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없다의 방구석 영화관 - 영화를, 고상함 따위 1도 없이 세상을, 적당히 삐딱하게 바라보는
거의없다(백재욱) 지음 / 왼쪽주머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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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 제가 찾던 영화 서적이었어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전문적이지도 않으면서, 에세이류의 개인적인 잡담 위주가 아니면서, 적당히 영화에 담긴 은유나 의미를 얘기하면서도 적당히 정서를 공유하는 책이랄까요? 저는 유튜브를 보지 않아서 '거의없다'라는 이름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책과 비슷한 내용의 컨텐츠라면 구독하고 싶네요. 저는 망한 영화보다는 잘 만든 영화가 더 좋긴 한데, '거의없다' 님의 리뷰를 보다보면 망한 영화도 궁금해서 찾아볼지도 모르겠어요ㅋㅋㅋ


 저는 영화 속에 담긴 은유나 시대의 정서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볼 때 단순히 얼마만큼 무섭냐, 어떤 빌런이 나오냐 이런 게 아니라 공포영화 속 피해자는 대개 그 시대에서 가장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계층이며, 공포영화에 나오는 설정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영화 줄거리나 화면이야 제가 영화를 직접 찾아보면 그만이지만, 이런 식으로 사회가 어떻게 컨텐츠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지 한 데 묶어서 관련짓는 건 영화 바깥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바로 이런 지점이 재밌어서 영화 리뷰를 찾아보는 거구요!


 책 속에는 다양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영화를 즐겨 본다 하는 사람들은 (아마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 아닐까요ㅋㅋ) 봤을 것 같은 작품들이라 막히지 않고 쭉쭉 읽어나갈 수 있어서 좋더라구요. <비포 선셋> 시리즈나 <다이 하드>, <스크림>, <밀리언 달러 베이비>처럼 유명한 작품들은 웬만하면 다 보시지 않으셨을까요? <로스트 인 더스트>나 <시카리오> 같은 작품은 아마 못 보신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읽는 데 문제 없도록 관계된 설정이나 대사 같은 것들을 꼼꼼히 알려줘요. 물론 굵직한 스포는 빼구요~ 이 영화가 왜 명작인지 혹은 어떤 지점에서 대중들에게 어필했는지를 분석하는데, 그게 정말 재미져요~ 앞서 말했듯이, 딱 제가 원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해줘서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다이 하드> 시리즈 같은 경우, 보통은 액션이나 캐릭터의 매력을 평가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거의없다' 님 같은 경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브루스 윌리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웅물로 미국+보통+백인+노동자 계층의 남성의 욕망을 그대로 구현했다고 평합니다. 미국인이 그렇게까지 이 작품을 사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면서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요소들이 빼곡하게 영화에 자잘하게 연출이나 소품, 대사 같은 걸로 숨겨져 있고요. 그걸 찾아서 알려주는 리뷰어에요. 딱 봐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외로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 현재'에 충실하게 행복하자는 저자의 가치관이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무척 공감됐습니다. 아마 우리 세대 전체의 정서가 아닐까 싶어요.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두려움이 더 크고, 그래서 오히려 현재에 열심히 즐기고 소소한 행복이라도 누려야지 삶이 살아볼만하고 느껴지는.. 그런 거? 우리가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 매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모든 즐거움을 다 포기하고 산다고 해도, 평생 집 한 채 마련하기도 불가능한 게 현실이잖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현재에 즐길 수 있는 건 즐기면서 살겠어! 하는 게 지금 젊은 세대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정서 같아요. 물론 저자는 여기에 더해 '즐거운 일을 하다보면 그 과정 자체가 삶이 된다'는 식으로 양념을 치긴 하지만요ㅋㅋ


 자꾸 독자들이 할법한 생각을 지레짐작해서 거기다가 초를 치거나 미리 능청을 떠는 화법을 쓰는 건 좀 불호포인트였어요. 그거 좀 재치있어 보이려고 하는 옛날식 유우머 같은 느낌이 있단 말이에요ㅠ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 혼자 "책을 갖다 버리고 싶다고? 그래도 소용없다 이미 읽은 책을 어떻게 환불해주나?" 하는 식으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거.. 유튜브는 괜찮겠지만 책으로 보니까 영 별로였습니다. 할 말 없어서 대충 떼운 건가 하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 사소한 부분만 뺴면, 영화 얘기는 정말 재밌었어요! 앞으로 책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지만, 후속작 나오면 그때도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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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이방인 - 194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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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첫 문장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명작! 단 한 문장으로 주인공 뫼르소의 성격과 태도를 보여주는 걸 보면, 확실히 작가가 보통 내공이 아니에요~ 카뮈는 이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올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지 않을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의외로 책이 꽤나 얇은데다 내용도 딱히 어렵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금방 읽을 수 있어요:)



뫼르소는 왜 그 아랍인을 죽였나?

