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사서함 문학과지성 시인선 357
박라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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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라연 시집을 보고 잠시간 멈췄다가, 생각은

남과 여다.

처음으로 남과 여에 대해 깊이 사유했다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시 워크숍 시인은 남자였다. 다들 아셨던가요? 싶지만

그러니까 예전부터 사람들이 화성남자 금성여자인지 금성남자 화성여자인지 하는 책을 읽으라고

내게 강추하던 이유를 여기서 알았다.

 

어쩌면 작년까지 몰랐다가 이제 알게 사실이

남과 여는 뇌의 구조, 사고 작용, 어떤 사건에 대한 반응과 해석(물론 해석을 통해 말이 나온다)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20 초반에는 아수라백작에 대한 소설을 적이 있다. 나는 나름대로 소설 아이디어나 상상력 면에서는 최고봉이라고 생각하는(그러나 치졸한 묘사와 서사력으로 그만 내용은 없는) 소설인데, 아수라백작은 남과여를 얼굴에 가진 존재다. 그러니까 20 초반에는 그에 대해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같다만,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남자나 여자나, 그냥 살면 되지, 깐딴히 말하면 그렇다.

그러니까 약속은 지키고 내가 하기로 일은 하고 그렇게

하다가도 되는 어리석은(혹은 현명한) 날이 오고 만다. 웃긴 일이다.

그러면 다시 그러다 그러다 나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날들의 연속을 보내다가

그만

이제 다시 옹알이를 배우는 아이처럼

남과 여는 다르다고 알았고(정말 작년까지는 괘념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에 대해서)

시집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느낀다.

 

그러니까 엄마라고 해야 할까.

말이 품고 있는 함의란 얼마나 큰가만은…

 


<불면> 밥을 지어먹인다, 허공에게

두번째 <상황 그릇> '뻔히 알면서도 져줄 때의 형상이 가장 좋았다' 한다. ' 품은 간장 종지에 불과'할지라도

<배호>에서는 미안하고 감사하다.

<아는 사이>에서는 뜨거운 눈시울을 빨대를 꼽고 빨아마신 떨이로 팔아넘길 뻔한 허기를 본다.

마지막 <순간 의자>에서는 '그저 앉게 해주'

 

이것을 여성성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동물적 여성의 본능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벗고 싸우면, 어떤 남자에게 맞아 죽는다.

진화론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그냥 인간인걸, 그러니까 내가 죽인 개미와 다를 없어서

라고 종종 생각하므로 반신반의만 한다.

(믿음이 최고로 뇌를 활발하게 굴린다는데 이러니 뇌는 어느 순간 정지하는 건가? 아니 정지하고 싶은 건가? 정지할까봐 두려운가?)

 

우리가 여성성이라고 명명하는 어떤 속에는 약자의 미덕이라고 해도 좋고 엄마의 미덕이라고 해도 좋을 무언가가 있다. 승패로 보면 패자일지도 모를, 그러나 종족보존이란 연장선상에서 보면 승자일지도 모를, 어떤 반신반의 상태의 무엇. 팔아먹고 팔아먹히는 세상에서 여분의 것들에 젖주고 싶은 어떤 마음들.(그것은 물론 생물학적 본성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만)

 

이전 시집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이것을 나약하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20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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