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소한법규 위반이라도 자신의 판단으로 의식적으로 저지르게될 때,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많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순간 속에 있다. 이 순간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란 원래 법 바깥에 있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인 의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법의 제정 또는 그 개폐인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 늘 유동적이어서 그것을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이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 P39
해방의 순간이란 움직일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보였던 사회질서가 사실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임을드러내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부터 사물 같았던 질서가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P47
"그리고 드디어 한 가해자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탈락한다. 그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비인간적인 대치 속에서 비로소 한 인간이 생겨난다.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이다." - P59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을 깨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정부의 무능을 탓할 때,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능해질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 P67
적극적으로 폐를 끼치는 것을 통해 그들은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강렬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퀴어축제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모습은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쾌감이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불쾌감은 오히려 새로운 사회관계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서로 폐를 끼치기에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 P72
증오에는 혐오와 다른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어떤 범주(인종, 민족, 성, 계급 등등)를 통해 작동하는 것과 달리, 증오에는 어떤 개별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구체성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신체성이 있다. 아직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는 증오의 힘을 통제하고 어떤 범주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 혐오의 기능이다. 유동적인 관계들과 결부되어 있기에 사랑으로 반전할 수도 있는 증오의 가능성을 혐오는 봉쇄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어떤 혐오 속에도 증오의 힘이 있다는 말이 될 텐데, 혐오로 굳어진 증오의 힘을 다른 방향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까. - P80
지옥 속에서 우리는 먼저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듬는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킨다. 그 손이 다른 손을 잡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문을 찾게 될 것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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