 <이방인>은 첫 문장만큼이나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범죄 동기로도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사람을 죽이는데, 그 이유가 '햇빛이 눈을 찔러서'거든요.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잖아요? 혹시 숨겨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건 없습니다. 정말로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인 거예요. 정말 말도 안 되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설 속에서 뫼르소의 담담한 심리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 진술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죽일 만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뫼르소라는 사람은 그 순간 총을 쏠 수도 있는 사람이고, 진짜로 쐈을 뿐이라는 게 수긍이 된달까요. 뫼르소가 감정이 없는 잔혹무도한 싸이코패스이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검사 측에서 그렇게 주장하긴 하지만요. 다만 말이 없고 조금은 무심한, 현대인 같은 느낌은 있어요.


 뫼르소가 그렇다고 평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굉장히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침묵할지언정 거짓으로 순간을 회피하지는 않죠. 심지어 자기 목숨이 걸려있어도 그래요!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 손쉽게 사형을 벗어날 수 있는데도 굳이 진실을 말해 모두를 불편하게 합니다. 변호사도, 판사도, 기자도, 여자친구도.. 모두 그에게 어떤 '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지 않아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말하겠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고결한 태도죠. 이게 굉장한 지점입니다. 이런 보기 드문 덕목을 갖춘 뫼르소가,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것이죠.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요? 참고로 카뮈는 뫼르소를 두고 '현대의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냐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이에요. 


 뫼르소가 살인자라는 건 불변의 사실입니다. 뫼르소는 아무 죄도 없는 한 아랍인을 죽이고, 그에 대해 아무런 비애나 죄책감 따위를 가지지 않고 있거든요. 그가 사형을 받는 건 마땅한 죗값을 치르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문제는 뫼르소의 재판 과정입니다. 거기서 보여지는 온갖 부조리가 마치 이 사형이 부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정말로 죽은 피해자를 위해서 벌을 주는 거라면, 죽은 피해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었고 그의 죽음은 부당하다는 데 포커스가 맞춰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법정에서 뫼르소를 비난하는 근거는 '어머니가 죽었는데 울지 않았다', '어머니 관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여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야한 영화를 보러 갔다' 등등 살인사건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일상의 모습이에요. 보다못한 변호사가 피고는 살인죄로 기소된 거라고 항변할 정도로 엉뚱한 것들만 물고 늘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재판이에요. 물론 그 때문에 뫼르소의 거짓말하지 않는 태도가 더 도드라집니다. 눈물 몇 방울 흘리고, 그 아랍인이 자기를 먼저 공격했다고 주장하기만 했어도 무죄 땅땅 확정이거든요.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이는 건 별 문제가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차별에 대한 고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차별인가?

 소설 속에서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다음 모두가 죽은 아랍인은 아예 지워버리고 뫼르소에만 집중하는데, 이것이 인종주의적인 or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아예 그런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작품 속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인지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루면 모 아니면 도 확실하게 드러나는 편이잖아요. 그런데 <이방인>은 관련 자료나 기사를 찾아봐도, 어느 쪽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더라고요. 카뮈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건 차별이다 혹은 아니다 단언하지는 못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논쟁조차 카뮈가 그토록 부르짖는 부조리처럼 생각되는 면이 있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작가 본인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전개나 묘사에 인종차별적인 부분이 있고, 만약 이게 현실 고발이었다면 소수자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의 근거는, 뫼르소가 아무 죄도 없는 아랍인을 죽였다는 걸 작가가 아주 분명하게 서술한다는 점을 듭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영역을 침범한 것도, 방아쇠를 당긴 것도, 전부 아랍인이 아니거든요. 카뮈는 그 아랍인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뫼르소가 그를 죽였다는 걸 대놓고 보여줍니다. 워딩 하나하나가 뫼르소의 잘못을 지적해요. 예를 들어 그 아랍인이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뒤돌아서면 끝날 일'이라고 본인이 생각하기도 하죠. 만약 카뮈가 정말 인종차별자였다면 아랍인에 대한 정당방위처럼, 혹은 그 비슷하게 얼버무렸겠지 않냐 하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랍인이었다면, 극중에서 아무 잘못 없이 살해당한 후 이름도 애도도 없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피해자를 굳이 아랍인으로 설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불쾌했을 것 같아요. 당시 프랑스인-아랍인 두 집단이 인종적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죠. 만약 일본인이 <이방인> 같은 소설을 쓰면서 식민지 시대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일본인이 한국인을 살해하는데, 정작 그 한국인은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흔적도 아무것도 없고, 독자들은 정작 살인범의 실존주의적 고뇌에 공감하고 이입하게 만들어져 있다면..? 이 작품 자체가 인종차별을 강화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기분이 상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찾아봤는데 그래서 실제로 <이방인> 속 아랍인을 다루는 태도를 두고 비판적인 시각도 많더라고요. 한국에도 출간된 <뫼르소, 살인사건> 같은 작품은 아예 <이방인>에서 살해된 아랍인의 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작품에서는 지워진 피해자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고 해요. <이방인>을 재밌게 보신 분들이라면 함께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유명한 만큼 작품 바깥의 이야깃거리도 많은 편이라, 다 읽고 찾아보시면 재미가 2배! <이방인> 관련해서 '아랍인' 관련 오역 논란이 꽤나 시끄러웠는데, 오역은 아니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논란 과정에서 제가 몰랐던 프랑스어 원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왜 아랍인을 중간에 무어인이라고 표현하는지 설명해놓은 포스팅을 봤는데, <이방인>에서 '그 아랍인' 하면 딱 한 명, 피해자를 지칭하는 게 될 수 있도록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래요~ 그 외에도 감옥 묘사에서 안은 남자들의 공간, 바깥 면회장은 여자들의 공간처럼 느껴지게 단어를 섬세하게 골랐다고 하네요. 프랑스어는 단어 자체에 여성형 남성형이 다 따로 있으니까, 원문을 읽으면 그런 정서를 바로 캐치할 수 있나봐요. 저는 프랑스어를 못 하는지라ㅠ 원문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런 작품을 번역하려면 번역가 역시 엄청나게 애써야 할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편안하게 한국어로 작품을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인지! 번역가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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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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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갑작스럽게 범람한 전염병 때문에 봉쇄된 소도시 내부의 기록입니다. 개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천재지변에 가까운 불행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이야기지요. 어떤 지점에서는 굉장히 장르소설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가 떼죽음을 당하고 고양이와 개들이 사라지며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나가는 초반부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의 시작 같다니까요?! 지금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적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굉장히 스피디하게 쭉쭉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엄청 재밌어요! 



