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파토스, 이성으로 되지 않는 어딘가에 대한 이야기

폭풍의 언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어릴 때 이 책을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모집에서 세계문학전집 같은 게 꽂혀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지금 읽은 판본보다는 훨씬 얇은 책이었고,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 시간을 잊고 읽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폭풍의 언덕 하면 그냥 떠오르는 이름 히스클리프만 알고 있는 수준인 셈이다. 히스클리프는 야생성의 상징으로 떠돌고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이름이 유명해진 걸까? 생각해보니 이런 이름을 가진 다른 주인공은 없다. 존이나 아서가 아닌 히스클리프. 다섯 글자의 이름. 집시의 아들인듯 구리빛 피부를 가진. 주워온 남자아이.

존 하니 바로 왕좌의 게임의 존 스노우가 떠오르는데, 그 역시 주워온 아이였다는 점에서는 폭풍의 언덕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가족과 사랑에 빠진다는 점에서도.

인간의 파토스, 이성으로 되지 않는 어딘가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던 히스클리프,

결핍된 존재, 결핍이 이끌어낸 어떤 내면, 그와 친구가 된 캐서린. 유일한 이해자. 깊은 분노마저 통하는,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이루지 못한 사랑이 불러일으킨 계략과 술수, 어린 시절 멸시를 되갚음하는. 그러나 실은 모두 어떤 결핍을 끌어안고 산다. 작품 속에는 그 반대편의 인물로 린튼이 있다. 결핍 없이 사는 사람. 결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폭풍의 언덕의 반대편의 작품이 위대한 개츠비일까.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폭풍의 언덕이 더 좋다.

우리의 파토스. 차츰 잊혀져가나 실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는.

규범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과연 정해진 선은 어디일까.

그 선 너머는 모른 척 해도 된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