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의 아침 - 제3회 문학.판 신인작가 장편소설 당선작
조하형 지음 / 열림원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또 한 편의 환절기의 서사시를 읽은 셈이다.(문득 박상우의 『나는 인간의 빙하기로 간다』가 떠올랐다) 계절이 바뀌듯 인류의 법칙이 바뀌는 시점에서 법칙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의 서사시.

환절기에는 서사시를 쓸 수밖에 없다. 지나간 계절에 대한 기억과 다가올 계절에 대한 예감이 뭉뚱그려져 신경을 교란시키고, 매일 잊기 위해서인지 기억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준비하기 위해서인지 아쉬워하기 위해서인지 모를 꿈 속에서 두 계절이 만나며 여기를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이 강렬하게 침범하므로. 여기를 깎아내리고 지형도를 바꾸려 들기 때문에, 어떤 안간힘으로 서사시를 쓸 수밖에 없다. 애도이거나 예언으로서의 서사시는 늘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안타깝고 그러다 어느 순간 처절해질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여기, 두 발을 버티고 선 여기가 분열하며 좁아져갈 때, 또한 이 좁아짐은 곧 확장과도 맞닿아 가므로, 미분과 적분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신경 교란의 시간을 기록하기.

소설은 환절기의 서사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과학적 상상력을 도입한다. 種이 바뀌는 시기. 조인이라 부르는 날개를 단 이들의 출현(이상의 ‘날자, 날자, 날자꾸나’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으로 인류가 신인류와 구인류로 나뉘게 된 뒤, 그 환절기에 대한 구인류라 부를 수 있는 몇몇 예민한 이들의 반응인 셈이다. (그런데 예민하지 못한 인간이 있을까. 예민하지 않을 수야 있지만, 예민하지 못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자기 보존 본능으로서.) 김철수라는 암벽 등반가와 그의 아내 이순희, 그들의 손자 벌레에 집중하는 자폐아 길동, 정신병원에서 닭을 날게 하려는 독고영감의 계획에 동참한 뒤 그곳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고 자기 혼자 계획에 착수하는 박영구, 그의 쌍둥이 동생 해탈보조상품을 팔고 이전엔 신비동물밀매업을 하던 박영자. 이들을 중심으로 소외된(혹은 잊혀진) 자들이 사는 노인촌이 무대가 되어 소설은 나선형으로 회전하듯 서사를 돌려나간다.

여기에 음악(거문고, 가야금, 장구 등등의 북소리) 이론과 진화 이론, 그밖의 과학 이론, 자본의 무서운 획책 등등에 대한 논리가 더해지며 소설은 몸피를 불려나간다.

왜 하필 조인(鳥人)인가에 대해서는, ‘하지만 날아서 도달할 수 있는 하늘 같은 건 없다’, 혹은 ‘그러고보면, 비상(飛翔)은 죽음과 닮은 데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을 달성할 수는 있어도, 전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등등의 문장을 통해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이상으로 분류되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 공허감 같은 것. 그밖에 유전자 조합을 통한 희귀한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한 마리 코뿔소(어딘가 이오네스코가 떠오르는)의 노인촌 난입 사건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개체의 개체성과 종의 진화 사이의 논리를 ‘미친, 새로운 세계’의 정신병원 안에서 독고 영감과 박영구가 설파하며 닭 한 마리로 실험을 하고-날지 못하는 조류가 날게 될 때 새로운 태양이 뜬다- 김철수의 암벽 등반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가 다듬어진다. 이 사이사이 개입한 노인촌의 다른 인물들의 서사와 인문학적이거나 종교적인(박영자의 입을 통해 의사과학이며 의사종교라는 힐난을 입는) 논리들이 소설에 결합하며 소설은 벚꽃나무가 벚꽃잎 한 송이 한 송이를 피워내듯, 퐁퐁 다양한 상징과 상상력을 쏟아낸다. 이 서술 또한 과학 용어를 적극 활용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암벽 등반과 관련한 전문 용어들이 심리적 서술을 위해서도 쓰인다. 그러나 다 뽑아내보기엔 힘이 딸린다.

벌레와 아침, 곧 벌레가 있어야 벌레의 아침이 있을 수 있음, 매일 밤 죽고 깨어난 듯 아침이 오고, 그 희안한 단절과 더불어 이 우주의 벌레인 인간들, 실제로 위에서 바라보면 벌레와도 같이 꼬물꼬물 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엄청난 투쟁이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기도 한 현상, 미분, 다시 적분. 그 끝없는 법칙의 세계. 영원한 추락, 혹은 영원한 상승, 그러나 이조차 종의 법칙 안에서 벌어지며, 마무리되고.(2년전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보며 느꼈던 이상한 감정 ‘생명이 생겨났어’라고 환호성을 치다가 그만 그 벌레와 나 사이의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런 경험을 누구나 하나보다.) 벌레와 인간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 사이, 사이, 사이들, 단절과 연결, 개체와 개체, 종과 종. 그 사이의 리듬.




이 소설의 형식을 뒷부분 해설에서 보니 하이퍼텍스트적이라 하는데(요즘은 이런 고유 명사에 적응하는 일도 어렵다.) 각 짧은 장이 분절되어 있고, 링크된 번호로 넘어가 소설을 읽어도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읽다보니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어 그냥 죽 읽어나갔다. 나의 사고하는 방식은 이미 죽죽 읽어넘어가는 방식에 적응해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링크를 따라 가다보면 마치 나선형 회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며, 아무래도 이 소설 안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멀미 비슷한 것을 느껴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용을 봤을 때(절망을 넘어서어야만 새로운 세계가 온다는 이 상투적인 깨달음, 그러나 상투성의 부정을 다시 부정하기 등등의 자의식 측면에서도) 이 형식은 괜찮은 시도였다. 굳이 링크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벚꽃 나무에서 이 꽃잎을 한 장 한 장 따보고 싶어질 수도 있으며, 단절과 연결 사이의 매듭으로 보아도 어울린다. 어지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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