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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오만과 편견 - 189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제인 오스틴 지음, 김유미 옮김 / 더스토리 / 201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는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다정한, 소위 '츤데레'한 매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냥 대놓고 잘해주면 되지 왜 상대방이 상처받게 겉으로 무뚝뚝(을 빙자해 무례)하게 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렇지 않나요? 대부분 앞에서 잘 못하는 사람은 뒤에서도 잘 못 하더라고요ㅋㅋㅋ 하지만 그런 저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츤데레 로맨스 조합이 바로 <오만과 편견>의 리지-다아시입니다. 거의 모든 현대판 로맨스의 원형을 담고 있는 이 명작, 지금 다시 읽어도 재밌더라고요!
작년에 연극으로 올라온 <오만과 편견>을 봤더니 소설을 읽는 내내 배우들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되서 혼자 킬킬거리면서 읽었답니다. 특히 속물근성에 늘 수선을 피우는 베넷 부인이나 깐족거리면서 방정맞게 잘난 체 하는 콜린스 목사 같은 경우 본인은 그런 줄 모르는데 우스꽝스러운 게 핵심이잖아요. 연극 덕분에 한국어로 쉽게 상상이 되니까 좋았습니다. 다른 장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작품을 읽으면 이런 점에서 참 좋아요. 리지는 누구, 다아시는 누구, 리디아는 누구.. 이런 식으로 자기 맘에 드는 이미지를 골라 상상할 수 있잖아요. 참고로 다아시는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남자, 콜린 퍼스 버전으로 상상했답니다. 다들 그러지 않으시려나요?!
대부분 독자들이 영국 계급제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해서, 신데렐라 로맨스로 오해하기가 굉장히 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찾아봤더니 리지네 집안 자체는 계급이 낮지 않다고 해요. 베넷 씨가 젠트리 계급이니, 우리로 따지면 양반에 속해있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베넷 부인이 상인 계급 출신이라, 외가 쪽이 약한 편이래요. 리지가 "저는 신사의 딸"이라고 했을 때, 캐서린 백작부인이 그건 인정하면서도 외가 쪽을 걸고 넘어진 걸 보면 확실히 친가 쪽 계급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가문만 따지면 빙리보다도 더 단계가 높다는 말이 있어서 놀랐어요. 이쪽은 돈이 많은 신흥 부르주아라 그렇지, 계급 자체는 상인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베넷 부인이 자기네 집은 하인과 가정부와 요리사가 있어서 딸들에게 요리를 시키지 않는다고 불쾌해하는 부분도 있고, 하인들 앞에선 베넷 부인이 말실수하지 못하게 가정부에게 하소연하도록 내버려둔다는 묘사도 있고, 베넷 씨의 1년 수입이 2천 파운드라는 말도 나오는 걸 보면 여유있는 집안이긴 한 것 같아요. 부자 독신남이라는 빙리가 연간 4천 파운드의 수입을 얻으니, 2천 파운드면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죠. 다만 지참금을 챙겨줘야 하는 딸이 5명이나 있는데다, 남자 형제가 없어서 베넷 씨가 사망하는 그 순간 모든 재산이 전부 남의 손에 넘어간다는 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이 로맨스의 멋진 점 중 하나는, 리지도 다아시도 둘 다 성장하고 변화해서 서로에게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첫번째 청혼 때의 다아시는 정말 별로거든요. "당신 집안은 열등하고, 그 때문에 나는 자존심이 상하고, 당신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일이 내 계급에 어울리는 일도 아니라서, 나는 정말 괴롭지만 그래도 말하겠다" 이런 발언을 청혼이랍시고 하는 남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아시 본인이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세상에나, 이런 망한 플러팅을 하면서 정작 상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잖아요. 정말, 리지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하지만 첫번째 청혼에서 리지에게 호되게 비난을 받은 후에, 다아시는 리지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이건 리지도 마찬가지라서, 다아시의 편지를 받고 나서 '남을 꿰뚫어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고 착각하며 함부로 다아시에게 또 위컴에게 가졌던 편견을 반성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청혼 즈음에는, 둘 다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어있어요. 누구 한 사람이 맞추는 게 아니라 둘 다 서로에게 맞춰 조금씩 변화하는 거죠. 정말 멋져요!
<오만과 편견>에서 엄마인 베넷 부인과 리디아가 악역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악역이 맞지만), 그 둘이 없었다면 리지가 다아시와 연결될 수 없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로맨스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 거죠. 만약 베넷 부인이 제인을 마차가 아니라 말에 태워보내 빙리 씨네 집에 묶어두지 않았다면, 리지가 아픈 언니를 만나기 위해 3시간이나 길을 걸어 그 집에 찾아가지 않았겠죠. 그 날 아침 리지의 "두 눈이 반짝거리"는 걸 다아시가 못 봤을 테고요! 리디아의 경우는 더 명확합니다. 리지아가 그렇게 엄청난, 리지네 집안 자체적으로는 절대로 해결하지 못할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다아시가 끼어들어 중재할 일도 없었을 테고 둘이 다시 엮일 일도 없었겠죠. 리디아의 야반도주는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베넷 부인이나 리디아가 더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더라고요;;; 특히 리디아가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뻐기는 걸 보는 일은,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한 독자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평생 다아시 재산에 빨대 꽂고 살겠지 싶어요. 으윽..
현대에 살고 있는 저로서는 리디아가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랑 야반도주한 것'이 다른 식구들에게 도대체 얼마만큼의 타격일까 감이 잘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영문학 전공한 친구들에게 물어봤는데, 한번에 확 느낌이 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굳이 현대로 바꿔 말하자면 '막내여동생이 가족 모두를 끌어들이는 연대보증을 서고 정작 본인은 잠수탄 것'에 가깝다고요. 와, 정말 확 와닿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머지 식구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얘네를 찾아내서 어떻게든 결혼을 시켜야 하는 상황인 거예요. 아니면 다른 식구들도 전부 시궁창에 한꺼번에 끌려들어갈 위기니까요. 가족에게 이런 문제가 있으면 제인-리지가 결혼을 영영 못할 정도는 아닌데 결혼할 수 있는 남자의 수준이 엄청나게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결혼이 여자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상황을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위기인 거죠. 그나마 결혼을 시키면 보증과는 달리 수습이 된다고 하니 다행이지요;;
인생을 뒤바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데도, 흥미진진하고 뒤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는 게 정말 신기한 작품입니다. 등장인물이 입체적이라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제인은 너무 사람을 좋게만 보려고 해서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런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다아시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재산과 신분 차이가 있는 남녀가 단지 외적인 조건 뿐만 아니라 내적인 조건 때문에 어긋날 뻔 했다가 결국 이루어진다는 지점도 단순한 신데렐라 로맨스가 아니라서 좋아요! 로맨스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다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명작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