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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빨강머리 앤 (티파니 민트 에디션) - 1908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저자, 박혜원 역자 / 더스토리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빨강 머리 앤>은 ANNE 시리즈의 첫 번째 책입니다. 워낙에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단편까지 포함하면 11권이나 되는 시리즈인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익숙한 내용은 1권인 <빨강 머리 앤> 정도인 것 같아요. 앤이라는 고아 소녀가 마릴라와 매슈에게 실수로(!) 입양되고, 옆집의 다이애나와 천년의 우정(ㅋㅋ)을 나누고, 길버트와 서로 1등하겠다고 경쟁하면서 눈에 불을 켜고, 좌충우돌 사고를 쳐가면서 마을에 녹아드는.. 그 모든 과정이 1권에 다 담겨 있답니다. 2권부터는 이제 앤이 대학생이 되고,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나이들어 결국에는 세상을 떠나는 장면까지 천천히 나온다고 해요. 어릴 때 이 작품을 만나 커가면서 한 권씩 차례로 읽다보면, 말 그대로 앤과 함께 같이 늙어가는 기분일 것 같아요!
일본 애니메이션 덕분에 활자 속에서 살아숨쉬는 앤과 다이애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애니메이션을 직접 본 세대가 아닌데도, 워낙에 인터넷으로 그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많이 접해서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그 밖의 인물들은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캐나다 드라마와 창작뮤지컬 <앤ANNE>에서 등장했던 배우들로 상상했어요. 3D로 이미 접해서 상상의 폭이 줄어드는 건 조금 아쉽지만, 대신 훨씬 더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건 좋았습니다. 특히 목소리나 말투가 귀에 들리니까 대화 장면이 더 술술 읽히더라고요~ 하지만 역시 가장 좋은 순서는 책-영상-책인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잖아요.
사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 곳곳에서 '고아'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다는 게 드러나서 씁씁했습니다. 처음에 마릴라와 매슈가 일꾼 남자아이를 하나 입양할 거라는 얘길 했을 때 린드 부인이 자꾸 어디에서는 고아가 집을 태웠다더라, 어디에서는 고아가 우물에 독을 풀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하면서 겁을 잔뜩 주죠. 이후에 앤이 과격한 행동을 보이거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오해했)을 때 마릴라가 믿을 수 없는 애를 집에 들였다고 내심 생각한다거나, 앤의 좋은 친구인 조세핀 할머니가 고아원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하다니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는 묘사를 봐도 그래요.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보호자 없이 일정 기간 동안 자랐다는 것이 이렇게 큰 낙인이 찍히는 사회라니!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처음 왔을 때 마릴라와 한 대화를 보면 이 쪼끄만 소녀가 그동안 얼마나 형편없는 환경에서 지냈는지 보여서 눈물이 난다니까요.
"그 사람들, 그러니까 토머스 아주머니나 해먼드 아주머니는 잘해 주셨니?"
"아, 네......."
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을 고스라니 드러낸 작은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두 분 다 잘해 주려고 하셨어요. 될 수 있는 한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려고 하셨을 거예요. 잘해 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이 항상 잘해 주지 못해도 괜찮잖아요. 두 분은 나 말고도 걱정거리가 많았으니까요.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것도 정말 괴로운 일인데, 세 번이나 연달아 쌍둥이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아주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래도 두 분은 제게 잘해 주려 하셨던 게 확실해요." - p.72
워낙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다시 읽으니 새로운 부분이 많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짧은 대화를 들으며 책에는 나오지 않는 고아 소녀의 전사(前史)를 추측하고, 어떻게든 자기를 키워줬던 어른을 나쁘게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의 심정을 비통해하며 눈물 흘리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아마 제가 이제는 앤에게 이입하기보다는 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마릴라에 심정적으로 더 가까워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마냥 신나는 모험 같기만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서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마릴라의 훈육 방식에 동의했다가 동의하지 못했다가, 제가 앤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막 심각했답니다. 제 기억보다 앤이.. 정말 과격하더라고요..ㅎ
특히 길버트가 홍당무라고 놀렸다고 바로 석판을 들어 머리를 내려쳤던 사건! 만약 제 동생이나 조카가 그랬다면 기겁하고 상담을 알아봤을 거예요. 그 또래 애들이 서로 별명 만들어 부르고 놀리고 하는 건 흔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놀림받았을 때 앤의 대처가 너무 잘못됐어요. 제 기억 속에서는 길버트가 앤을 많이 괴롭혔던 것 같은데, 정작 소설 속에서 길버트가 한 일이라고는 처음 만난 빨강 머리 여자애한테 "홍당무" 하고 딱 한 번 놀린 게 다라서 앤의 대응이 너무 과격하고 일방적이었다 싶더라고요. 이 부분만큼은 정말 마릴라가 심각하게 걱정할 만 했다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앤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었던 '딸기주스 사건'이나 '보트 침몰 사건'에 비해 어른들이 가볍게 넘어가서 좀 놀랐어요. 1900년대의 캐나다와 2020년의 한국의 인식은 정말이지 큰 차이가 있나봐요;; 하지만 저 석판 사건만 빼면, 대체로 앤은 이렇다 할 문제 없이 그저 일상 속에서 소소하게 좌충우돌하면서 무럭무럭 잘 자랍니다.
앤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다이애나죠! 제가 봤을 때 <빨강 머리 앤>이 가지는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여자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보통 소녀의 성장담을 그리는 작품들을 보면 로맨스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단 말이죠. 마치 여자아이의 모든 관심과 로망은 연애와 결혼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잖아요. 하지만 <빨강 머리 앤> 같은 경우, 앤의 옆에 설 수 있는 딱 한 사람을 꼽는다면 쥐똥만큼의 로맨스를 보여주는 길버트가 아니라 서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에이버리에서의 모든 인생과 추억을 함께한 다이애나가 될 거예요. 서로 만남도, 우정도, 비밀도, 약속도, 심지어 절연과 재회까지도 너무너무 운명적이고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어린 시절 친구랑 교환 다이어리 쓰고 "우리는 평생 베프야" 같은 맹세를 해본 소녀들이라면 앤과 다이애나의 우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요ㅋㅋㅋ 어른들은 조금 우스워하지만 본인들은 엄숙하고 진지하다는 점이 너무 너무에요ㅋㅋㅋ
성장소설을 읽다 보면 왠지 저 자신도 주인공과 함께 그 시절을 살고, 주인공과 함께 한 단계 뛰어넘은 것 같은 아련한 기분이 들곤 하는데 <빨강 머리 앤>도 마찬가지입니다. 후반부 보면 제가 키운 것도 아닌데 막 마릴라-매슈에 이입해서 앤이 1등으로 시험 통과하고, 심지어 퀸스에서도 딱 한 명만 주는 장학금을 받고, 도시 전체가 모인 앞에서 시 낭송을 하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요. 아이고 내 새끼 모드에요. 가슴으로 낳은 내 딸이라니까요 하 진짜..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다음 시리즈도 계속 읽고 싶어요. 앤처럼 똑똑하고 매력적인 아이가 어떻게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지 보고 싶으니까요. 에이버리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는 거의 몰라서, 아예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더스토리에서 민트 에디션으로 시리즈 전체 쭉 내줬으면 좋겠네요:)