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잡이들의 이야기 보르헤스 전집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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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이불에 기대고 누워서 싱크대를 바라본다.

나와 싱크대 사이의 거리는 도대체 얼마만큼일까.

물론 당장 줄자라도 가져와서 재보면 그 거리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허나 계속 끊임없이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거리의 아득함이랄까, 그런 비슷한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각적인 것과는 판이한 거리감,

동적으로 생활하던 공간은 아주 익숙하지 않은, 외부가 되고

과연 여기가 어디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있으면, 이 사람은 평생 이런 생각만 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평생, 시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고서

요리저리 뒤집어보며,

물론 내가 겨우 알 수 있는 수준에서 본 보르헤스일뿐이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뭘 읽고 났는지 아득하다.

게다가 지금은 밤인데도 너무 더워서 사실 더욱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보르헤스는 이런 더운 날에는 좀 맞지 않는 작가이다.

버스에서 읽을라치면 가슴 속에 육중하게 내려앉는 부담감이란...

지극히 앉아서 읽자면 참 재미있는데, 갑자기 읽을라치면 부담스러운 것도

보르헤스의 세계를 보는 시선이 내게 익숙한 시각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어서인 듯 하다.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읽은 김훈의 '언니의 폐경'과 보르헤스의 단편을 자꾸만 비교해보게 된다.

그 중편 분량의 작품 같은 경우에는, 소멸에 대해 다루고 있음에도

매우 선명하게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해가 질 무렵 점차 사라지는 비행기의 불빛 풍경을 보여주는 식으로

그래서 그 작품은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작품은 좋다고 한 번 연습장에 써보기까지 했으나

그래서 내가 뭘 읽었지 하면 기억이 안난다.

전체와 무, 끝없는 반복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알 수가 없다.

이 낯설음이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하나의 명사로 만들어준 것일까.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의 안에서 끊임없이 맴돈 것일까.

 

그리고 날씨가 정말 덥다.

그래서 더 생각이 잘 안 굴러간다.

 

 

 

 

-한 꿈 속에서 신이 그에게 그의 삶과 노고가 가진 비밀스러운 목적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놀라움 속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누구이자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고통에 대한 위안을 느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잠에서 깨어난 그는 결코 기억할 수도, 흘끗 떠올릴 수조차 없는 어떤 영원한 무엇을 받았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칙은 한 인간의 단순함으로 깨우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옥 1, 32 中

 

 

후회가 계속되고 있는 한 죄 또한 계속되고 있는 거라 해야겠지요.

-비열한 사람 中

 

 

-게다가 어떤 사건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사건의 행위자로서의 위치를 떠나 목격자, 즉 그것을 보고 나서 들려주는, 이제는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과야낄 中

 

 

-미스터리는 우리의 작품이 아닌 우리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선생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과야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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