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시인선 37
진이정 지음 / 세계사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말은 혹은 언어는 물질과 영혼 사이에 있다. 분명 글자를 적으면 보이되 그 의미는 결코 만져지지 않는다. 그저 기억, 니은, 디귿, 리을의 향연 같기도 한 글자가 어느 순간 의미의 연기에 휘감기고 만다. 모든 말들이 내뱉어지는 순간마다 유물론과 영혼 사이의 그 아찔함이 피어난다.

사실 잘 된 책은 모두 물질과 영혼 사이를 오간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우리는 물질인가 영혼 혹은 정신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는 빼곡한 문장들이 이야기를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명 단일한 유기체이고 모든 고통은 제 몫이기는 하나 어느 순간, 말풍선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정신은 공유된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고 있으므로, 내가 너라는 말은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도록 만들어진 우리는.

그리하여 결국 사랑의 문제에 가 닿는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사랑하라고 이야기하는 걸까? 사랑은 肉이며 섹스라는 행위인 동시에 정신의 치열한 교류이므로. 우리는 사랑으로 성과 속을 모두 걷게 되므로, 육과 혼이 합쳐지는 경계에서만 사랑이 번개치므로? 나와 너 사이에서 위태롭게 번뜩이는 사랑. 자기 자신은 결코 자신을 볼 수 없고 타인만을 볼 수 있는 생물체 인간의 조건은 사랑으로만 자기 자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 때문에?




진이정의 시는 이 물질과 영혼 사이에서 애타게 방황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 속 풍경에는

평행을 달리는 진리 사이로 무수하게 빼곡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다른 짓을 한다. 똥을 싸고, 순대를 먹고, 우유를 마시고, 섹스를 하고(해야 하고), 자위를 하고(해야 하고), 남색하고, 친척들과 원없이 싸우고, 잦은 방귀를 뀌고, 그래서 거리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고, 카페가 있고, 유곽이 있다. 공포의 뒷면 같은 삶, 이 모든 스캔들, 다른 말로 하자면 질질 흘러내리는 애욕의 전쟁터 아메리카 대통령 국가 조국 국가 보안법.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얼굴로 진리의 갈래이거나 聖의 갈래, 사랑의 갈래이기도 한 곳에서 -소크라테스와 아고라의 진리, 십자가와 성서의 진리, 원효대사와 해골바가지와 탑과 심심산골 불공과 반야심경과 중중무진의 진리, 아트만과 군달리니 요가의 진리의 갈래에서 살아간다.

진이정은 성과 속 사이를 한 발씩 디디고 걷는 사랑 혹은 가로지르기 도중 가로지르고 가로지르다가 그만 엎어져 버렸거나 자신이 가고 있는 곳을 잃었거나.(혹은 죽음의 문 앞에서 한없이 절박해졌거나.) 그 위로 장대비가 퍼붓고 그는 그만 울어 버렸고 혹은 여전히 울고 있고 어쩌면 그것은 울음이 아니라 그저 메탈리카 같은 비였는지도 비와 울음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물고문이다. 고통스럽게 나의 울음과 모두의 조건 사이를 오가므로.

물질과 영혼, 성과 속 중

어느 것이 빛이고 어느 것이 피인지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어디가 서대문 형무소이고 어디가 명월관인지

아무도 모른다.

용서와 분노의 분출 사이

그림자와 빛 사이에서

겨우 뼈대로만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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