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상 혜원세계문학 3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혜원출판사 / 1992년 10월
평점 :
품절


‘죄와 벌’을 이전에 보다 만 게 2년 쯤 전인 것 같다. 그때 지하철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왠지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문학소녀나 문학처녀쯤으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아주머니들이 유난히 정겹게 말을 걸기도 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을 전부 읽지 못하고 말았다. 뭐 주변 재반 사정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후 결국 학교 과제 때문에 다시 읽게 된 ‘죄와 벌’. 사실 아직까지 ‘죄와 벌’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해도 좋을 일이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아직까지’ 죄와 벌을 안 읽었냐고 타박하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간단히 말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알기 때문이다. 요새 나오는 소설들은 인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들은 판에 박히고 사건들은 논리적이며 우연과 감정은 지나치게 튀어서 보기에 어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모든 인물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소냐라는 인물과 스비드리가이로프, 라스꼴리니코프 등의 인물들을 선과 악으로 유형화시켜 배치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인물 안에 존재하는 숱한 당위성들은 그들은 선인, 악인 이전의 인간으로 보이게끔 한다. 거기에 이 소설의 위대성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스꼴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자백하고 어느 정도의 참회에 이르는 현상이 아니라 그와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 속에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는 라스꼴리니코프의 범죄 과정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단순하게 사람을 죽이자 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전당포 노파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그녀는 이와 같은 존재이므로 죽어 마땅하다는 그 생각을 라스꼴리니코프조차도 수없이 추악함과 현실감과 영웅 의식 속에서 되짚으며 자신이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살인 행위가 더없이 더럽고 추잡한 것인가 하면 때로는 자신의 초인이론에 맞는 실험대이고 때로는 가족 부양 능력조차 없는 자기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로 몇 번이고 전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하나의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여러 잣대에 대고 판단하려 하지만 결코 몽매를 헤치고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는 것 역시 그의 악마성이 이루어낸 결과라기보다는 조금은 운명 같기도 한 실패와 우연이 겹쳐지며 벌어진다. 현상이 동반하는 우연과, 그 우연까지 인간이 짊어지는 인생이라는 것,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쓴 사람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고 그걸 잘 표현해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라스꼴리니코프는 범죄를 저질렀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마치 한 인간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살인 이유를 ‘견딜 수 없음’으로 생각해보았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목적어를 포함하는 동사이다. 무엇을 견딜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스꼴리니코프는 여러 가지 것을 견딜 수 없는 인물이라고 나는 대답하고 싶다. 인간은 참 다양한 성향이 있다. 개중 어떤 사람은 참을성이 넘치고 현실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알거나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표상하고 그 위치를 넘어서기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현실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더 아파하거나 남들보다 더 힘들어하거나 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페째르스부르크라는 도시가 안고 있는 남루함과 비인간성,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그대로 지켜보고 남 일이라고 여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멜라도프라는 남들은 모두 비웃는 인물과 술을 마시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결국 그의 삶 속에서 고통의 징후를 발견하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하는 인물인 것이다. 창녀들과 창녀가 창녀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서글픔을 그는 그대로 두고볼 수 없어 자신이 가난함에도 있는 재산을 모두 그들에게 베풀고 결국 스스로의 연약함을 탓하는 것이다. 물론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의 가난한 처지, 동생의 희생 앞에서 제대로 된 현실적인 해결책은 제시할 수 없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그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냐에게 회개하며 자기를 죽인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이 현실을 가만히 지켜보며 견딜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그래서 그는 초인과 범인을 구별하는 논문을 쓰고 초인이 됨으로써 이 세계의 견딜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을 바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그가 견딜 수 없다는 인식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범인으로 살며 초인을 알지도 상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범죄 이후로 더한 불안 증세를 보이며, 자신의 견딜 수 없음은 범죄에도 똑같이 미침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소설을 읽자 이런 질문이 생긴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이 세계를 살아야 현명한가. 소냐처럼 온갖 자기 희생으로 모든 것을 감내할 것, 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난 아직 생각이 너무도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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