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만세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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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런 소설을 쓰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하자면, 언어로 꿈꾸기를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처녀작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희뿌연 베일에 가리워진 그 꿈과 같은 세계를 베일을 한 겹 한 겹 어루만지듯 보여줬다면 『시간의 지배자』에서 그는 온갖 물건들, 모순으로 가득 찬 물체들-조각난, 이미 쓸모없는-로 이루어진 한 왕국을 그렸다. 그리고 『지옥 만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철 장수로 기계를 해체하는 母子의 이야기가 그 내용에 걸맞게 해체된(?) 문체로 그려진다.




온갖 환상적인 물건들, 도금한 은, 금, 온갖 종류의 부품, 램프, 열쇠, 또는 시계들! 그 모든 것이 해체되고 찌그러져 쌓여 있는 거야.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을 다시 해체하며 벌어 먹고 사는 가족, 母子가 그것을 해체하면 아버지는 트럭에 그것들을 싣고 머나먼 곳으로 가 판다. 일주일 내내 운전을 하고 운전을 쉬는 동안 창녀인 롤라 베티나를 안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동료를 통해 말한다. 이 소설의 초반은 『시간의 지배자』의 후속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들이 현대를 살고 아들을 낳았다면, 왕국의 지배자인 힘이 센 아버지는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리고 어머니와 둘만 남은 조슬랭 시마르의 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딱딱하고 차갑게 날이 선 금속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조슬랭은 밤이면 연극을 하는 극장에서 생활하고 그 극장의 여배우 마엘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비현실적이다. 그가 마엘을 만나는 부분이나 그밖의 인물들-마엘의 부모, 파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서술은 대부분 완전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니, 문장의 흐름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문장 속에서 현대는 해체되고 모자이크된, 일인칭으로 가득 찬, 이해할 수 없는 곳인 셈이랄까. 분명 서사가 존재하지만 엄청난 리듬으로 이어지는 그 서사는 이리저리 찢겨있고 틈이 있으며 부서진 고철 덩어리들처럼 차갑고, 어긋난 채이다. 의도적으로 문장과 이야기가 찢겨 있으므로 그것을 애써 이어붙이려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부드러움과 차가움을 이어 붙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온갖 인간들, 특히 창녀, 고물상, 란제리집 종업원 같은 프롤레타리아(소설에 직접 언급된다)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어쩐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가면의 생』을 이어붙인 것도 같다. 늙은 창녀를 아껴주는 포주가 되겠다던 모모의 목소리가 떠오르고 그들이 살던 엘리베이터가 없던 아파트에 조슬랭과 마틸드가 함께 살고 있어도 될 것 같고 가면의 생의 번잡하고 따로 뚝뚝 떨어진 채 아귀다툼하는 이야기들, 문장의 향연이 떠오른다. 어쩌면 같은 프랑스 소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로맹 가리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향을 내뿜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은 자판을 치는 시대에만 탄생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결코 손으로는 펜을 굴려서는 이런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로맹 가리의 『가면의 생』과 이 소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인가.

그러나 정말 이것이 지옥일까? 누구에게나 각자의 지옥이 존재하니까. 그런 면에서 이 완벽한 일인칭은 지옥일 수 있겠구나.

 

 

 

 

 

 

 



 쇠붙이와 씨름을 벌이는 생살. 나는 꿈의 기계장치에 대고 곡괭이질을 해댄다.




길은 텅 비어 있다. 위험은 차를 멈출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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