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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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6년을 이 소설을 읽으며 보냈다. 그때 이 소설은 문학동네에 연재 중이었고 띄엄띄엄 계절별로 나오는 이 소설의 문장에 밑줄을 긋기도 했다. 소설에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 섥혀 등장하는 까닭에 전체를 소화할 수는 없었지만 문장이 아름다웠으며 우연이나 존재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의미있게 느껴졌으므로, 도서관에 가 연재분을 읽고 나면 다음 문학동네 계간지가 나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 제목이 바뀐 채 한 권의 책으로 나온 소설을 다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산다. 지금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그것이 누군가 다른 이의 꿈이 전도된 것일지라도 어쨌든 삶의 틀 안에서 후회로, 추억으로 언젠가는 회고될 삶을 살고 있다- 문학은 그 삶에 대해 나직하게 들려주고자 한다. 존재의 경이에 대해 또한 존재의 외로움에 대해.

이 소설 역시 존재의 경이와 외로움을 좇아간다. 한 사람의 삶의 둘레를 뒤따르다 마주치게 되는 많은 인물들이 소설 안에 등장한다. ‘나’,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애인인 정민, 그녀의 삼촌, 독일에서 만난 외국인들(헬무트 베르크, 그녀의 아내 안나, 이길용이자 강시우의 삶을 산 사내, 그의 애인이었던 상희와 현재의 애인 레이, 또 그들의 가족들) 등, 거기에 더해 많은 철학자들(소설의 끝에 등장하는 발터 벤야민, 벤야민의 여인과 벤야민과 친했던 극작가 브레히트)과 문학가들까지 많은 이름들이 소설 안에서 마주치고, 서로 영향을 주고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지고 있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이보다 더 스펙타클하지는 않다 하더라도(‘나’는 1991년의 숱한 죽음들이 삶의 거리를 가로막던 그 시대를 횡단하는 광경을 지켜보다 못해 타인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식하고 그러다가는 방북예비대표로 독일로 가게 된다) 많은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게 된다. 잠시 내가 만났던 사람들, 또한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아득해지게 되는 것처럼. 삶의 이 무수한 만남들과 헤어짐들이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냐고 묻는다면, 이 소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또한 기억 속에서는 소멸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만남은 영영 우리의 삶에 지문을 남기지 않겠느냐고 한다. 별들이 서로 지나가며 자장에 따라 영향을 주고 받듯이, 거대한 바다가 달과의 만남으로 빚어지는 조수의 흐름을 따르며 지구라는 별에 묶여 순리의 움직임을 다하듯 우리 역시 서로의 자장을 빛내며 흐르고 파도치며 빛내고 있는 게 아니냐고, 그 순간이 어떤 화인처럼 한 사람의 생을 묶어버리기도 하고 또 그곳에서 풀려나려 몇 번이고 다른 생을 살려 하며 겹쳐진 생의 물줄기가 몸 속을 흘러도 어쨌거나 자기 자신으로 삶을 지속하며 오직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고. 그것이 기적이라고 이 소설은 들려준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 그런 탓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무주에서 정민과 나란히 누워 바라본 밤하늘처럼 인생은 광활하고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무한한 삶.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국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해 여름 헬무트 베르크에게 들은 얘기 중에 이런 게 있다.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나 역시 며 번을 스스로 물어도 나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주는 건 우리가 따르고 싶어하는 논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이야기로서 엮어내는 삶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을 횡단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실은 그 사건들 각각에 무수히 다른 성격의 내가 있고 단지 돌이켜보며 그 안에서 그때와는 다른, 지금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므로. 그렇다 하여도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는 화자는 고스란히 아픔, 슬픔, 외로움, 사랑을 모두 한 몸으로 겪어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 사람이 대단하기도 하다. 그 많은 사건을 온몸으로 치받아 내었다니.


언젠가 친구와 주고받았던 얘기인데, 지나가면 모든 순간은 그리움으로 남게 된다고, 아주 누추하고 초라했던 순간들조차도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어느 학교 계단에 앉아 얘기했었다. 또 이 순간도 그리워지고 말 게 아니냐고. 허나 잡을 수 없는 세월에 대해 불평해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자꾸만 어딘가로 가고 있다. 한시도 운동하지 않고 살아가는 없는 물체인 우리는, 세포들의 결합체인 우리는, 그 그리움의 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지독하게 고독한 한 개인이지만 그렇게 빛을 발하며 묶여 있었다고 생각하면 사는 일이 좀 더 아름다워진다. 소설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 있다.

한 편의 후일담 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 소설이 좀더 많은 이들에게 날개짓을 하게 된다면 아마 서로 폭력적으로 상처 주고 한 개인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개인들이 정치적이건 그렇지 않건 서로 자장을 주고 받는 세계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이 종래에는 우리의 선조가 만난 것 때문이라는 것은 좀 실망스럽지만, 또 그 꼬리를 물고 물다 보면 이 지구가 이런 모양이 된 결정적인 이유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으며 이 우연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세상에 대해 조금은 안도하게 되기도 하므로. 정말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토록 홀로인 우리가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서 모든 만남과 우연이 실은 어떤 운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덜 외로워지기도 한다. 또한 아주 차분하게 이 운명의 보이지 않는 실타래를 따라갈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도 든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이야기를 꾸며낸 우리들의 논리적이고자 하는 본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이 소설은 우리의 연약한 이 본성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후반부는 약간 템포가 빠르고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갑작스레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버겁다. 작가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알겠으나 그것이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벤야민이나 브레히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만다. 장사를 하려고 물건들을 벌였다가 누군가의 호각 소리를 듣고 갑작스레 정리를 해버린 느낌이랄까,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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