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68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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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이번 시집은 그가 오랜 동안 시를 써온 사람이라는 것, 또한 그가 젊음의 열정이나 환희를 넘어선 아픔이 지나고 난 자리, 꽃이 피고 진 자리에 남겨진 신성한 기억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그의 연가풍의 시들('즐거운 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등)이 사랑하는 순간의, 혹은 사랑을 잃어버린 순간의 자리를 서성이는 것이라면 이번 시집에 담긴 연가풍의 시들은 시간의 흔적이 담긴 노래이다. 극한을 지나온 뒤의 평정, 평정을 찾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평정 속에서도 추억에 의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마음의 물결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굳이 사랑을 다룬 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여타의 시들에서 역시 그는 일상에 담긴 신성한 초월의 경지를 포착하고 그 탈속의 모습이 허무함이나 무상함이 아닌 시간의 궤적 속에 이루어진 성스러운 것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러한 종교적 신성함의 세계는 예수와 불타, 원효의 대사로 이루어진 여러 편의 시들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성인들의 대화는 읊조리듯 낮고 적막하게 울리는데, 전혀 다른 종교의 합일, 지향점에 담겨진 자연스러운 삶의 몸짓을 황동규는 시의 언어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탈속의 경지가 자칫 담아내기 쉬운, 논리 없는 긍정과 낙관주의적 희망, 자연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지 대신 황동규의 시는 일상생활(몽정, 젊은 날의 기억)을 자연스레 시로 풀어냄으로 해서 시인의 원숙미를 느끼게 해준다. 이와 같은 원숙미의 경지는 시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시의 행과 행 사이의 간극, 연과 연 사이의 간극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시적인 가능성을 담고 있는 생각이 한 편의 시가 되기 위해 지켜야할 언어 사이의 긴장과 역동적인 힘을 황동규의 시는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는 복잡하고 난해하며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시의 흐름 역시 기계적인 복잡성에 어느 정도 그 의지처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시대의 흐름에 반하는 것조차 시대를 따라 표류하는 것이므로) 그러나 황동규의 시는 이러한 현대성에서 벗어나 시인만의 시적 흐름을 유지하며 이 시대에 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굳이 현대성을 작위적으로 끌어들여 컴퓨터, 휴대폰 등의 기계적 사물의 인간적 의미를 밝히는 대신 황동규의 시는 그것들이 일상임을 인정하고, 그 일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 시적인 풍경('詩的인 것은 禪的인 것이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 역시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을 그려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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