2020년, 현재 진행형인 풍경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어느 날 쥐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죽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해요. 이게 뭐지? 하고 조금 불쾌하게 여길 뿐이었다가, 점점 더 많은 쥐들이 시도때도 없이 나와서 죽기 시작하니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공포가 번져가죠.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동물들은 자연재해에 인간보다 더 예민하다는 말. 지진이나 쓰나미가 오기 전에 쥐떼가 막 도망간다거나 하는 말이요. 사람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아니나다를까 한두 명씩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당국은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의사인 리외는 전염병의 징후를 읽어내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도,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몇몇 의사들은 페스트라는 진단을 내리고, 당국은 약간의 논쟁과 무익한 토론 끝에 전염병 사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병이 아직 발병하지 않은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오랑 시는 폐쇄돼요.


 의사 각자가 기껏 두세 사례밖에 겪지 않았을 때에는 그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하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이 모든 사례를 더해 볼 생각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합계는 참담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죽은 자들의 수가 배가되었고, 따라서 이 기이한 병에 주의를 기울여 온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짜 전염병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 p.51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전염병일 겁니다. 쥐가 매개체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쥐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병이에요. 한때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다 쓸어버리기도 했었기에, 유럽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다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죠. 아마 그래서 작가도 이 병을 골랐겠지요. 이 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작품 안팎으로 바로 이해가 되니까요. 높은 치사율을 보이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데다, 전염성도 강한 병.. 그리고 그 병의 발병으로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 차단된 사회. 서로를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격리하고, 그 방역 노력이 곧 생활이 되는 현장. 지금 우리의 모습과 꼭 닮아있죠? 페스트 속 오랑 시의 모습은 코로나 19가 터진 이후의 세계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와 '생활 속 거리두기'가 뭔지 아는 2020년의 한국 독자들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그래서 너무나 현재적인 이야기로 다가와요.  물론 한국 사회는 아직 오랑 시처럼 '락다운'을 한 상태는 아니죠. 하지만 인터넷으로 세계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지금, 이미 완전 틀어막힌 채 외부와 일절 차단된 도시들을 우리는 여럿 보았잖아요.


  그래서 지금 <페스트>를 다시 보면,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조금 다른 감상이 됩니다. 아무래도 방역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특히 랑베르에 대한 평가가 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랑베르가 오랑 시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는 게 그저 '탈출'의 문제로 보였거든요. 랑베르가 껴안고 있는 건 '전쟁이 터졌는데 외국인이라 혼자서 빠져나갈 길이 있을 때, 친구와 동료를 버리고 가겠는가?' 하는 식의 도덕적 딜레마 문제 같았달까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건 '방역'의 문제인 거예요!  랑베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건, 지금까지는 오랑 시 안에 갇혀 있던 페스트 균이 오랑 시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다는 거잖아요! 랑베르 하나 때문에 전 유럽이, 온 세계가 초토화될 수도 있는 거라구요! 오마이갓! 그런데 작중에서는 방역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이 모든 친구들이, 심지어 의사인 리외까지도 시 바깥으로 나가려는 랑베르를 묵인하고 또 응원합니다. 전염병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랑베르가 설령 그 구멍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방역에 구멍을 뚫는 데 일조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안 좋게 보였습니다. 랑베르는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남아야 했어요! 참, 그 부분만큼은 등장인물 모두가 안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누가 영웅인가

 페스트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선, 의사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리외가 자조적으로 얘기했듯,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건 치료나 회복이 아니라 진단과 격리입니다.이미 페스트에 노출된 사람들을 사실상 포기하는 거예요. 그저 아직까지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운 좋은 사람이라도 보호하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죠.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시체가 쌓여 산이 되고, 더 이상 제대로 된 무덤조차 만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면 사람들은 절망에 익숙해집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해져요. 리외는 이것이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생각에 적극 동감해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끔찍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게 되는 사회는 최악이에요.


