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리포트 - 탈코르셋부터 소수자 차별 금지까지, 기자 4인이 추적한 우리사회 변화의 현장들
김아영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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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문제가 있는 많은 것들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로맨틱하거나 멋진 일로 포장되곤 했거든요.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남자 주인공이 폭력성에 놀라곤 했는데 그게 많은 경우에 사랑에 빠지는 장치로 활용이 되더라고요. 주변에 말해도 별로 공감을 받지 못해서, 한국 사회에선 그냥 평생 좀 이상하게 살아야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2016년, 미투운동으로부터 불어닥친 페미니즘의 바람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 사실 제가 정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면 오래 전부터 훨씬 더 많이 이상했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유레카!


 <페미니즘 리포트>는 요 몇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제기가 되어온 페미니즘을 크게 4가지 이슈로 나누어 정리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 나온 논의들을 얘기하면 정말 끝도 없는데, 큰 이슈들을 잘 뽑은 것 같아요. 탈코르셋/디지털 성범죄/임금격차/소수자 차별.  모두 지금의 페미니즘을 말할 때 뺴놓을 수 없는 주제들이잖아요? 게다가 전체적으로 굉장히 '읽기 쉽게' 쓰였기 때문에 흐름을 한번에 정리해서 보고 싶다 하시는 분들에게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제일 눈이 가는 건 3장 임금격차였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관심있는 문제거든요. 남자가 100을 받을 때 저는 64밖에 받을 수 없다면, 앞으로 1인 가구로서 미혼 여성인 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남녀차별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취업 시장에 나와보면 그런 소리를 안 하게 되는 이유가 있잖아요ㅋㅋㅋ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고 커리어에 올인한다고 해도, 같은 일을 하는 남자보다 덜 받는다면 희망이 없어요. 억울하기도 하고요. 이런 식의 불합리한 임금 격차를 도대체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ㅠ


  개인적으로 앞장에 몇년간의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해놓은 구성이 좋았습니다. 얼마 전 버닝썬 사건을 따라간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한 건데,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흐름이 헷갈릴 때가 있거든요. 제 생각보다 더 오래되기도 하고 혹은 더 빠르게 뭔가 바뀌기도 했더라고요. 그럴 때 연대기가 짧게나마 앞부분에 있으면 중요사건과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차별금지법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제법 멋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차별하는 쪽에 서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싸우고 있고, 차별금지법은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에 꼭 필요한 법이니까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법과 제도가 바뀌면 곧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때론 시스템이 사고방식을 결정하기도 하잖아요.


 이제는 한국 여성이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아주 큰 파동의 이슈를 묶어서 잘 정리해 보고 싶다면, <페미니즘 리포트>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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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심장을 쳐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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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엄마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명언이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 같은 문구는 모성이라는 게 신의 사랑과 맞먹는다고 말하고 있죠. 주변을 둘러봐도 가족이란,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특별한 존재인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그렇게 무한정 사랑하는 것은 아니죠. 무관심한 것은 차라리 낫습니다. 자식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질투하고, 괴롭히고, 결국은 죽게 하는.. 그런 어머니도 생각보다 흔해요. <너의 심장을 쳐라>는 그렇게 자식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기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딸의 투쟁기입니다.


