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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심청전의 플롯을 따온 이야기다. '연인 심청'이란 제목을 보자마자 아비를 위해 인당수에 목숨을 바치고 다시 살아나 국모가 되는 심청 플롯에 사랑 이야기가 얽혀 들겠구나 짐작하게 된다. 짐작대로다. 심청은 이성과의 사랑을 한다. 윤상이란 남자와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야기 속에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연인 심청일까.
심청의 플롯은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이 들어 뻔하게만 느껴졌다. 아비 눈을 뜨게 하겠다고 실제로 이뤄질지도 모를 부처님께 공양미 삼백 석을 내기 위해 목숨을 바다에 바친 여인. 요즘으로 따지면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굴 만한, 정말 말도 안 될 효심의 주인공이다. 차라리 내리사랑이라면, 자식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몸을 바친 부모 얘기라면 오히려 더 있을 법한 일인데, 이 여자는 나이든 부모를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다. 아직 세상사 즐거움도 못 누려봤는데, 혈기방장한 채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수도 없이 많을 나이에. '효'가 인간의 기본 도덕이라지만, 실제로는 부모를 버리는 '고려장' 풍속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현대에도 독거노인이 많은 것만 봐도 심청 정도의 '효심'은 평범을 넘어서있다.
너무 뻔해서 들여다볼 생각도 잘 못 했지만, 그저 효도하라는 교훈으로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싶지만, 몇 백 년을 넘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런 여자 흔하지 않다. 그 여자 속에는 뭐가 들어차있었던 건가, 왜 심청은 인당수에 빠져서라도 아비를 구하려 했는가, 곰곰 생각해보면 그 속이 궁금해진다.
답부터 말하자면,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였다고 방민호 작가는 풀어냈다. 신산한 삶을 끝내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을 심청은 택한 것이라고, 그녀 마음속으로 들어가본 방민호 작가의 해설이다. 여기 운명이 더해진다. 오래전에 짜여진 인연의 그물 속에서 심청과 아비인 심봉사는 질긴 인연줄로 얽혀있었다는 것. 이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수궁에서 알게 된, 심청은 모르는 작가와 독자만 아는 얘기다. 옥황상제의 궁궐 자미원에서 탕약을 다리던 '유리'라는 이름의 여인은 유형 선관을 사랑해 죄를 짓고 만다. 그 죄의 대가로 이승으로 떨어져 사랑할 수 없는 사이인 아비와 딸로 만나게 된 것. 우리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선택을 할 때, 어쩌면 그 선택의 이유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나긴 인연의 줄을 우리가 잡고 가고 있는 것이라 '연인 심청'은 말한다. 불교의 윤회설에 닿아있는 이야기이자, 합리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환상 혹은 상상으로 채워넣어 이야기의 매듭을 정교하게 하는 소설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심봉사가 부처에게 공덕을 바쳐 눈을 뜨고자 한 이야기의 도입부를 보자면, 마지막까지 불교 논리는 '연인 심청'을 끌고 가는 한 축이다. 아비와 딸로 만나 심 봉사와 심청은, 심 봉사가 눈을 뜸으로써 그들 인연이 영영 끝나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연이 풀릴 때까지 계속 살아내 모든 인연을 완전히 풀어내 마음에 남는 바가 하나 없으면 해탈이라 불교에서 했듯, 적어도 두 사람의 인연의 질긴 끈은 심청이 목숨을 바쳐 끊어낸다.
그러면 심청은 해탈해 다시는 살아있는 목숨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을까. '연인 심청' 속 '심청'은 다시 태어날 것만 같다. 그녀 속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연인 심청'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인물, 심청과 대립되는 인물이자, 그녀의 희생의 원인인 심 봉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연인 심청'은 제목에서부터 '심청'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심청이 죽은 후 심청과 심 봉사의 이야기를 교차 편집했다. 왜? 이야기상 봐도, 그래서 심청이가 목숨을 바쳐 얻은 공양미 삼백 석으로 심 봉사는 눈을 떴나, 다들 궁금해하게 될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하니, 호기심이 증폭한다. 여기가 '연인 심청'이 가장 풍성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내놓는 장면까지야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인데다, 나와는 좀 다른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줄줄 읽어내려갔다. 오히려 가장 아프게 읽은 대목은 심청이 죽은 뒤 심봉사의 행적이었다.