 생전 처음 맞닥뜨린 불행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일시적인 불편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고는 무기력해져요. 코타르처럼 과거가 뒤쫓아올 수 없는 상황에 기뻐 날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늘루 신부처럼 우리는 벌을 받고 있으며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기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인간이 있기도 하고, 리외나 타루처럼 적극적으로 방역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페스트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는 인간도 있습니다. 그랑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돕는 인간도 있고요. 다들 내가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리외나 타루처럼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대부분은 리외처럼 병원에서 환자를 보지도 않고, 타루처럼 자원봉사자가 되어 현장에 뛰어들지도 않잖아요. 모두가 그렇게 앞장서서 나서는 사회는 아마 그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서술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랑이 리외나 타루 이상으로 보건위생대에 활기를 불어넣은 조용한 미덕의 실재적 대표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랑은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지녀 온 선의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답을 했다. 그는 다만 자질구레한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고만 부탁했을 뿐이다. - p.179


 그렇다. 인간은 영웅이라 부르는 사람을 본보기와 귀감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어서 이 이야기 속에 영웅 한 명이 정말 필요하다면, 서술자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저 약간의 선한 마음과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이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이 보잘것없고 존재감 없는 영웅을 제안한다. - p.184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술자는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작가는) 리외나 타루보다 그랑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평소보다 조금 더 움직여서 도와주는 사람.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일상에서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보면, 최전선에서 방역에 힘쓰는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과 현장 의료진이 아니라 생활 속 거리두기를 독려하고 철저히 지키는 시민을 더 추켜세우는 모양새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서 조금 의아해지기도 합니다. 앞장서서 싸우는 리외나 타루가 훨씬 더 영웅적으로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서술자는 리외나 타루를 추켜세우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선언해요. 이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을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편으로 쉽게 끌어들이기 위한 서술자의 전략일지도 몰라요. 모두가 리외나 타루가 되는 건 불가능하지만, 모두가 그랑이 되는 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요.



끝나지 않은 이야기

 <페스트>의 막바지에 이르러, 전염병은 갑자기 확 수그러듭니다. 문제는 의사들조차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바로 어제까지는 효과가 없던 약들이 갑자기 듣기 시작하고, 어제까지는 잘못되었던 환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왔던 것처럼 갑자기 휙 사라져버려요. 이건 물론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더 이상 죽거나 아프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만나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동시에 언제라도 이 재앙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서술자는 이 점을 잊지 않고, 모든 게 끝났구나 안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쁨에 찬 이 군중은 모르고 있지만, 그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방,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 p.410

  사실 <페스트>의 페스트는 전염병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악惡'으로 바꿔 읽을 수도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당시 독일 나치의 제국주의로 봐도 무방하고요. 알베르 카뮈 본인이 아예 그렇게 말하기도 했대요!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오랑 시는 나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를 상징하고, 리외와 타루가 조직한 보건위생대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의미한다"고요. 하지만 작가가 얘기했다고 해서 페스트라는 작품의 해석을 '전쟁'과 '침략'에만 가두는 건 가두는 건 좀 멋없는 일 같아요. '페스트'는 말 그대로 전염병이 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이나 혹은 모두가 마음 속에 어느 정도 품고 있는 무지와 악의로 해석할 수도 있잖아요~ 어쨌거나 우리가 끝내 온전히 이기지는 못할지라도, 일시적으로 그 패배를 유예시킬 수는 있는 대상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페스트> 속 페스트가 꼭 전염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보면, 앞서 말한 '일상의 영웅'을 높이 평가하는 서술자의 태도나 우리가 눈을 돌리고 안심하는 순간 언제든지 다시 이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는 엔딩이 훨씬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전쟁이, 독재가, 전염병이, 페스트가 다시 찾아올 수 있겠죠. 그리고 그때 무력하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눈을 뜨고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어야 하고요. 서술자는 페스트에 굴복하지 않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페스트를 잊지 않고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아마 이게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핵심이 아닐까 싶네요.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19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소설 속 오랑 시의 묘사를 고 있자니, 현실을 그대로 옮겨다놓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전염의 매커니즘이나 격리수용의 중요성 같은 것도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아무래도 '균'과 '병'에 대한 배경지식이 조금 더 늘어났다보니, 훨씬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예전에 <페스트>를 보셨던 분들도, 지금 다시 읽으시면 아마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되실 거라 확신합니다ㅎㅎ 고전을 읽는 건, 특히나 현재와 딱 맞아떨어지는 고전을 읽는 건 역시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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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한중록 (패브릭 양장) - 1795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혜경궁 홍씨 지음, 박병성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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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같은 경우, 제대로 각 잡고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런데도 워낙에 교과서로, 드라마로, 영화로, 소설로, 연극으로, 기사로.. 많은 분야에서 다양하게 접했던 내용인지라 어쩐지 읽어본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책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영조-사도세자-정조를 얘기할 때 <한중록>의 기록을 빼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영정조 시대가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2차, 3차로 가공된 컨텐츠가 엄청나게 많다보니 원문은 몰라도 그 내용은 익숙한, 그런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이번 기회에 혜경궁 홍씨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원문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영조, 차별하는 아버지