 첫 장을 읽는 순간, 주인공의 어머니인 마리가 싫어졌어요. 마리는 타인의 선의나 칭찬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질투, 시기와 험담에 삐뚤어진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마리의 부모님이나 언니를 살펴봐도 딱히 잘못된 양육으로 아이가 망가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의문입니다. 아마 사회적인 분위기가 가정 환경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 케이스인가 봐요. 아무튼 마리는 다른 여자들이 자신만큼 예쁘지 않고, 예쁠 수 없고,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에 황홀해하는 사람입니다. 허영심으로 일단 마을에서 제일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올리비에와 사귀긴 했지만 진지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면서 미래를 향해 부풀었던 꿈은 무너집니다. 낙태를 할 수는 없었나봐요. 생명이 소중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 불행하다는 걸 다른 사람이 눈치채는 게 죽기보다 싫었거든요;;; 마리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나 보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딸을 낳고는 '자신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그 딸을 미친듯이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디안은 어렸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움받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감각을 예민하게 눈치채기 마련이잖아요. 다만 주인공 디안이 너무나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로 설정되어 있어서, 조숙하다 못해 4살짜리가 삶과 존재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을 한다는 부분은 살짝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4살,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6살짜리도 '엄마는 딸을 질투해. 아들은 질투하지 않아. 그러니까 동생이 또 태어난다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걸 넘어서서 엄마가 여동생을 너무나 사랑하는 걸 봤을 때 고민하는 깊이가 너무 철학적이라, 정말 과연 그 어린 아이가 저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싶어서 살짝 튕겨 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몰입도가 높은 편이에요.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어머니와 두 명의 딸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정말 섬뜩했던 건 모녀 관계가 이렇게까지나 병적이고 뒤틀려 있는데 주변에서 눈치채는 사람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상황을 바꿔보려는 사람도 정말 극소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식을 그렇게 은밀하게 미워하고 학대하는 어머니가 워낙에 예외적인 존재라고 해도,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게... 자기 인생이 망가지기만을 바라는 어머니 옆에서 딸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요. 이건 사회의 실패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그 중에서도 아버지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는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옆에서 학대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끝끝내 자신을 지켜내고, 또다른 선택을 한 자신마저도 포용하는 디안의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폐허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써온 만큼, 앞으로 디안의 남은 생은 오롯이 자신의 기쁨과 성취로 빛났으면 좋겠어요. 또다른 디안도 마찬가지고요. 각자의 방식으로 비로소 어머니에게서 벗어난 두 딸이 땅에 발을 딛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마무리였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부디 두 사람 앞에 길이 있기를. 빛이 있기를. 평온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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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자 효과 - 당신이 침묵의 방관자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나비 효과
캐서린 샌더슨 지음, 박준형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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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관자'라는 말에는 항상의 죄책감과 비난이 따라다닙니다. 무언가를 방관한다는 말은,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버려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선행이나 배려를 방관한다는 말은 없잖아요. 누군가의 악행이나 차별, 잘못을 방관한다는 말은 있어도 말이에요.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에 목격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때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내가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방관자 효과>는 그 고민을 하시는 분들에게 딱 맞는 책이에요.


 저는 심리학 실험을 볼 때마다 '우리가 뻔히 다 아는 걸 사회적인 실험으로 증명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습니다. 뻔히 보이는 결과를 데이터로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종종 연구자들의 예측과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니 더 뻔하게 느껴지는 거겠죠. 그리고 그런 심리가 있더라~ 하는 걸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무고한 타인을 해치라는 권위자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한다' 하는 명제가 있고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요리조리 분석해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사람이 많아서일까요?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마지막 장에 '내가 지금까지 증명한 것처럼 인간이 이따위로 생겨먹었으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행동하는 양심이 될 수 있는지 알려줄게!' 하고 ABC부터 알려줍니다. 나는 데이터나 숫자나 아무튼 증명 같은 건 됐고 그래서 뭘 할지 방향이나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분들은 마지막 장부터 읽어보셔도 무방할 정도에요. Part.1과 Part.2는 주로 왜 평범한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지, 왜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지를 사회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인간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기 쉽게끔 뇌가 설계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 본성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군중의 압박에 순응하려는 욕구가 적을수록,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어른을 보고 자랄수록 '도덕 저항가'가 되어 목소리를 낼 확률이 높아집니다. 실험과 뇌파를 통해 관찰한 이런 특성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측면이 있지만, 반대로 교육이나 계발을 통해 기를 수 있기도 합니다. 자존감이나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도덕 저항가가 될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단지 아직까지는 훈련이 좀 더 필요할 뿐인 거예요.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양심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 행동하는 양심이 될 확률이 높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가 정말 뭉클하고 좋았습니다. 르완다 학살이나 홀로코스트 사건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살해당하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도왔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부모나 조부모가 과거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도운 걸 보고 자랐다는 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세상은 이런 평범하지만 위대한 영웅들 덕분에 어떻게든 꾸역꾸역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이런 사람이 되고 싶고, 제 다음 세대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내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누군가가 정돈된 언어와 정확한 데이터로 짚어줬으면 하는 주제를 쉽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책입니다. 방관자 효과라는 제목에 끌리신 분들이라면, 이 책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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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 - 버닝썬 226일 취재 기록
이문현 지음, 박윤수 감수 / 포르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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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닝썬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나라였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상식이 아니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잖아요. 저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높으신 분들의 전횡을 보면 악역이 너무 납작하다고 불평하곤 했었는데, 현실이 그보다 더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서울 강남 한복판 대형클럽에서 버젓이 마약을 팔고, 여자들에게 약을 먹여서 강간하고, 미성년자가 출입하고, 그러면서도 경찰이나 정부는 거기에 손 놓고 있고... 무슨 무법천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는 버닝썬 사건을 제대로 보고했던 MBC 기자의 기록입니다. 서문에서부터 지적하고 있지만, 지난 2년간 버닝썬 사건은 빠르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몸통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형량을 받은 사람들도 정말 쥐꼬리만큼 받았습니다. 버닝썬과 유착 관계가 있었다고 의심되는 경찰 중 아무도 실형 선고받지 않았고요. 관련해서 법안 발의된 건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시끄러웠던 거에 비하면 그 결과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해요. 적어도 이만큼 큰 사건이 터져서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으면, 앞으로는 똑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도록 재발 대책이라도 확실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타임라인 보는데 정말 열이 확 뻗치더라고요.