눈이고 몸이던 딸을 내놓고도 육욕에 얽매이고 세상사 재미를 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늙은 육신의 한 남자. 겉모습만 초라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초라한 남자. 그의 돈을 뺏기 위해 달려든 동네 사람 만덕 아범과 기생에게 심봉사는 놀아난다. 주색잡기에 몸도 마음도 내놓았다. 혀를 쯧쯧 찰 만큼 한심하다, 서경 기생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 심지어 절간에 내놓기로 한 딸의 목숨값 삼백석마저 절반을 뚝 잘라내 줘버린다. 공덕을 올리기로 한 칠석 날에는 피곤하다고 잠자다 제대로 공덕을 올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심봉사야말로 우리 모습이 아닐까. 온몸과 마음으로 제 뜻을 지켜나가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심청보다야, 심봉사야말로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이 아닐까.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으나, 지금 눈앞의 욕망에 더 눈이 가는, 그래서 그만 어제 결심하고 오늘 부서뜨리는, 중요하다 해놓고 또 잊어버리는, 순간의 쾌락에 그만 알게 뭐람 해버리는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는 듯 했다. 많은 과장도 아니고 조금의 과장이다. 그래서 쯧쯧쯧 혀를 차고 한심해하다 그만 아팠다. 나는 쾌락 앞에서 얼마나 강한가 해보면 별로 그렇지도 않아서, 게임, 술, 연애 등 금방 몸에 닿는 이 쾌락에 대해 나는 순순히 거부할 수 있겠느냐 하면 그렇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 연약한 한 인간 존재인 '나'라는 평범한 사람이 심 봉사로 구현된 것만 같았다. 혀를 차며 한심해하던 그 대상이 곧 나이니, '심청'처럼 가치를 실현해가는 여인보다는 오히려 그 대립각으로 부각된 인물이야말로 더 나의 모습과 닮아있는 것 같으니, 내 연약함과 나약함 때문에 아팠다.
이야기가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라면, '심청'보다는 '심 봉사'를 통해 나는 더 '나'라는 사람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꼭 '나'라는 한 사람이 특별히 욕망이 커서는 아닐 것이다. 시인 김수영이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시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졸렬함에 대해 통렬히 아파했을 때, 그 시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듯 '연인 심청'의 독자들도 '심 봉사'의 행적과 그 속마음을 보며 혀를 차며 한심해 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쿡쿡 쑤시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심 봉사'에 대해 쓴 소설 이야기가 나온다.)
가수 심수봉이 불러 유명한 대중가요 '백만송이 장미'. 우연히도 가수의 성도 심인데, 이 노래 가사를 들여다보면, 미움 없이 아낌 없이 사랑을 주면 백만 송이 꽃을 피워낼 수 있다고 한다. 심청은 심 봉사에게 이 노래 가사 같은 사랑을 베푼다. 목숨과 바꾼 공양미 삼백 석으로 눈을 뜨기는 커녕, 더 더럽고 추한 몰골로 맹인 잔치에 나타난 아비에게 대체 그 돈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행색이냐 따져 묻지 않는다.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미움도 본성이라 나는 여전히 과거 직장 상사가 밉고 사랑을 주고도 그만큼 받지 못한 듯한 남자가 미운데, 이 여자 미움을 내색조차 않는다. 그게 진심이라 한다. 오히려 제 마음의 연인 '윤상'을 두고 매창에 걸린 아비를 구하기 위해 정성을 들인다.
방민호 작가는 소설 말미에서 제목 '연인 심청' 제목의 이유를 밝힌다. 만인의 연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바라지만, 누구도 주기 힘든 사랑을 주는 여인, 이를 통해 '가치'라는 것이 인간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해준 여인,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품고 살고 싶게 해준 여인이 한 명쯤은 이야기 안에서나마 살아있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심청은 다시 태어날 것 같다 했다. 심 봉사는 회한도 없이 떠난다. 눈을 뜸과 동시에 개안하여, 마음 속 단비를 맞는다. 각질 밑에 숨죽이고 있던 풀꽃들이 싹 틔운다 한다. 그러나, 심청 마음에는 자신이 돌보지 못해 한을 품고 죽은 남자가 남아있다. 바로 그녀가 마음으로 사랑한 윤상이다. 슬픔이 그 사랑을 불러냈다 한다. 아비가 있으나 아비라 부르지 못한, 만인이 평등한 세상에서 태어나 자기 능력을 실현하고 싶어한 남자 윤상을 심청은 마음에 둔다. 그 마음이 심청을 다시 세상으로 불러 이 세상 어딘가에 살게 할 것이다. '연인 심청'의 불교 논리에 따르자면, 맺지 못한 마음은 다시 삶을 부르므로, 아마 심청은 어떤 세상에든 나타나 그 마음을 다 풀어낼 것이다.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사는 수밖에 다른 삶의 방도가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할 수 있는 세상 이야기가 더 남아있을 것이라 한다.
만인의 연인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누구나 바라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그 사랑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현으로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많은 우리에게 보아야 할 희망이 남아있다고, 누구 한 사람의 희생으로 구현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복된 세상이 올 때까지 우리는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아파하고 바라고 하는 것이라고 '연인 심청'은 그때까지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언젠가 우리의 삶도 맑아질까 하는 기대 속에서 살기 위해. 내 마음에 남은 희석시키지 못한 미움을 한번쯤은 씻어내는 '사랑'이 우리 삶에서도 기적처럼 일어날 수 있도록.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사랑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억겁의 세월과 무한 우주의 힘까지 더해 이뤄내고자 하는. 한 장 휴지처럼 가벼운 이 내 마음도 목련처럼 피어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도록.
2015년
5월 6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