 영조가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두고 두 가지 시선이 혼재합니다. 영조가 당시 당파간의 싸움이나 정치적 지형을 고려해 결단을 내렸다는 정치권력적인 해석이 있고, 사도세자가 미쳐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정신병리학적 해석이 있죠. 지금은 보통 두 가지 전부 다 맞다고 보는데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후자에 무게를 더 많이 싣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래서 이런 놈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쳐낸 걸로 보여요. 어쨌든 세자를 죽여버려도 세손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왜 걸렸냐? 하고 묻는다면 영조는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여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다 영조 때문이다!' 싶다니까요? 영조는 좋고 싫음이 너무나 확실한 사람이었고, 자식들에 대한 편애와 차별이 심각했어요;; 빈말로라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영조는 아동 학대범 수준이에요. 한 번 마음에 든 사람은 뭘 해도 예쁘게 보고, 한 번 마음에 안 든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밉게 여겼죠.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멀쩡한 사람이어도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영조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영조에게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끔찍히 사랑한 건 화평옹주와 화완옹주, 반대로 끔찍히 싫어한 건 사도세자와 화협옹주입니다. 정말 신기한 게 이 4명의 자식들은 모두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사랑하고 싫어하는 여자의 자식이라 싫어한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거죠. 어쨌든, 영조는 정말 대놓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끔 차별합니다. 사도세자와 화협옹주가 너무 서러워서 둘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고, 제일 맏이인 화평옹주가 "그러지 마시라"고 아버지를 타이를 정도였어요.


 예를 들어 영조는 안 좋은 일을 보거나 들으면 나쁜 기운이 붙는다고 해서 옷을 갈아입고서야 방에 들어섰는데 사도세자와 화협옹주 둘의 방으로 들어설 때는 옷을 일부러 안 갈아입습니다. 그냥 나쁜 기운 붙으라는 건지 뭔지;; 그리고 자기가 아끼는 화평옹주나 화완옹주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액땜을 해야 한다고 사도세자를 불러서 "밥은 먹었냐?"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고는, 사도세자 목소리를 들은 귀를 물로 씻고 그 물을 화협옹주 처소에다 갖다 버립니다;;; 정말 악의가 느껴지지 않나요? 아니 그냥 밖에다 갖다 버리면 되지 그 안 좋은 기운이 담긴 물을 왜 꼭 옹주 처소에 버리게 하냐고요.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입니다. 자기 자식 이렇게 미워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참..



사도세자 망가지다

 나중에 되면 하도 사도세자를 쥐 잡듯이 잡고 안 한 일도 했다고 자꾸 혼을 내니까, 사도세자가 그냥 다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잘못이 아닌 일도 영조가 혼내면 "네 제가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고 나와요. 어떻게 홧병이 안 나겠어요ㅠ 사도세자는 우물에 뛰어들어서 자살시도도 하고 우울증 증세도 좀 보이고 하다가, 영조 32년부터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해 영조 33년부터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불안증, 강박증에 더해서 정신분열이 왔다고 보여요. 헛것을 자꾸 보고 헛소리를 하거든요. 이때부터는 뭐, 그냥 답도 없는 내리막길이죠. 그전까지는 그래도 영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도세자가 나아질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은 그런 희망조차 사라집니다.


 보다보면 혜경궁 홍씨는 자기 남편이자 윗사람이자 운명공동체였던 사도세자의 잘못은 대체로 엄청 돌려쓰거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처음 내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자기를 찾아온 일은 워낙에 충격적이었는지 간단하게나마 기록하고 있어요.


