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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오랜만에 예전에 퇴근할 때 타던 버스가 떠올랐다. 204번 버스였던가. 출퇴근 시간 이외에는 거의 타는 사람이 없던, 그 동네 아파트를 돌던 버스였는데, 한동안은 이제 막 새로 생긴 길을 달리곤 했다. 늦게 퇴근해 버스를 타곤 하면, 그 버스에 승객은 대부분 나 혼자였다. 뒷자리 즈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울거나, 울기 직전이었거나, 그런 채로 책을 보곤 하였다. 잠시 잠깐, 2-3페이지 정도를 보며, 그 고요가 좋아서, 유일하게 하루 중 좋아할 수 있는 고요였다. 오랜만에 그런 고요 속에서 책을 보다가, 그 버스를 타고 퇴근하던 때가 떠올랐다. 왠지 오래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 204번 버스, 9시에서 10시 사이 퇴근 무렵 타던 버스 뒷좌석, 운전기사님뿐이던 버스, 한적한 노선을 달리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라는 말은 맞지 않겠지만,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약자가 품은 적의다. 내가 일하다 알게 된 것이다. 비슷한 나이또래이던 여자아이들이 품었던 적의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곳은 계급사회였고, 나는 그들보다 한 급수가 높았고, 그들의 모자람을 모른 채 하고 품기에는 내 품이 좁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되고 나서, 나는 마지막까지 그들과 인사하지 않았고, 그들 또한 내게 인사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한 명은 쭈볏거리며 인사 비슷한 것을 하긴 했지만, 어색해서 이것은 인사일까 무엇일까 알 수 없었다.)
스토너를 보다 깨달았다. 공식적인 약자가 정의롭지 못할 때, 약자가 적이 되었을 때, 그것이야말로 어렵구나. 그래서 나는 어려웠구나.
오랜만에 고요히 책을 보다가, 내가 이 세계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문학이라는 세계. 세계를 드러내주는, 수식 없이, 있는 그대로, 세계의 이상한 단면과 한 사람 인생의 기이한, 평범해보이지만 실은 거기 드러난 숱한 모서리들을 보듬는 그것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이 세계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누군가는 부동산업을 좋아할 수도 있고, 바다를 개척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고,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듯, 나는 문학을 좋아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인간을 드러내주며, 사람이 왜 사는지 하는 의문에 답을 주지는 못하나 생각해보게 하는…
좋다.
영화 패터슨이 떠올랐다. 시기적으로는 196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훨씬 앞서지만, 나는 패터슨을 먼저 보았다. 소설은 2006년 재출간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패터슨은 2016년 영화다. 짐 자무쉬는 이 소설을 보았을까?
두 작품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 제목이 된다. 스토너, 패터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과대학에 진학했다가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평생 교수로 살다간 남자. 자기만의 고유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어떤 차분함과 열정이 뒤섞여, 주변 인물들을 받아들이고 때로 어쩔 수 없는 무감각으로 그것을 지나치며 자기 인생을 살아간 사람. 그가 기대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인생에 무엇을 기대할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을 가진 남자, 대단한 성공을 거머쥐거나 명예나 권력을 가졌다고 하기는 어려운, 전쟁시대 자기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간 남자. 속세가 있고 조금 더 권력지향적이거나 자기 트라우마에 갇힌 사람들이 역으로 그의 인생을 휘두르려할 때조차,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듯, 그러나 실은 자기 길을 가는 사람. 작가 존 윌리엄스의 그를 영웅이라 했다는데,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기 열정을 자기 방식으로 끝까지 간직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소설을 읽으며 시종일관 한 사람의 인생을 이다지도 차분히 관조하다니… 생각했다.
패터슨 또한 그러한 작품이다. 이 시대의 영웅, 자기 일을 차분히 해나가며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해나가는 사람들.
스토너처럼 좀 더 열정적으로, 차분하지만 좀 더 열정적으로.
나는 인생에서 뭘 기대할까
자기 알을 깨부수지 못하던 지난 시간들은 넘어 무엇을
나는 용기있는 사람일까
(20210215)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을 아직 남아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 P133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여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 P159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인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진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 P251
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 P251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긴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으로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 P353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함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 P392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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