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 172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류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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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리버 여행기> 하면 대개 걸리버가 누워있고 소인국 사람들이 그를 묶어놓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아주 많은 국가에서 이 소설은 정치적인 내용이 댕겅 잘려나가고 환상적인 면만을 크게 부각한 동화로 각색되어 유통되었다고 하네요. 특히 정치적으로 독재에 가까운 나라가 더 그렇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정치소설보다는 동화로 더 유명하죠. 저 역시 어릴 적에 동화로 처음 접했었던 이야기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읽었던지라 동화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걸리버가 무사히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하는 식으로 끝났을 거예요. 원작과는 다르게 말이죠.


 실제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는 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러 국가를 여행하면서 얻은 인간 혐오증 덕분에 사실상 미쳐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끝이 나요.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끝맺음하면 안 되지만, 이건 정말 한 구절 한 구절 대놓고 당시 영국 정치를 빗대어 풍자하고 비꼬는 소설이라 결국 인간 환멸로 끝이 나도 그러려니 싶어요. 1장 소인국(릴리펏)은 그나마 괜찮은데 2장 거인국(브롭딩낵)부터 4장 휘넘국까지는 '혹시 이거..?' 하고 의심할 필요로 없이 그냥 대놓고 정치 비판밖에 안 하거든요ㅋㅋㅋ


 3장 천공의 섬 라퓨타에 대한 이야기 중간에 출간 당시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영국 국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라 편집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삭제되었다 뒤늦게 추가된 내용이 있는데, 읽어보니 그럴 만하다 싶더라고요. 누가 봐도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착취를 고발하고, 아일랜드가 혁명으로 그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읽히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어요. 만약 당시 영국 국왕이나 귀족들이 이 내용을 봤다면, 반역죄로 작가를 사형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소설 속 그 혁명은 성공하기까지 하니까요;; 


 작가인 스위프트가 영국 종교-정치를 겪으며 넌더리를 냈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스위프트=걸리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화자인 걸리버가 엉뚱한 말을 하거나 잘못된 생각을 한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두는 방식으로, 스위프트는 걸리버마저도 하나의 풍자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거든요. 걸리버는 '언어 습득에 뛰어나다'는 걸 자랑으로 삼고 그 덕에 어디에 떨어지든 놀라운 적응력으로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걸 보여주는데, 정작 라틴어와 같이 독자가 알 수 있는 언어의 어원은 틀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거인국이나 휘넘국에 다녀온 뒤에, 걸리버가 (본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면서) 자기가 거인이나 휘넘이 되기라도 한 듯 착각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멸시하는 모습도 아주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고요. 


 그런데 스위프트와 걸리버가 분리되는 한편으로, 걸리버나 그가 묘사하는 신기한 나라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스위프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도 꽤 있거든요. 그래서 스위프트가 진짜로 믿고 있는 것과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 능청을 떠는 것을 구분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라퓨타에서 만난, 수학과 음악을 숭상하고 나머지 학문들을 다 하찮게 여기는 지배 계급이나 허황되고 가능성 없는 연구에 평생을 바치는 과학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건 분명 걸리버를 앞세운 스위프트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르게 영국은 식민지의 종교와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낌없는 은혜를 베푼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는 건, 작가 본인의 진짜 사상인지 아닌지 좀 헷갈려요. 검열과 비판을 피하기 위한 작가의 방패막이일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이렇게 주구장창 영국 사회 욕을 잔뜩 해댄 작품을 내면서 그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칭찬을 했을 리가 없다 싶기도 합니다. 그런 보여주기식 찬양 해봤자 이미 기분 나빠진 영국인들은 아무도 안 속을 것 같거든요ㅋㅋㅋ 


 여성을 보는 관점도 좀 오락가락하는 게, 교육에 있어서 성차별은 멍청한 짓이고 남녀 차별없이 가르치는 걸 엄청 높이 평가하는데 (거인국/휘넘국) 정작 그 와중에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또 끊임없이 하고 있어서.. 


 결제, 근면, 운동, 청결은 남녀 자녀 모두에게 독같이 부과되는 교훈들이었다. 내 주인은 여자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사 노동과 관련된 몇 가지 일들을 제외하고는, 차별 교육을 시킨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그가 보기에는 솔직히, 우리 인구의 절반이 그저 아이들을 출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맡긴다면 그건 한층 더 야만적인 일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 p.474

 이런 묘사를 보면 당대로서는 나름 깨어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는 그냥 성차별주의자죠. 가사 노동이나 아이들의 양육이 온전히 여성한테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얘기가 진행되고 있잖아요. 그리고 여자의 본성 속에는 음탕과 호색, 추문의 기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둥 하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거든요. 시대가 시대인만큼, 작가의 그런 태도를 '어쩔 수 없이' 감안하고 봐야 한다는 게 현대 여성 독자의 비극이죠. 우리는 어느 고전을 읽어도 이런 식으로 '너는 열등한 존재고 나는 너를 깔아보고 있어' 하는 작가의 속내를 참고 견뎌야 하니까요ㅠ


 여성에 대한 시각 외에도, 현대에서 보면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도 꽤 보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실용성이 없는 학문이라고 엄청나게 멸시하는데, 사실 시(詩)보다야 수학이나 과학이 엄청나게 실용성이 높잖아요? 그 시대에는 쓸모없고 무익해 보였지만, 그런 한심하고 멍청한(ㅋㅋ) 연구를 끊임없이 한 덕에 지금 이렇게 발전한 기술 덕을 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기분이 묘했어요. 스위프트가 현대에 와서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보면 도대체 뭐라고 할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나름 재밌긴 하고 여러 가지 신비한 존재들이 잔뜩 등장하는 판타지도 맞는데, 절대 아동용 동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인간에 대한 환멸과 절망, 체념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정치에 참여도 해보고 실망도 해보고 인간관계 다 때려치고 산이나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충동도 느껴본.. 그런 성인 분들이야말로 오히려 어릴 때보다 더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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