 우주가 숨을 내뱉듯, 떠오른 마음. 의미 이전에 아름다운 문장.

그리고 이 문장들은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안개 속 같은, 겨울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소설. 그걸 예고하는 문장.

 

-종이가 만들어진다. 마치 자기 전생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처럼.

 

-사람들은 위대함의 기호에만 매달린다. 기껏해야 위대함의 아주 작은 메아리만을 받아들일 뿐이면서도. 그들은, 넓은 길이 아니라, 정원의 작은 빈터에서 시간의 힘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세련되게 꾸밀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해주고, 또 용서받게 해주는 그런 제스처를 취할 줄 몰랐다.

겉으로 보면, 그는 서투른 사람이었다. 그의 뻣뻣한 태도는 능란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는 우아해지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수줍고 서투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성공하지 못했다.

거인은 별로 말이 없었다. 공작과 함께 있을 때면 똑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는가 하면, 어떤 말은 우물우물 삼켜버리기도 했다. 속임수를 쓸 줄 모르는 마술사처럼.

 

-그는 원인도 끝도 없는, 시간 그 자체 같은 사람이었다.

 

-그 얘기는 모두가 어떻게 좀 설명해보려고 앴는 저 다뉴브 강 위로 부는 바람 같았다.

 

-그들은 그의 침묵을 시샘했다.

 

-여기에는 금속으로 만든 짧은 바지가 놓여 있는가 하면, 저기에는 대리석 가면이 놓여 있었다. 마치 말을 할 줄 아는데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물건들.

 

-건물들의 식물적인 퇴락 때문에 그 매력은 한결 더 그윽하게 느껴졌다.

 

-영원을 생각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종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

 

-두고보렴. 어느날인가 사람들이 널 잊어버릴 테니까. 넌 자유로워질 거야.

 

띄엄띄엄 읽었던 책. 김정란의 평론집 <<연두색 글쓰기>>에 써있는 멋진 평론(알고 보니 역자 후기였다)을 통해 알게 되고 어떤 책인가 궁금해 빌렸었다. 김정란의 평론, 새로운 귀족들이 오고 있다는 말이 기억난다.

세련됨, 이야기의 능수능란함이 아닌, 한 마디씩 조곤조곤 숨을 참고 내뱉는 말들 같은, 문장.

아주 긴 시간을 다루나 그리 길지 않은 책. 에두를 이야기는 에두르고 이야기 대신 그 일이 벌어지는 공간, 아니 공간이 담고 있는 분위기을 털실 풀어내듯 풀어내느 책이다. 춥고, 서늘한, 지하실 같은, 그러나 퇴폐가 침범하지는 않은 그 공간 속, 프랑스의 궁전. 거기 시간의 달인 '거인'의 이야기, 거인 이전의 두 달인과 거인, 거인의 아내와 자식에 관한, 이야기. 또 한 명의 주인공 성의 지배자의 이야기.

남겨지는 것은 그러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서늘함과 허망함, 처절하게 찌르는 게 아니라, 오래 고요한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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