 그 6월부터 경모궁(사도세자)께서는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셨는데, 그때 당번 내시 김환채를 먼저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내인들에게 보이셨다.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으니, 그 흉하고 놀라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여야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내인 여럿이 상하였다. - p.134

 사도세자가 혜경궁에게도 꽤나 폭력을 휘두르고 갖가지로 괴롭혔던 것 같은데, 그것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이다 보니 남편의 폭력을 아내가 고발하는 모양새는 부담스러웠겠죠. 하지만 상습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게, 나중에 사도세자 상태가 많이 심각해져서 어머니나 자식들한테도 행패를 부리기 시작해요. 그러자 혜경궁 홍씨가 '병환이 심하셔도 나에게나 괴롭게 구시지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하고 말하거든요. 그리고 딱 한 번 사도세자의 가정폭력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영묘(영조)께서 거처를 옮기시는데 나가 보시지 않는다고 내가 서 있는 것을 소조(사도세자)께서 바둑판을 던져 왼쪽 눈이 상하여 하마터면 눈망울이 빠질 뻔하였다. 다행히 그 지경은 면하였으나 눈이 커다랗게 붓고 상처가 대단하였다. 그래서 영묘께서 거처를 옮기실 때 작별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선희궁(사도세자의 생모) 얼굴을 뵈옵지 못하니, 떠나는 마음은 어찌할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 죽고자 하였으나 세손을 버리지 못하여 죽지 못하였다. 갖가지 위태로움이 무수히 많았으니 그것을 어찌 다 쓰리오. - p.157~158

 저는 같은 여자로서 혜경궁 홍씨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지금 보면 그냥 결혼 잘못하는 바람에 평생 마음고생 하는 여자의 수기거든요. 신분 높은 거 하등 쓸모없습니다. 남편이 점점 정신병으로 망가지면서 폭력 휘두르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왕세자비가 무슨 소용이에요? 조선시대니까 이혼은 꿈도 못 꾸죠, 그렇다고 정신병 걸려 폭력 휘두르고 사람 죽이는 인간을 다음 왕으로 받들어 모실 수도 없죠, 까닥하면 자기랑 딸아들 목숨까지 위태롭죠.. 어휴.. 그리고 자기 아들 죽인 시아버지가 며느리랑 손자 못 죽이겠어요? 이래저래 중간에 끼어서 살 길 찾아 구만리 하는 모습이 애처롭습니다.
 


남편을 버리고 살아남다
 헤경궁이 진짜 대단한 게, 상황 판단력이 정말 끝내줘요. 사도세자가 아내의 그릇 반만 됐어도 아마 이 비극은 없었겠다 싶을 정도입니다. 일단 사도세자 곁에 있었는데도 영조의 미움을 피한 게 대단하죠. 영조는 예뻐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예뻐하고 미워하는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은 같이 미워했는데, 사도세자 옆에서 평생을 함께 부대끼면서도 영조 눈밖에 날 행동을 거의 안 했다는 거예요. 몇번 야단맞은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것도 '사도세자를 말리지 않는다'는 식의 타박이지 혜경궁 본인의 허물은 아닙니다. 사도세자도 이것을 잘 알아서 "나는 미워 하시지만 자네는 귀여워하신다"고 몇번 말하기도 해요.


 사도세자 죽고 나서 영조를 처음 만나는 자리를 보면, 원망하거나 슬퍼하는 말 한 마디를 안 합니다. 사도세자를 편들거나 옹호하는 말도 안 해요. 그냥 "저희 모자가 살아있는 게 임금의 은혜입니다." 하고 납작 엎드립니다. 그러니까 영조가 자기 마음 편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옳다고 손을 잡아주고.. (근데 영조 진짜 염치없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남편 죽인 당사자한테 고맙다고 말하길 바라다니;) 조선시대니까 아내는 무조건 남편을 따르는 게 당연한 이치였고, 사실 당시 정서로 보면 이때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편들었어야 하는데, 그런 명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이때 세손이라도 보호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몇번이나 강조를 해요. 아마 혜경궁이 남편을 버리고 목숨을 택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어릴 때 영조 곁에서 자라지 못해 서로 정이 안 붙어 이 사단이 났다 싶었는지, 영조한테 자기 아들을 키우라고 내줍니다. 방금 내 남편을 죽인 사람한테! 내 아들을 맡기다니! 으아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가끔씩만 아들을 만나는데, 정조가 어린 아이다 보니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고 울고 그러기도 하거든요? 그걸 보고 영조가 안되겠다고, 정조 놓고 돌아간다고 하면 얼른 "아래에 있으면 또 위를 그리워한다"고 데려가라고 권합니다. 혹시라도 영조가 서운해하면서 애정을 거둘까봐요. 그럼 또 영조는.. 흐뭇해하면서 정조를 데려갔대요.. (아 정말 읽을수록 영조가 싫어지는 Magic) 이렇게 아들을 제 품에서 키우는 걸 포기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아들을 지킬키려고 애를 정말 많이 씁니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는 데는 확실히 혜경궁의 기여가 큰 건 확실합니다. 정조 외에 다른 대안을 찾으려고 몇몇 세력이 난리를 쳤는데도 어쨌든 그걸 전부 방어하고 아들을 지키는 데 성공하거든요. 정치력이 남달라요. 영조의 속마음을 그대로 간파하고, 거기에 어긋나지 않게 정말 잘 하는데다, 당시 정치세력을 잘 살펴서 심지어 정적이라고 해도 집안 사람을 시켜 교류합니다. 그 덕에 나중에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상황에서도 정조 하나만큼은 무사히 지킬 수 있었죠. 다만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홍씨 일가가 타격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 정조-순조에게 자기 집안 사람들이 모함을 받고 신분이 하락한 걸 다시 살펴봐줄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한중록>의 뒷부분은 주로 이 청탁(?)을 위한 서술이에요.



