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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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재밌지만 끝부분은 약간 황당하다. 박민규 작가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낫다. 장편은 내용이 약간 허술하다고 할까. 말로 채워진 느낌이다.

 

 

 

박민규 작가의 후기를 본다. 그는 부와 아름다움이라는 인간의 오랜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을 좋아하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그는 주인공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굴레를 씌웠지만, 외에 남자 주인공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빈약하다. 여자가 나이에 답지 않게 박식해서? 라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여자의 편지는 차라리 20 초반의 여자가 편지라기 보다는 변론처럼 보였고 때로는 감성적인 논설문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어떤 주의 주장들로 가득 . 마디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나 그래야 한다는 어떤 논조가 뒤에 너무 짙게 깔려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박민규라는 사람의 주장처럼 느껴졌다. 아마 소설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용도 단순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잘생긴 주인공은 요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녀와 만나던 도중 요한의 자살과 대학이라는 한국 사회의 관문 앞에서 그녀와 서먹해진다. 겨우 사랑을 이어가려는 찰나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여기까지다. 이후는 그와 그녀가 독일에서 다시 만나거나 그는 죽고 요한이 살아남아 그녀와 함께 하거나 이다. 어떤 결말을 선택해도 좋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결말 모두 박민규의 후기를 메꾸지 못한다. 물론 그의 후기에 기울일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소설은? 그의 후기를 모두 떠나 소설은 어떤 의미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가?


차라리 소설 속에서 생긴 그녀보다는 요한이라는 인물의 말빨이 소설을 채운다. 세상에 대한 허무로 가득 그의 말은 희안하게도 소설을 가득 차게 한다. 세상은 비었어 라고 말하는데 말의 변주가 재미를 준다.


이는 박민규 작가의 예전 소설, <삼미슈퍼스타>에서도 반복되었던 구조다. 오래 전에 읽어 가물가물하지만, 거기서는 주인공이 만난 부자인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요한의 다른 판본 같다. 거기서 그녀의 존재가 이질적이지만 소설의 없어선 요소였다면 이번에는 요한이다. 그들은 등장해야만 하는가? 어느 부잣집 아들은 등장해야 하는가? 생활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산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은 등장해야 하는가, 박민규 소설의 난제는 여기 있는 아닐까. 그의 다른 장편 <핑퐁>에서도 이런 인물은 등장한다. 나의 친구였던, 함께 핑퐁핑퐁 하던 아이가 없을 , 부가 이미 전제돼 이상 생활의 틈바구니에 끼어 쳇바퀴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 사라질 , 그의 장편은 빛을 잃는다. 이것은 박민규라는 작가가 그리는 세계관의 문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그의 단편에서는 이런 문제가 심하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편이 경우 이런 인물들이 없을 경우 소설이 지탱되지 않을 지경이다.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처럼 생활 따윈 신경 써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인물들의 화려하고 조금은 기괴한 생활 방식이 그의 소설의 여백(생활로 찌든 인생들이 넉두리할 틈조차 없는 구멍) 메꾼다. 그래, 예술은 부에 기생한다고 하지. 그래서일까. 그러나 여기 머물러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특히 소설처럼 어떤 문제의식은 있으나 문제의식에 대한 빈약한 스스로의 찾기에 요한 같은 인물을 동원하는 것은 별로다.

 

 

하지만 소설은 재밌게 읽었다. 앞에서도 밝혔듯 일부분 요한 때문이었고, 일부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생각해봤기 때문이다. 일부분 오래 누군가 때문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를 상상하는 이라는 말이 소설을 겨우 지탱해나간다. 하지만 주인공의 상상력은 빈약했다.


20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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