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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ㅣ 문학동네 시인선 135
이원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시를 잠잘 때마다 한 편씩 읽고 그러다 좋은 데는 밑줄을 긋고 체크를 하고, 그러다 시집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시들을 필사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20대엔 그러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지만(사실 하루 한 편 보다 훨씬 많은 시를 읽었고 필사했다. 필사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책을 빌려 읽는 때가 많아, 그 시를 나중에 꺼내보게 담아두고 싶어서 적어두곤 했다.) 아쉬운 것은 그렇게 적어둔 노트가(그때는 컴퓨터보다 손 글씨가 더 익숙하던 때였는데) 그만 시간의 흔적을 입고 희미해져버렸다는 것. 꼭 백년동안의 고독의 마지막에 그렇듯, 모든 장의 글씨가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마 거의 20년만에, 이사 다닐 때마다 열어보지는 않지만 챙겨다니곤 하던 그 노트를 어느 날 열어보니 희미한 글씨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시라는 것은 잊고 지내던 시간이 꽤 길었음을 증명하듯.
매일 밤 시를 한 편씩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읽어, 이렇게 쉬면서 처음으로 시집 한 권을 다 읽고 좋은 시를 옮겨적고 시집에 대한 해설까지 읽고 글을 쓰고 있다.
제목 때문에 시집을 샀던가, 뭐랄까 이 은근한 제목의 느낌은…. 그리고 시도 다들 그래서…. 은근하고
그러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느끼는 감정을 다 뱉는데, 그 속에 시가 있다. 최근 보던 어떤 시와도 다른 형식이라, 아 시여야만 하는 형식은 없고 시의 세계만 있으며 그것을 보고 읊으면 된다는 것을 알려준 시집이다.
해설을 읽으며, 아 시들이 자연에 대해 노래하고 있으며, 해설 또한 너무 뛰어나며 내가 왜 이 시들에 공감했는지 알게 해줬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마음이 자연을 향하는 것은 마음이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해가
지고 밤이 오고 눈비가 내리듯이, 내 마음도 그와 같은 인과적 필연성의 산물임을 실감하고 수락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그게 위로가
되는 때가 있는 것이리라.’
‘마음이 자연인을 실감할 때, 마음은 자연에서 자유로 바뀐다. 어떤 것의 필연성을 인식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이 행복해지기 어려운 딱 그만큼 어렵다. 자연에서 자유로 가는 길, 그 어디쯤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시도 있다.’
2018년 한국일보로 등단했다는, 시집 제목과 같은 시를 보며, 아 사람을 홀리고 마는 이 시를 누구인들 그냥 넘길 수 없는 구나, 시 같기도 술술 써내려간 듯도 한, 희한한 느낌으로 사람 발목을 잡고 마는 시.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자기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웃음으로 대신 하던 그러나 반대편에 울음을 담고 있던 시적 화자가 결핍이 잠시 잊히는 순간을 충만히 누리는 데로 왔다고 한다. 거기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시가 있다고 한다. 술술 써내려간 듯, 시인 듯, 고백인 듯, 메모인 듯…. 한 그 시속에 그 은근함이 다 담겨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때, 그게 사랑인데, 이 시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신춘문예 등단작이라기에는 너무 특이한데, 그래서 더 좋다.
그 중 1편
-동경은 편지조차 할 줄 모르고
첫 장면을 들추면 보인다
나는 알면서도 그랬다
섬에서 살겠다고 집도 다 구했다고
떠돌던 날의 첫 장면
나는 그 장면을 후회할 수 없다
모든 첫 장면은 양초와 같으니까
미워하기 전에 사라지니까
평생 입 열지 않으니까
낮이란 낮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낮에는 자꾸 다짐하게 되니까
새 마음 먹게 되니까
내가 잘 보이니까
자주 무섭다가
그 상태 그대로 매번 웃는다
섬에 살아오니
섬과 처지가 같아진 것이다
혼자 한가해서 매번 혼자 회복하는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섬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동경이 꾀기 때문이다
이리 와서 물결을 보라
물결이 어떤 존재를
쫓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라
존재가 있을 만한 자리에
아무 존재도 없는 것을
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