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 문학과지성 시인선 52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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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집은 비탈길 같다. 경사가 급한 비탈길.( 번째 시집은 거의 수직 각도에 가까웠다. 이번 시집은 멀리 보기엔 경사가 완만해 보인다. 그러나 경사로를 걷는 이들에겐 여전히 비탈이다.) 어느 순간 경사는 아름답다. 말의 뒷다리에서 삶의 가엾음을 보고(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약속된 삼십 년에서 월부 책장사를 보고(격렬한 고통도 없이) 봄의 동네 풍경에서 목마와 머리 끄댕이 잡아채는 아이를 보는(다시 봄이 왔다), 유년 어느 동네의 골목 같은 시다. 골목의 사소한 마음들, 골목 거리에 대한 비열한 약속과 거기 묶인 비싸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에는 완연한 절망이고 희망인 마음들, 내일이고 모래인 마음들. 고통의 풍경에 익숙해져 면역의 시간이 다른 고통을 양산해내는 기묘한 시간의 기록.
 

   

 

내가 줄 쳐놓은 문장들을 바라보노라면 세상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젖가슴은 무덤을 닮았'고 술 먹고도 술 안 먹고도 헛소리를 하며(「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 '푸른 풀'은 '잦아들지 않는 푸른 경련'을 멈추지 않는다.(「푸른 풀이여」) 기억이란 여전히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고 있으며. 나는 여전히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자신을 헤'매는 삶을 산다.(「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외에 몇몇 문장들은 절실하게 현재형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오래 고통 받는 사람은」) 알았으며 그 뻑뻑함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쳐도 '저리로 내달음은 급한 마음이 위험에 빠질까 두려움이고/ 이리로 내달음은 한번 와서 다시 못 갈까 두려움'(「누런 해 간다」)임도 안다. 절망할 틈 없이 살고 있으나 혹은 절망의 습관 속에 살고 있으나 '잔나비가 울 듯이 무언가/ 해 지기 전에 울고 있다'.

   

 

그러나 시의 경사로가 왜 이리 낯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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