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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 1912년 오리지널 초판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진 웹스터 지음, 허윤정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은 서간체 문학이 바로 <키다리 아저씨>였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그전까지는 한번도 이런 식으로 온통 편지글로 쓰여진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정말 신기했죠.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에게 퍼붓는 이야기인데도 흐름이 있고 서사가 있고 스토리가 이어진다는 게 정말 재밌었어요. 물론 엄청난 부잣집 후원자가 가난한 고아 소녀에게 아낌없는 후원을 해준다는 설정 자체도 뭔가 꿈 같아서 좋았답니다~ 어른이 된 지금 다시 만나본 <키다리 아저씨>가 그때만큼이나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역시 잘 쓴 작품은 언제 읽어도 재밌는 법인가봐요.
<키다리 아저씨>는 역시 주인공인 제루샤 애벗, 애칭 주디의 사랑스러움과 생기발랄함에 엄청나게 기대고 있는 작품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디의 시선으로, 주디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읽으면 읽을수록 이 고아 소녀가 글쓰기에 얼마나 재능있는지 또 얼마나 똑똑하고 독립적인지 느끼게 돼요. '키다리 아저씨'라는 애칭만 해도 그렇죠. 누가 자기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얼굴 모를 후원자에 대고 간 크게 거미 이름을 애칭이랍시고 붙인답니까? 한국어로 초월번역 되어서 그 당돌함이 묻힌 감이 있는데, 영어 원문을 보면 Daddy-long-legs 라는 거미 이름이잖아요. 만약 존 스미스 씨가 조금이라도 옹졸해서 그 호칭 맘에 안 든다고 기분 나빠했으면 대학 생활 시작해보기도 전에 끝날 수도 있었다구요;;; 그때는 첫 편지라 키다리 아저씨가 그 정도는 받아주겠거니 하는 계산도 없었을 때잖아요. 정말.. 대담한 아가씨입니다..

↑ 이런 귀여운 그림으로 자기 반성을 어필하는 소녀에게 어떻게 계속 화를 내겠어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올라온 적이 있는데, 소설과 뮤지컬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저비스'가 직접 등장해서 자기 이야기를 가지느냐 아니면 끝까지 어둠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느냐 하는 부분일 겁니다. 사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아이였을 때도, 소설 속 저비스 씨가 무척 음흉하게 느껴져서 둘이 이어지는 게 좀 싫었어요ㅋㅋㅋ 특히나 키다리 아저씨가 방학 동안 샐리네 집에 가지 말고 농장으로 가라고 일방적으로 지시한 후에, 갑자기 농장에 저비스 씨가 '우연히' 뿅 하고 나타나서 꽁냥대는 부분에서 어린 나이에도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스구나!' 하는 느낌이 팍 들더라고요. 저비스 씨가 뒤에서 교묘하게 다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였어요. 어른이 치사하게 이래도 되나 싶은 느낌? 주디가 편지에 지미에 대해 쓰기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자기를 어필하는데, 이건 반칙이잖아요! 이번에 읽을 때도 마찬가지 인상이었습니다. 저비스가 주디의 선택권을 다 빼앗고 자기랑 사랑에 빠지게 조종한 거나 마찬가지에요. 이게 평범한 남녀관계였다면 이런 계략(?)이 용인될 수도 있겠지만, 둘은 후원하고 후원받는 관계잖아요. 불공평할 수밖에 없죠.
뮤지컬에서는 편지를 읽는 게 자기라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후회도 하고, 고백할까 몇번이나 망설이는 장면들이 있어서 그나마 좀 상쇄가 되는데 소설에서는 그런 거 하나도 없이 오직 주디 시점만 나오니까, 후원자 권력을 남용하는 것 같고 그래요. 아무래도 현대의 독자들은 관계에 있어서도 '권력'이 작용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죠. 게다가 뮤지컬에서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과 달리, 소설에서는 14살 차이라고 딱 명시를 해버리니까 '자신이 후원하는, 14살이나 어린, 조카의 친구를, 자기 외에 다른 남자는 못 만나게 교묘히 조종하는' 얼굴 없는 남자로 느껴져서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주디가 사랑에 빠져버렸고, 주디가 행복하면 다 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쨘! 내가 후원자였어! 이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하고 외치는 저비스 씨가 너무너무너무 못마땅합니다. 주디는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났어야 해요 흑흑..
<키다리 아저씨>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여러 가지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얘기 너무 좋아해요! 이 작품으로 고아원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없어지고, 고아원에 대한 후원도 많이 들었대요. 결정적으로 여성에게 투표권이 생기는 데에도 엄청나게 공헌했다는 거예요! 잘 쓴 소설 하나, 열 정치인 안 부러운 상황.. 한편으로는 조금 웃기기도 합니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여성의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은 똑같았을 텐데, 소설을 읽고 나서야 '아 여자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구나' 하고 바뀌었다는 거잖아요. 가끔 보면 정말 사람들의 편견이 무섭다 싶어요.
원낙 일상을 재미있게 조잘대는지라,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게 되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읽고 어릴 때 친구랑 서로 애칭 만들어서 비밀 편지 쓰기 시도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다시 읽어보면 다른 독자분들도 저처럼 주디에게는 더 큰 애정을, 저비스 씨에게는 조금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시지 않을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