 워낙에 방대한 시간을 서술하고 있는지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한 느낌은 아니고 그저 기억에 남는 사건 위주로 서술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디테일한 기록도 남아있기가 어렵고, 워낙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던지라 임금과 왕실의 허물을 덮기 위해서 있던 기록도 삭제했기 때문에 지금은 영조-사도세자-정조 시대를 파악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만 개인의 사사로운 기록이라 감정적인 부분이 꽤 많아서 그건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 같아요. 혜경궁이 파악한 진실이 실제 역사와는 다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자기 아버지나 동생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다시 없을 충신으로 묘사하고 반대로 정적들은 소인배 무리로 평가하는데, 이건 당시 정치적 지형이나 상황을 살펴가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한 기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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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웃는 남자 (186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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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 정말 읽는 내내 '빅토르 위고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이건 좀 사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몇 줄 요약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줄이자면 얼마든지 줄일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미 <웃는 남자>라는 작품을 뮤지컬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다 알아요. 그런데도 뒷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는 걸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게 소위 말하는 필력이겠죠? 새삼 역사에 남는 위대한 작가란 이런 거구나 싶어지네요ㅋㅋ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배경 묘사
 <웃는 남자>는 권력의 알력싸움에 휘말린 한 귀족 꼬마가, 얼굴이 완전히 훼손되어 버려지고, 그 얼굴을 팔아 광대로 살아가다가 다시 자기 자리를 찾는 내용입니다.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요약하면 그렇죠. 하지만 읽다보면 정말 놀라운 게, 정작 주인공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에 대한 이야기보다 다른 이야기들을 훨씬 더 많이 한다는 겁니다.  그윈플렌을 키우는 우르수스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경 하에서 컸는지, 그윈플렌 얼굴을 망가뜨린 콤프라치코스는 어떤 조직이며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당시 귀족들의 행태는 어떠했으며 그래서 귀족 사회의 유행은 무엇이고 그게 얼마나 부당했는지 등등.. 온갖 주변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정작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아주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가면서요.


 예를 들어 그윈플렌의 얼굴을 망가뜨리고 도망가는 콤프라치코스 조직원들이 바다에서 격랑을 만나 침몰하는 장면이 있어요. 뮤지컬에서는 초반 3분~5분 정도 안에 다 지나가버리는, 아주 간단한 사건입니다. 그윈플렌을 만들고, 버리고, 그리고 죽어가면서 혹시 모를 신의 자비를 기대하면서 그윈플렌의 비밀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죠.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장면 하나에만 거의 140페이지 가까이 할애해요. 주요 줄거리에 별 영향도 못 미치는, 아동 납치범들이 바다를 떠돌다 죽어버리는 내용에 말이죠! 내용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장면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그 침몰하는 과정이 어찌나 긴박하고 드라마틱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저도 모르게 엄청나게 집중해서 읽게 되더라고요. 


 주변 인물과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우르수스가 데아를 안아들고 "저런, 이 아이는 앞을 못 보는군!" 할 때가 이미 300페이지에요ㅋㅋㅋ 뭐 아무것도 안 했고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 그리고 그들을 키워주는 보호자 셋이 만나기만 했는데 이미 300페이지가 뚝딱 지나있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가 더디면 짜증이 나거든요? 특히나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의 경우 왜 이렇게까지 호흡이 느린가 싶은데, 빅토르 위고가 워낙 글을 맛깔나게 써서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주인공과 관련되지 않은 배경 하나하나도 전부 흥미로워요! 정말 대단한 능력이죠ㄷㄷ


 특히 뮤지컬을 보면서는 그냥 주인공의 보호자 정도로 인식했던 우르수스가 정말 매력적입니다. 저는 잘해줄 거면 그냥 잘해주는 게 낫다는 주의라 츤데레스러운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우르수스는 엄청나게 삐딱하게 말하고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좋아졌어요. 왜냐면 그는 행동으로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이거든요. 모두가 굳게 문을 닫고 떠돌이 거렁뱅이 아이 하나를 외면할 때, 우르수스만이 문을 열고 자기 먹을 몫의 빵과 우유를 내어줍니다. 그윈플렌과 데아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호의를 베풀거든요. 그의 행동을 보다 보면 결국 그의 독설은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자기 방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별로 기분 상하지가 않습니다. 독설 전에 이미 상대에게 베푼 게 많거든요.


  그는 앉은뱅이를 치료해 두 발로 서게 한 다음 빈정거리며 한마디를 했다.

 "자, 이제 두 다리로 걷게 되었구려. 눈물의 골짜기에서 오래도록 걷기를 바라네!"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을 보면 갖고 있던 동전까지 몽땅 털어서 건네주며 입속말로 투덜거리기도 했다.