 기자 본인이 그동안 억울하게 당할 뻔 했던 사건도 몇 가지 등장하는데, 버닝썬 사건과 별개로 그 사건 전개도 흥미로웠습니다. 그게 어떻게 버닝썬 사건 조사와 연결되는지도 잘 보이고요. 읽을수록 정말 증거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자가 예전에 택시를 잡다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3명의 상대방이 입을 맞추어서 기자가 먼저 일행을 폭행했다고 주장을 했다나요? 나중에 근처 CCTV 확보해서 넘기니까 그제서야 '한 번만 봐주세요' 하면서 연락이 왔더래요. 기자는 만약 그때 자기가 흥분을 했거나 CCTV 확보를 못 했으면 가해자가 되었을 거라고 회상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의 시작이었던 김상교 씨 폭행사건도 마찬가지인데, 김상교 씨가 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휘둘렀다고 주장하는 클럽+경찰 사람들이 한 20명 되니까, CCTV 없이 사람 바보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고 해요. 그나마 나중에 확보한 CCTV도 일부러 제대로 안 찍힌 각도에서, 다 삭제하고 조작한 걸 피해자가 법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받았던 거고요. 도대체가!


 개인적으로 강간약물 GHB 관련한 조처도 너무 허술해서 많이들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약물에 대해서 국과수에서도 아는 게 없다니 말이나 됩니까? 몸을 못 가누고 쓰러지는 게 아니라, 그냥 기억만 잃게 하고 상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게 만드는 약물이라니...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관련 실험도 하고 캠페인도 벌이는 약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신고한 피해자들에게 "제 발로 들어갔으니 강간이 아니다" 같은 헛소리를 수사 담당자가 하고 있다니 너무 화가 나요. 상습적으로 강간을 하는 가해자들이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경찰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정신이 돌아온 피해자한테 웃으면서 자기랑 같이 셀카를 찍어주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막 협박하는 걸로 봐서는 경찰에게 어떤 포인트를 강조해야 자기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잘 아는 게 분명하고요. 이딴 범죄자들이 아무도 체포되지도, 처벌받지도 않는 시스템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죠. 정말 국회의원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하나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처음에 김상교 씨가 클럽에서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사건이 불거지고, 경찰이 폭행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고 클럽을 아예 조사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고, 그걸 조사하는 기자에게 경찰과 클럽에서 어떻게 압박이 들어오고, 또 기사화되서 여론이 관심을 가지니 갑자기 피해자가 사실은 폭행이나 성추행의 가해자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그런데 김상교 씨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은 클럽 버닝썬에서 중국인 마약 딜러로 유명한 애나라는 여성이었고... 처음 사건을 인지했던 그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 조사를 했고 어떻게 사건이 커졌는지가 잘 서술되어 있어서 정리가 딱 되더라고요. 버닝썬 사건 여기저기 나오는 말이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던데..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범죄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때까지, 이런 기록이나 관련 이야기가 계속 끊임없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강남경찰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 넘치시는 그 경찰 '강남맨'들도, 버닝썬 관계자도, 거기서 마약을 사고팔았던 마약사범들도, 약물로 여성들을 성범죄 피해자로 만든 강간범과 그 조력자들도... 재산 다 날리고 몇십 년 정도는 감옥에서 썩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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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정리 1 - 개정판
드니 게즈 지음, 문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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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정신없는 소설입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내용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소설 자체의 미스터리도 3가지나 되는데, 거기에 이것저것 수학 공식과 수학자들 이야기가 껴 있거든요. 그 어떤 소설보다도 읽는 속도가 느렸던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수학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도 '내가 뭘 놓쳤나?' 하고 다시 돌아갔던 부분이 몇 부분이나 있었어요ㅋㅋㅋ 서술 자체가 순서대로 쭉 나오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거든요.


