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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레이몬드 카버, 라는 이름은 내게는 참 낯익다. 대부분 그런가. 대부분이 되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레이몬드 카버가 내게는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은 접하는 대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책을 처음 읽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진짜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 정말 망각은 한 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건 좀 끔찍하다. 책을 읽었는지 말았는지 혼돈되는 순간이 오고, 결국 내 손에 모든 것을 쥘 수 없음을 알아채게 되고 마는 것이다.

며칠 전에 읽어서 생생한 그대로의 느낌은 아니다. 그 뒤로 몇 권의 책에 손을 대고 있는 통에, 학교 벤치에 누워서 이 책을 보던,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꽤나 날씨가 좋은 오전 시간이었던지라, 살아있다는 생생함을 아주 오랜만에 얻은 순간이었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떠올리게끔 한다. 어느 집이나 냉장고는 돌아가고 있고,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성에를 제거하거나 냉장고가 고장나서 수리할 때 빼고 냉장고는 쉬임없이 활동 중이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처럼. 그런데 냉장고 소리를 매일 매순간 인식하지는 않는다. 그 소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건, 인기척이 없는 밤 시간, 대부분의 소리들이 휴식을 취하는 무렵 뿐이다. 부우웅, 냉장고 소리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그러다가 잠에 빠져들면 그는 다시 자신만의 외로운 발화행위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발화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몹시 쓸쓸한 일이지만 어찌 보면 쓸쓸할 것도 없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어쩌다 아무 의식도 없이 냉장고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의 기분과도 비슷한, 어떤 밀려드는 감정을 갖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의 잘 짜여진 무엇이 결국 그 틈을 드러내는 순간, 딱 한 단어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그리고 결코 붙잡을 수도 없는, 다시 플레시백해서 볼 수도 없는 그 순간을, 미묘하고 혼돈스러운 그 순간을 묘사한다. 정말 인생은 냉장고보다 더 불쌍한 것도 같다. 냉장고는 잠시 성에라도 제거할 때 쉬지만 우리는 잠시 붙잡아두고 싶은 어느 한 순간도 결코 붙잡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비디오의 장면을 스크랩해서 붙여두고, 다시 보고, 그것을 간직할 수 없다. 잠시도 시간은 또 우리는 우리를 가만두지 못 한다. 절망이 아무리 깊어도 실은 그 순간은 잠깐이다. 단지 기억의 괴롭힘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고통 받고 홀로 느끼고 홀로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숨기려하면 충분히 자신만의 고통을 숨길 수 있는 영원한 타자의 세상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떠나지 못한 채로. 내게 어떤 무서운 일, 이상한 일이 닥쳤다 한들 그것이 나 혼자 있는 순간에 일어난다면 그 일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결국 논리란 인생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여러 단편들 중 첫 번째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과 「블랙 버드 파이」는 그런 의미에서 몹시 인상 깊은 작품들이었다. 이외에도 모든 단편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을 보고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의문의 순간조차 이미 지나버렸다.

결국 좋은 소설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생이 무언지 알려주고 단편이라는 이유로 버스 창밖 풍경처럼 지나가버리는 소설들이다. 이건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평생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쉼없이 흘러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하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니까 내 말은, 언젠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만한 어떤 일이 벌어질 때까지 모든 것을 그냥 덮어놓고 지내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어제의 나, 아니 5분 전의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간주한 채 말하고 행동할 테지만, 정작 나 자신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 中



어쨌거나, 나는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이왕이면 이 말을 당신 수첩에 적어놓는 게 좋을 거예요. 경험을 통해서 그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으니까요.

-「친밀」 中



만약 내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다면, 나는 아내가 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내가 떠나버린 것은 잘 된 일이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영원히 끝장이다. 어느 골목 한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이상, 나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글씨체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물론 그게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편지에 쓰여진 내용이 현실로 나타난 다음이지 않은가.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편지 자체가 아니라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었다. 아니, 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는 누구의 필체인가 하는 문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훨씬 더’라는 말은 아주 미묘한 일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아내를 잃는 것은 역사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 말과 안개처럼,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나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역사가 나를 떠나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제 나는 ‘역사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혹은 역사는 이제 나 없이 굴러갈 거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아내가 나에게 다른 편지를 보내 오거나, 혹은 일기를 쓰는 친구에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지 않는 한, 이러한 의문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누군가 이 시절을 돌아보며 기록과 자료와 장광설과 침묵과 풍자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이란 가련한 인간의 역사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역사에 작별을 고하고 있는 셈이다. 안녕, 내 사랑.

「블랙 버드 파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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