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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 - 인류 최초의 신화 ㅣ 현대지성 클래식 40
앤드류 조지 엮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평점 :
'영생'은 창작물에서 굉장히 흔하게 나오는 설정입니다. 너무나 오래 살아서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켜본 존재들은 여기저기서 출몰하곤 해요. 하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보면 창작물 속 영생을 사는 존재들이 사실은 기껏해야 5천년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명조차도 겨우 그 정도니까, 문명 안에서 살려면 어찌됐건 그 언저리에 있어야 하는 거죠. 물론 엄청나게 긴 세월이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 수는 없겠죠. 하지만 영원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너무 짧은 기간이잖아요ㅎㅎ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까운 시간에서 시작했다는 실감을 하게 해주는 텍스트였습니다.
길가메시는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는 영웅이라는 묘사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그런 것 치고는 첫 태블릿부터 너무 비호감이에요! 일단 결혼을 하기 전에 신부는 왕에게 먼저 바쳐지는 풍습도 터무니없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길가메시는 그 어떤 신부도 온전히 신랑에게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떠들잖아요! 소개에서도 보면 길가메시가 '폭군에서 현자로' 바뀐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폭군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엔키두도 웃겨요. 아니, 결혼식 초야권에 분개해서 찾아간 주제에 싸움 한 번 졌다고 바로 절친을 맺다니? 정말 고대인들이란.
아무튼 그렇게 도원결의 비스무리한 걸 맺은 길가메시-엔키두는 젊은 시절 멋진 모험을 즐깁니다. 그리고 엔키두는 늙어서?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약해져서 죽고 마는데 그때부터 길가메시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기 시작해요. 분명 젊은 시절에는 엔키두한테 "죽음이 뭐가 두렵냐" 큰소리 땅땅 쳤으면서 영생 얻고 싶어서 온갖 짓을 다 하는 걸 보면ㅋㅋㅋㅋ 암튼 뭐 어찌어찌해서 영생을 준다는 해초를 얻지만 (이 부분에서 바리공주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고난 미션이 주어지지만 끝까지 해내 얻어낸다는 점에서요) 그걸 몸 씻는 사이에 홀랑 뱀에게 뺏겨버리고 말아요. 그리고는 온갖 후회와 번민과 절망 속에서 이제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통찰력을 가진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거죠.
정말 신기한 게, 번역본으로 봤을 때는 잘 못 느끼겠는데 중간중간에 점토판 출토된 걸 그림으로 삽입했거든요? 어떻게 그걸 보고 이런 이야기를 짜 맞춰서 번역했을까 놀랍습니다. 정말 이 작대기 그어놓은 점토판에 이 이야기가 들어있는 거야 싶거든요. 그것도 완전 조각조각난 점토판을 하나하나 복구해가면서 복원한 이야기잖아요. 언어라는 건 정말 너무 매력적이고 대단한 매개체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 다를 수가 있죠?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언어와 문자들이 새삼 너무 아까워요ㅠ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편의 논문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봤습니다. 서문도 그렇고, 해석도 그렇고, 뒤에 연대표라든가 레퍼런스도 그렇고 굉장히 꼼꼼하게 잘 정리해 놓으셨더라고요. 괜히 고대 문명을 탐사하는 학자의 조수? 학생? 정도가 된 느낌이었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