 "살아라, 불쌍한 것! 먹어라! 오래도록 살아라! 너의 도형수 신세를 짧게 끝내 줄 사람은 내가 아니지!"

 그러고는 자신의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능력껏 못된 짓을 저지르지." - p.46



귀족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웃는 남자> 속 그윈플렌은 결국 보통의 인간, 시민 그 자체의 은유 같아요. 고귀하게 태어났다는 건 아마 천부인권을 타고난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걸 테고, 그런 고귀한 태생을 망가뜨리고 바닥으로 내팽개친 건 권력자들이죠. 그럼에도 고귀함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지만, 권력에 의해 또다시 무시와 조롱을 받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아예 대놓고 그윈플렌 입을 통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저의 눈과 콧구멍과 귀를 기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인류의 권리와 정의, 이성, 지성을 기형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소설 곳곳에서 신분제를 향한 차가운 분노를 느낄 수 있어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 독자들이 보기에, 당시 귀족들은 정말이지 혁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말이에요. 혁명, 혁명만이 답입니다! 그 정도로 귀족 행태가 어처구니 없어요. 아무리 신분 사회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백성들을 유린하고 인권을 개무시하는데도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제가 특히 경악한 부분은 귀족들의 클럽 문화였는데, 그 클럽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얼마나 무고한 사람을 괴롭히고 민간인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가해자는 귀족이고, 피해자는 평민이죠.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고, 피해를 받은 사람만이 '운이 나쁜' 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얼마나 불의한지!


 어떠한 대가를 치르든, 언제든, 누구에게든, 해를 끼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모호크 클럽의 회원은 누구나 한 가지 재능이 있어야 했다. 어떤 자는 '춤의 고수'였다. 그는 농민들의 장딴지를 칼로 찌르면서 그들이 깡충깡충 뛰게 하는 자였다. 다른 자들은 '진땀을 흘리게 하는' 일에 능숙했다. 우선, 손에 결투용 장검을 들고 여섯 내지 여덟 명의 귀족들이 한 부랑자의 주위를 둘러싸고 원을 만든다. 사방팔방 가로막혀 있으므로 그는 어느 한 사람에게서도 도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랑자의 등이 향하는 귀족은 검으로 그를 찌르니, 그는 팽이처럼 돌며 도망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의 옆구리에 칼끝 공격이 가해지면, 그의 뒤에 도 다른 귀족 하나가 나타났다. 그렇게 계속해 각자들 찔러 댄다. 그렇게 칼로 된 원 안에 갇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충분히 돌고 춤을 추고 나면, 하인들로 하여금 몽둥이질을 퍼붓게 해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다. 또 다른 자들은 '사자 때려잡기'를 즐겼다. 그들은 웃으면서 지나는 행인을 불러 세운 다음, 주먹으로 코를 부서뜨린 후, 두 엄지손가락을 두 눈에 쑤셔 넣었다. 혹시 눈이 멀면 돈으로 배상해 주었다. - p.355


 이렇게 부패하고 찌든 사회인지라 귀족들의 취향이나 의식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괴벽이 엄청 심해지기도 하구요. 조시안 여공작은 그윈플렌의 기이한 외모와 미천한 신분에 매혹되는데, 이게 특별히 조시안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기형아, 추남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문화가 있었대요;;; 아주 상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지만 또 그런 와중에도 빅토르 위고는 공정성을 발휘해, 귀족들이 특별히 나쁘고 사악한 품성을 타고나 그런 게 아니라 단지 모든 것이 고정된 세계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일탈을 즐기고자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한 마디로, 귀족은 그걸 가능하기 때문에 한다 그러니까 가능하게 하는 그 구조가 나쁜 것이라는 거죠.


 귀족들의 행태를 보면 결코 그들을 감싸줄 수가 없음에도, 나름 그들에게도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짚어주면서 꽤나 공정을 기한 편입니다. 데이비드 경, 일명 톰짐잭인 그 사람은 그윈플렌의 등장으로 모든 상속권을 다 잃게 되었는데도 그윈플렌에게 일방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옹호해요. 귀족들이 그윈플렌의 외모를 비웃은 건 무참한 일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가 받은 모욕을 대신해 결투 신청을 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윈플렌이 자기 어머니를 매춘부라고 부른 걸 잊지 않고 그윈플렌에게도 결투를 신청하지만요. 톰짐잭을 악역으로 만드는 게 훨씬 쉬울 테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미덕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당연히 귀족으로서 한계도 가지고 있고요. 그래서 인물들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느껴져요.

 



 1000페이지가 넘어가는 방대한 분량인데도, 눈 깜짝할 새에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두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습니다. 번역도 매끄럽고, 종이 촉감도 좋고, 무엇보다 표지가 진짜 너무 멋져요! 소장용으로 구매하셔도 충분히 그 가치를 할 만한 책이에요~ 다 보고 나니 뮤지컬로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빨리 삼연이 왔으면 좋겠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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