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John Fowles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출판된 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책을 빌려다 놓고 읽지 않은 적도 있다.
김영하의 에세이에서 본 이 책에 대한 평이 꽤 괜찮아 처음 관심을 가졌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읽어야지 했던 상태였다.
김영하의 평에서 이 책의 주인공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최초의 진보적인 여성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진보적인 여성이란 말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관념, 정결함에 대한, 정직에 대한, 순수에 대한 모든 의무를 지우고 '프랑스 중위의 여자' 사라 우드러프는 찰스를 꼬시기 위해 계략을 짜고 그대로 행동한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지는 건 거의 끝부분에 가서이다. 책은 대부분 찰스를 뒤쫓는 편이기 때문에.
시대는 186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도록 하려고 일부러 다른 남자와 잤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자란 아무래도 김영하의 소설에 등장해도 좋을 법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그리도 매력을 느꼈는지도.
나는 어느 정도 이 소설이 매력적인가 하면 어느 정도 그렇지 않기도 한
알 수 없는 상태랄까... 그렇다
우선 작가의 박식함, 책 뒷편의 설명에서 보자면 프랑스 누보로망 같은 작가의 의견 개입과 소설 형식의 해체 등등은 내가 보기에도 꽤 재밌었고 좋았다.
허나 마지막은 약간 맥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사라 우드러프는 결국 찰스의 애를 낳아 키우고 있으며 그가 결혼하자는 제의를 거부한다. 그에게 돌아갈 것도 거부한다. 단지 그녀는 순간적인 자신의 욕망, 남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싶었을 뿐이라는 태도 정도로...
나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이 여자는 애를 낳아야 하는가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 정도...
어쨌든 책을 너무 더디게 읽었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긴 하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소설가들은 글을 쓸 때 나름대로 설정된 계획을 갖고 있어서, 제1장에서 예견된 미래는 언제나 정확한 경로를 밟아 제13장에 이르러 실현될 것이라고. 그러나 소설가들은 저마다 다른 숱한 이유들 때문에 글을 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위해, 친구들을 위해, 애인들을 위해. 허영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즐거움 때문에. 목수들이 가구 만들기를 즐기듯, 술꾼들이 술을 즐기듯. 그 갖가지 사연들만 가지고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진실일 것이다. 모두의 진실은 아닐지라도. 우리들 소설가에게 공통된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우리는 실재하는(또는 실재했던) 세계만큼 사실적인, 그러나 그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리 설계할 수 없는 까닭이다. 창조된 세계는 기계가 아니라 유기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순수하게 창조된 세계는 그 창조자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계된 세계-그 형태와 구조를 평면도에 미리 드러낸 세계-는 이미 죽은 세계다. 우리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우리한테 반항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발상은 내가 아니라 찰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는 이제 자율성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고 싶으면, 내가 신과 비슷한 입장에서 그를 위해 세워놓았던 모든 계획을 무시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나는 찰스만이 아니라 티나와 사라, 심지어는 저 밉살스러운 풀트니 부인에게도 각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신에 대한 좋은 정의가 하나 있다-'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 나는 이 정의에 따라야 한다.
소설가는 여전히 하나의 신이다. 소설가는 창조하기 때문이다(가장 전위적인 현대소설조차도 작가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그 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소설가가 이제는 더 이상 빅토리아 시대적 이미지, 즉 전지전능한 이미지를 지닌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가는 권위가 아니라 자유를 제일 원칙으로 삼는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가진 신이다. 

-오늘날 같으면 라디오와 텔레비전, 값싼 여행 따위로 메꿀 수도 있는 이 같은 거리감, 그 모든 심연들이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상대를 모르는 만큼 서로에게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개인적인 공기를 숨쉴 수 있었다. 단추를 한 번 누르거나 채널을 한 번 돌리면 전세계를 볼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은 이상했고, 때로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야릇함을 지니고 있었다. 인류에게는 더 많은 교류가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단자라서, 고립 상태에 있던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넓은 공간을 누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게 나는 부러울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세계가 문자 그대로 너무 벅차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쓴다. 시인은 다만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쓸 뿐이다.

-오늘날 어떤 의사가 고전 음악을 알 수 있으며, 어떤 아마추어가 과학자와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두 사람의 세계는 전문성이라는 폭군이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들은 진보와 행복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생명의 대등함을 깨달았다. 진화는 완전함을 향한 수직적 상승이 아니라, 수평적 이동이다. 시간은 중대한 오류였다. 존재에는 역사가 없다. 그것은 언제나 현재이고, 언제나 같은 악마적 기계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이 눈에 뜨이지 않도록 인간이 세운 그 화려한 장막들-역사, 종교, 의무, 사회적 지위-은 모두 환상, 아편에 중독되었을 때 보이는 환각에 불과하다.

-인생은 난해한 기계, 불길한 점성술, 태어났을 때 내려져 항소조차 할 수 없는 판결,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無)였다.

-행위는 날마다, 시간마다,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순간마다, 못은 어딘가에 박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석희 옮김, 프레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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