 주인공 뤼슈 씨는 젊었을 적 '철학' 관련해서 꽤 날리던 노인장으로, 파리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수학'과 관련해서 또 한창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던 그로루브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갑작스럽게 엄청난 양의 수학 관련 장서를 넘겨받게 됩니다. 알고보니 이 친구는 그 직후에 바로 화재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치 자신의 집에 화재가 나서 장서는 다 불타고 자신은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듯한 모양새죠. 이것이 첫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그로루브르 씨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 한 편으로는 막스라는 꼬맹이가 있습니다. 뤼슈 씨네 가게에서 일하는 페테르 씨라는 여성의 열한 살짜리 막내아들입니다. 귀가 좀 불편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그 덕분인지 오히려 온 몸의 감각으로 상대의 말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어요. 이 아이는 벼룩시장을 쏘다니며 타고난 감각으로 보물을 발견하는 재능으로, 어느 날 벼룩시장 모퉁이에서 남자 둘에게서 폭행을 당하며 "살려줘!" 하고 외치던(?) 앵무새 한 마리를 구조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앵무새는 보통 앵무새가 아니었고, 그래서 이 앵무새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마지막으로 페테르 씨의 아주 많이 생략된 가정사입니다. 페테르 씨는 어느 날 맨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맨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일방적으로 파혼을 했어요. 그 후 아홉 달이 지나 쌍둥이를 낳았고, 그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고아 소년 막스를 데려와서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저 이 부분에서 정말 이해가 안 되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었어요. 맨홀에 빠졌다가 나오고나서 파혼을 했고, 그 후 아홉 달이 지나서 쌍둥이를 낳았다- 이게 맨홀이 사실 물리적인 맨홀이 아니고 어디에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는 걸 지금 은유한 걸까? 그래서 쌍둥이가 태어났고? 그런데 나만 그걸 못 알아들었나? 하고 혼란스러웠어요. 앞으로 돌아가봐도 '인부들이 뚜껑을 열어두고 깜빡 하고 안전 표지판을 안 세웠다' 같은 묘사가 있으니 진짜 맨홀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해를 접어두고 읽다 보니까 쌍둥이도 자기 출생의 비밀(?)을 궁금해하더라고요. 맨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기들이 태어났냐면서요ㅋㅋㅋ 이것이 세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페테르 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2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1권에서 세 가지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2권에서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지 너무 궁금해요. 판타지스럽게 이어진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 분위기 자체가 약간 빙글빙글 어리둥절 돌아가는 파리의 수학 수업 같은 느낌이거든요. 일단 앵무새부터가 범상치 않잖아요. 정말로 피타고라스 시대부터 살아온 수학의 메신저, 수학의 요정이라고 해도 아 그렇구나 할 것 같다니까요~ (진짜로 작가님이 그렇게 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뤼슈 씨가 해주는 철학과 교묘하게 합쳐진 수학과 수학자 얘기도 꽤 흥미로웠지만, 저는 일상에서 소소하게 수학 문제 내는 서술이 참 좋더라고요. 나도 풀 수 있는 퀴즈 같은 느낌? 그리고 수학 문제와 현실의 문제가 겹쳐지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등변 삼각형을 생각하면서 페테르 씨와 그의 두 쌍둥이, 그리고 막내아들을 생각하는 식으로요. 수학을 일상에 이런 식으로 겹쳐볼 수도 있구나, 이게 수학자의 감각이구나, 싶어서 재밌었어요. 읽는 내내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한단 말이야?'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답니다. 탈레스 같은 사람들은 수학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삼각형의 내각'이라든지 '피라미드의 비례' 같은 걸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게 새삼 너무 신기했어요. 저는 평생 태어나서 수학 시간 외에는 수학적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학창시절에 읽어봤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배울 때, 이 소설을 같이 읽었으면 훨씬 더 재밌게, 훨씬 더 오래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음.. 그때는 이 소설도 그냥 참고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교과서에서 정해진 거, 원래 그런 거, 같은 느낌으로 배웠던 진리를 발견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과정은 뭔가를 배우는 데 엄청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괜히 다시 한 번 수학교과서를 펼쳐보고 싶다는 충동 아닌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네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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